1.
“역시 너도 환각이지?” 이는 에카르트 올리버 크로스가 하랄트의 이공간에서 빠져나온 지 꼭 석 달 만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를 구조한 이는 이제 스물 넘겼을 법하게 생긴 인간 여성이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는 에카르트를 상대로 할 수 있었던 노력은 모두 부어준 편이다. 후에 그럴 수 있었던 원동력에 관해 물었다. 그 여자는 단단히 빚어 만든 잔에 찻물을 부어주며 대답했다. “저도 곤란할 때 어떤 토끼의 호의를 받은 일이 있어서요.” 요는 세상 사람들에게 빚을 졌으니 에카르트 크로스를 구조함으로써 빚을 갚고 싶었다는 얘기였다. 에카르트는 그게 다분히 장사치다운 셈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고.
햇살이란 걸 마주한 지 석 달이 되어도 그는 별반 다를 바 없는 상태를 유지했다. 한 발짝만 움직여 그 여자가 차려놓은 가게 문턱을 넘으면, 온갖 모습을 한 온 세계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걸어 돌아다니는데 평상에 앉아 잘 구경하다가도 돌연 속이 뒤집히는 것이다. 그는 어둠 속에 잠겨 너무도 많은 환각을 보고 환청에 시달렸다. 꼭 10년이 흘렀다는 것도 몰랐고, 사실 혼자라는 것도 잘 몰랐다. 환청은 날이 갈수록 힘을 얻고 환각은 시간이 쌓일수록 선명해졌다. 그쯤하니 거기가 정말 아무것도 없는 텅빈 공간이었다는 사실조차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다. 그냥 세상이란 원래 그런 것인 것처럼 느껴졌다. 호흡을 하는 게 당연하듯이. 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카오스로부터 시작하였고, 원래부터 햇살 한 줄기 들지 않은 채 천지 분간도 없이 마구 뒤섞여 있었던 거다. 거기엔 애초부터 아무도 없었고, 그래, 사실 유년 시절이라고 믿었던 기억부터 전부 착각이었던 거야. 세상은 어디로든 열려 있고, 도처에 공허함만이 도사리고 있었던 거다….
그러하니 이 찬란한 세계와 수많은 사람조차 에카르트 크로스라고 명명된 의식 구조가 무의미하게 빚어놓은 환상일 수도 있다. 구조되었다는 것도 거짓말이고, 눈앞에서 차를 따라주며 이상한 요구를 하는 저 여자도 무의식이 빚어놓은 인형 비슷한 거다. 그의 삶이란 일종의 거대한 사기극 같은 것이지 않았던가.
“환각임이 의심된다면 한 대 맞아볼래요? 어머나, 잘됐다. 저 잘생긴 사람을 때려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손잡이도 안 달린 찻잔이 제 앞으로 밀려왔다. 녹색 찻물 위로 비친 에카르트 크로스의 새파란 눈동자는 한층 흐릿한 눈빛을 담았다. 이 여자, 천도경 약초 상가 조합장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여자는 스스로가 만든 환각이라고 인정하기에는 남사스러운 말을 넙죽 할 때가 많았다. 에카르트 크로스는 스스로가 남들의 미의 기준에 맞는 인물인지, 그런 설정값 따윈 고민해본 적도 없었을 터다.
“환각이 아닌데 왜 그런 이상한 말을 하지?” 여자의 가게는 입식 구조로 설계되었지만, 식탁에 붙은 의자가 낮았다. 불평을 한 번 했더니, 그는 호들갑을 떨며 에카르트 크로스가 평균보다 큼직한 게 문제라고는 했지만.
“뭘 만들어보라니, 대체 무엇을? 애초에 내가 뭘 만들 줄은 아는 건가?”
“잘은 모르겠는데, 당신 손을 보면 분명 뭔가 만들던 사람인 것 같아서요.”
“그래?” 그제야 차를 마실 생각도 없이 찻잔만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빛이 들었다. 군데군데 남은 흉터며 굳은살이며 손의 윤곽이며 그 무렵 조금 드러나 있던 뼈마디 같은 게 보일 만큼.
“그것도 참 이상한 일이네. 네 주장에 따르면 난 10년이나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인데. 노상 자다 깨기만 하던 사람의 손이 이렇게 생겨 먹을 수도 있는 거로군.”
기억이 사라졌던 건 아니다. 기억 군데군데 지독한 의심이 스며든 것이지. 그 형량은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 머릿속에서만 일어났던 상념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선을 망쳐놓기 위함이었다. 만일 실험사고가 정말 일어난 일이라면—그러니까, 피해자 ‘필리피나’가 실존 인물이라면—글쎄, 모르긴 몰라도 감옥을 설계한 필리피나의 오라비 되는 남자는 어지간히도 혈육을 살해한 개새끼를 오랜 시간을 들여 존재의 뿌리까지 지워 사라지게 하고 싶었던 걸 테다.
“너 이름이 타오라고 했지.” 여자의 이름이다. 언젠가 에카르트가 본 적 있는 것 같은 그림 문자를 사용하여 지은 이름이라고 했는데, 에카르트는 그 글자를 익힐 만큼 어학 능력이 좋진 않았다.
“이봐, 타오. 내가 뭘 만들 줄 알 것 같아? 에카르트 크로스는 원래 뭐하던 새끼였을까? 난 도저히 그런 데에 머리가 안 굴러가는 놈인 것 같으니까 좀 도와줘 봐.”
“저, 당신 이름이 에카르트라는 것도 지금 처음 알았는데요?”
“말 안 했냐?”
“‘거, 이름이 뭐였더라’ 상태만 석 달째예요, 에카르트 씨.”
“사실 햇살이란 걸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게 맞는지 확신이 안 섰어.”
타오는 그 자리에서 차를 석 잔이나 비워내었다.
“글쎄요, 전에 망가진 벽시계를 고쳐주셨으니까…, 그런 종류 아닐까요?”
“시계나 오르골?”
“네, 그런 거.”
“마법사였을 가능성은 없을까?”
“왜 그렇게 생각해요?”
“내 이름 말이야. 내가 설정값 틀려먹은 게 아니라면.”
환각 앞에서 대체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거람, 그렇게만 생각했다.
“에크하르트잖아. 인간들 살던 윈터포그에선 설정상 그런 이름 쓰지 않으니까.”
2.
에카르트 크로스는 이후 자동인형 프로토타입 이카루스를 만들던 과정을 기억했다. 결과물만을 두고 보자면 그것은 실패작이다 못해 거나한 자살 행위였으나, 부정할 길이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는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사랑했다는 것. 작업에 몰두하고, 설계에 맞추어 가동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선명한 환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타오, 난 아무래도 더 살아야 할 것 같아.” 에카르트는 말했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작업, 놓을 수 없었던 열망을 남겨두고 죽고 싶진 않아.
그러니까, 군데군데 지워지고 망가진 나에게 남은 유일한 사랑, 그 작업, 에카르트 크로스라는 존재를 환각 아닌 실존으로 존재하게 하는 하나뿐인 근거, 그 예술이 미어지도록 애틋하기 때문에….
3.
틈에 온 이래, 에카르트 크로스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었다. 그건 가히 혁명적인 일이다. 구조자로부터 독립한 이상 제 몸 하나쯤은 건사해야 했고, 특히 근래 들어서는 쉴 틈도 없었다. 일주일쯤을 놀고, 아마 그를 다중차원이 당연한 세계에 안주하게 한 원동력이었을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지내며 그는 말 그대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자신이 누구인지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건 무척 편하고 안온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아침부터 하룻밤이 늦도록 결국 제 침실 바닥 한가득 차지하도록 설계도면을 그렸다. 공식을 계산하고, 그림을 그려내었다. 사후가 부탁한 일이 있다. 가능성은 낮다지만 그토록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달아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래, 어쩌면 말이다. 돌아갔다가 또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기록을 남기고 흔적을 남겨야만 했다. 기적을 일으키고, 누군가의 바람을 들어주는 거다. 에카르트 크로스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만 실존하므로!
“결국 마법사시네요, 크로스 씨.” 고개 들지 않아도 없을 게 뻔한 환청이 그런 소릴 하면, 에카르트는 대꾸한다. “절반은 영원히 그렇겠지.”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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