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녹두]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여, 행복하여라.

Mirror All 모나 2021. 11. 15. 20:36

* 계연 캐릭터인 록산느의 세계관을 고려해서 적어보았습니다.

욘님과 논의한 설정상 패트릭이 사학자가 아니라 (진짜ㅋㅋ) 록스타입니다.

 

1.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약속한 바가 있었다. 일요일 오전이었고, 교회에 가기 전에 있었던 짧은 독대였다. 어머니가 두 동생을 데리고 먼저 바깥으로 나간 틈을 타 몸을 낮추어 앉아 나를 마주하신 것이다. 그때 나는 열 한 살쯤 되었고, 우리 가족이 모두 나의 문제로 골몰하던 시기였다. 모호하던 것이 명확해졌고, 교회의 사제부터 시작하여 많은 어른이 나를 둘러싸고 마치 취조하는 것처럼 묻고 곤란한 기색을 하던 시절이다.

 

  “너 그런 건 대체 어디서 배웠니?” 에둘러 표현해도 모두가 궁금해하던 건 그것 하나뿐이었다.

 

  “패트릭.” 부모님은 나를 좀처럼 그렇게 부르지 않으셨는데, 그렇기에 내 이름은 암묵적인 약속처럼 굳어져 있었다. 내 아버지가 엄중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면 무언가 중대한 용건이 있는 거였다.

 

  하시는 말씀을 듣겠다는 의미로 대꾸는 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마주 선 채로, 나보단 내 동생 세실을 많이 닮은 당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머릿속으로는 요 며칠간 내가 사고를 친 게 있나 가볍게 검토하느라 바쁘긴 했다. 우리 아버지가 엄하기로는 보통 분이 아니었다. 상벌의 기준은 명확하셨지만, 기준에 따라 필요한 훈계는 빼놓는 법이 없었다. 식전 기도를 대충했던 것 같다거나, 요즘 마음이 심란해서 수업 시간에 다른 생각을 많이 했다거나, 그런 사소한 것들이 줄줄이 기억 속에서 끌려 올라왔다. 뭐가 되었든 늦지 않게 고해하는 편이 차라리 신상에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열려는데, 아버지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내가 예상한 궤도를 조금 벗어나 있었다.

 

  “난 네가 나와 아가사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던 기억이 났다. 내가 만난 모든 어른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뭣 모르고 저지른 일이니까 용서하자는 결론으로 마무리된 게 차라리 다행일 지경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저지른 것이 없는데도.

 

  오컬트라면 만연했다. 영적인 것을 보는 사람이 많았고, 삿된 것과 계약을 나누어서 초자연적인 힘을 휘두르거나 운명을 트는 범죄가 빈발했다. 사람들은 법을 만들었고 행정과 사법을 통하여 집행했다. 나의 아버지는 직업상 법률을 오래 공부했는데, 그런 사람의 주변 인물이란 특히나 상식적이었다.

 

  타고난 초능력은 이례가 없었다. 초자연적인 존재의 힘을 빌리는 위법은 존재하더라도. 그 점이 내가 평생토록 품고 있었던 의구심에 대한 해답이었고,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곤혹에 빠졌던 이유다.

 

  “그렇지만, 아마도 사람들은 널 많이 의심하겠지. 네가 부정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내 옷매무새를 간단히 매만져주는 아버지를 가만 바라보다가 입안으로 웅얼거렸다. “전 정말 몰랐어요. 세상은 넓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사니까, 누군가는 저처럼 특별한 힘을 타고나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너의 무지를 짚어주자고 말을 꺼낸 게 아니야.” 아버지는 흔들림도 없이 굳건한 눈빛을 유지했다. “우리가 너를 보호할 완벽한 논리를 찾을 때까지, 웬만하면 아무것도 읽지 말라는 당부를 하려는 거다.”

 

  “할 줄 아는데도요? 그건 아주 쉬워요.” 따지기보다는 답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게 아버지는 무너질 리 없는 사람처럼 보였고, 그 시절엔 특히나 세상의 모든 진리를 깨우친 사람처럼만 보였다.

 

  “제 말은, 사람은 표정만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니까 가끔 무섭잖아요. 물건으로부터 기억을 읽으면, 어쩌면 그 사람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알고 나면 무섭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유혹은 무척 이겨내기 어렵단 말이에요….”

 

  생각해보면 그럴 리가 없었다. 성년을 맞이한다고 갑자기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었고, 세월은 오늘내일 변함없이 흐르는 강처럼 무상하게도 흘렀다. 아버지라고 모든 걸 알고 있을 리 없었고, 아마 일러주시던 말이 모두 정답이야 아닐 것이다.

 

  “…두려움 때문에 타인을 한낱 데이터로 전락시켜서는 안 돼, 리키. 인간은 알수록 무서운 것이고, 그런 식으로 알아서도 안 되는 존재야.”

 

  미완성일지라도 그때 우리가 함께 생각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다.

 

2.

 

  사람들을 속이는 일은 서글프도록 쉬웠다. 패트릭 칸이 거짓말에 대단히 뛰어난 재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음악이라면 몰라도 연극엔 특별한 재능이 없다고 확신했고, 쓰지 않으려고 애만 써온 통에 스물이 넘도록 어떻게 해야 완벽하게 읽지 않을 수 있는지 요령을 터득하지도 못했다. 그는 스스로가 느끼기에 도리어 연기가 어설펐다. 읽고도 읽지 않은 척을 하는 게 쉽지 않을 때가 있었다. 소리 없이 곤란에 빠졌다는 걸 알게 되면 그런 의무감이 고개를 들었다. 도와야 한다. 그것이 알고 만 자의 숙명이다.

 

  그럼에도 그가 사이코메트리라는 사실을 직접 의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패트릭은 생각했다. 아마도 그건, 사람들의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편견의 베일은 때로 눈앞에 버젓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설령 패트릭 칸이 오래된 유적의 기억을 읽어 고스란히 베껴서 논문을 조작한다 해도 보지 못할 것이다.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고 작정한 이의 눈을 찌를 생각까진 없었다. 물론, 정말 유적의 기억을 읽지도 않겠지만. 패트릭 칸은 오래도록 초능력을 방치했고 한계를 잘 몰랐다. 어느 정도로 오래된 기억까지 읽을 수 있는지, 그것이 건강에 무리가 없는지 그런 간단한 기초부터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초능력과 완전히 무관한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 노래를 만들고 부르고, 기타를 치고 녹음을 하고 남는 시간엔 한적한 라이브 카페에 앉아 신청 곡을 불러주는 사이사이 몇 안 되는 사람들과 안부를 주고받았다. 어느 날 손끝에 스친 오래된 기억을 읽고 먼지를 먹도록 오래 방치한 초능력의 존재를 불현듯 인식하면서도, 그런 자신을 대중에 세우고 싶다는 욕망은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아버지와 약속했고 불필요한 오해를 사고 싶진 않았다. 아닌 척하면 사람들은 알아서 속아주었고 사는 데 힘들지야 않았다.

 

  그냥 모르게 두는 것이다. 영원토록. 무의미한 일상을 보내고, 타고난 초능력을 감춰둠으로써 패트릭 칸을 이루는 나머지 절반을 숨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면 했다. 적어도, 그 이유가 자기는 아니었으면 했다.

 

3.

 

  그렇게 기나긴 변명을 했다. 창밖에는 록산느의 집에서 조금 쉬고 갈 구실이 되어주었던 눈가루가 흩날렸다. 날이 흐릴지언정 해는 아직 하늘에 걸려 있었다. 늘 바쁘던 사람이 가까스로 활동을 잠시 멈추고 한숨 돌리고 있던 시기였고, 눅눅한 공기는 때로 사람을 노곤하게 만들기도 했다. 패트릭 칸은 품 안에서 아직 잠들어 있는 록산느 캐트슨을 잠이 덜 깬 눈으로 한 번 살폈다가, 그의 새까만 머리칼이 오래된 리본으로 아직 묶여 있음을 깨달았다. 손끝에 닿아 있던 리본을 당겨 풀어보면 머리칼은 침대 위로 쉽게 흐트러졌다. 딱히 낮잠을 잘 예정이 있던 건 아니었다. 록산느가 최근까지 바쁘게 일했고, 그러고도 좀처럼 쉴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눈이 내리는 김에 어리광을 조금 가장했을 뿐이다. 조금 자는 게 낫다거나. 쉬는 동안엔 확실히 쉬는 게 좋아요. 당신의 눈은 꿈을 직시하고 있을 때 아름답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나랑 있을 때까지 애쓰지 않았으면 하거든요….

 

  록산느는 패트릭에게 이럴 땐 제법 기꺼이 속아주는 경향이 있었다. 그저 편하게 떠들다가, 쌓였던 피로가 몰려들면 품에 기대어 잠들 정도의 사이는 되었다. 자는 모습을 가만 구경하다가 패트릭도 까무룩 잠이 들었고, 깨고 보니 손끝에 분명 집에서만 사용하고 있을 록산느의 오래된 리본이 걸려 있었다. 어쩐지 꿈자리가 좋지 않다 싶었다. 어쩌면 한숨도 똑바로 잠들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백일몽처럼 취해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록산느의 오랜 기억 한 토막에. 근래엔 실수로라도 읽은 게 별로 없었으니까, 그가 타고난 초능력이 조금 변덕을 부린 것일지도 모를 일이고.

 

  패트릭 칸은 안경을 쓰지 않아 흐릿한 시야를 잠시 창밖에 두었다. 인간은 데이터가 아니라는 말은 제법 지당하게 느껴졌다. 읽으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니, 대체 무슨 오만이란 말이냐.

 

  읽어 들인 기억 속 록산느는 지금보다 조금 어렸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시절인 것 같았다. 조금 더 불안해 보였다. 구체적 정황보다는 감정이 휘몰아치는 백일몽이었다. 분명 어려서부터 한 가지 길을 뚜렷하게 걸어온 사람이었을 텐데도, 그러니까, 패트릭 칸은 그간 간과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가 자신의 절반에 달하는 초능력과 그것에 연루된 과거를 덮었듯이 록산느 캐트슨 또한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지를 못한 것이다.

 

  과거가 없이 오롯이 현재뿐인 우리라면 좋겠지만, 우리는 서글프게도 과거로부터 왔다. 수많은 과거와 그 순간에 있었던 격정이 맞물려 지금의 우리를 완성했다. 그리고 아마도 과거의 기억을 읽을 수 있을지라도 패트릭 칸은 록산느 캐트슨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퍼즐 조각이 있어도 맞추는 법을 모르면 맞출 수가 없다. 인간은 그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스럽고, 또 그럼에도 안아주고 싶은 거지. 그는 잠든 사람 특유의 높은 체온을 간직한 록산느를 가만 끌어안고 생각했다. 서로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인류가 그럼에도 서로를 격정으로부터 위로하고 싶다 느끼는 일을 사랑이라 명명하자. 우리는 모두 평행하기에 인류는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섣불리 단정 내리지는 말자.

 

  그러니까 언젠가는 말을 해야지. 나는 그런 불쾌한 힘을 타고났다고. 그러고 나서 언젠가 그가 내게 알려주지 않았던 남은 것들을 이야기한다면 가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 식으로 대단찮은 사랑을 논하자. 그 정도의 미지근함이 좋다고, 패트릭 칸은 창밖을 새하얗게 물들이는 눈발을 바라보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