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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카르트/16] 책장엔 만화책을 두고 교과서를 둘까 해.

Mirror All 모나 2021. 5. 5. 19:28

  나는 가끔 우리 집에 책장이 꼭 필요했을지 모르겠다고만 생각했다. 그러잖아도 좁아터진 집 한쪽 벽면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그 책장엔 책이라고 할만한 게 꽂혀 있지도 않았다. 내가 헌책방에서 구해온 만화 한 질, 푼돈 모아 겨우 몇 개 사 봤던 장난감 몇 가지. 그게 다였다. 책장은 군데군데 좀먹힌 듯 비어 있었고, 학년이 바뀌면서 쓰지 않게 된 교과서조차 새 학기 직전에 득달같이 고물상에 팔아버려 남은 게 없었다. 나는 그게 가끔 아빠의 삶 같은 가구라고 생각했다. 남은 게 별로 없는 삶. 뼈만 남고 살은 붙은 게 별로 없는 생선 같은 모양새다. 아빠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사실은 아무에게도 책임을 묻지도 일이었지만, 어쩐지 그 책장이 앙상한 뼈처럼 느껴지는 밤이 오면 소리 없이 슬퍼졌다. 저 책장에 내 물건 몇 가지 간신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고, 딘 크로스가 가지고 있었을 그 어떤 것들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도리 없이 죄스러워지는 거다.

    

  어머니가 마법사란 걸 알게 되고도 나는 아빠에게 그래서, 아호른 마법사 같은 건 어쩌다 만나게 된 거냐고 묻지 못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집 한구석에 있었던 기타는 언제 고물상에 내놓았느냐고 묻지도 못했다. 그건 어쩐지 그런 질문 같았다. 나를 키우느라 잃어야 했던 것이 사실은 얻은 것보다 많지 않았어? 대체 언제부터 내가 아빠의 숨통을 끊어놓았느냐는 말이야.

    

  사람들은 아이에게 방 한 칸 내어주지 못하는 형편에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사치라고들 했다. 우리 아빠 같은 사람들은 사회의 시선이 닿지 않는 다리 밑 공방에 틀어박혀 고독사하면 그만이라는 거다. 왜냐하면, 이런 시대에 오래된 시계를 고치고 만드는 직업 같은 것은 도태된 것이니까. 패배자는 물밑으로 가라앉고 휩쓸려 사라지는 게 공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주제도 모르고 덜컥 낳고 만 아이는 사랑을 알 리 없다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그 어떤 사랑조차 필요하지 않을 거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말이야. 단언컨대 나는 인간이다. 내 아버지 딘 크로스도 사람이었고. 인간이 생존하는 데엔 밥 아닌 것이 필요하기도 해. 그러니까, 사랑은 승리자에게만 주어지는 보상 같은 게 아니라는 얘기야.

    

  내가 없었더라면 아빠는 지금도 쉬는 날이면 기타를 만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행복하진 않았을지도 몰라. 때때로 숨이 막히고, 공방 밑에 흐르는 어둑하고 진득한 물소리에 진절머리가 나는 순간도 있었을 거다.

    

  아빠, 있잖아. 역시 그냥 우리 책장엔 만화책을 두고 교과서를 둘까 해. 벽엔 아빠가 사줬던 책가방을 걸어두고, 같이 달걀 끝을 조금 태워 먹고 만 오므라이스 같은 걸 먹으면 좋겠어.

    

  서글프게도 우리는 인간이잖아. 외롭고 싶지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