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다이스케] 아게하가 웃었다.

Mirror All 모나 2023. 7. 25. 21:16

  코이즈미 아게하가 웃었다. 무대는 밤 깊은 나고야다. 가을바람이 청량했고, 백 년에 한 번인지 이백 년에 한 번인지 뜬다는 커다란 보름달이 떴다. 병원 옥상은 늘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있었지만, 글쎄, 두 사람을 가로막기에 규정은 힘이 없고 자물쇠를 망가뜨리기란 쉬웠다. 어느 현현한 사도가 권능을 사용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코이즈미 아게하가 망치를 들고 자물쇠를 부쉈다. 그녀는 옥상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망치를 든 채 두 팔을 넓게 벌렸다. 심호흡했다. 웃었다. 그리고 한차례 기침을 쏟았다가, “이거 재미있네요.”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마야마 다이스케는 어느덧 난간까지 달려간 환자복 차림의 그녀를 멀거니 쳐다보다가 옥상 문을 닫았다. “별걸 다 재밌어하시는군요.” 그는 20세기 말에 세상에 다시 현신한 카마이타치였다. 올해로 스무 살이 되었고, 남들보다 몇 발자국 앞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학부생이던 시절이다. 아게하는 그보다 두 살이 많았는데, 다이스케가 무심코 핀잔을 던지면 꼭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삐죽였다. “당연히 재밌죠, 망치를 들고 자물쇠를 부숴본 건 처음이란 말이에요.” 다이스케는 “보통은 그런 경험을 해보지 않습니다.”라는 얄궂은 말을 빼먹지 않았다.

 

  “그 ‘사도’라는 사람들도 안 해보나요? 첩보 작전 같은 걸 할 거 같았는데.” 아게하는 슬리퍼를 신은 발치 근처에 아무렇게나 망치를 내려두었다. 난간에 기대어 병원 너머의 세상을 보면 나고야의 상징인 커다란 텔레비전 송신탑이 보인다. 그리고 만화처럼 아주 커다란 달이.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도들하고 협력 잘 안 해서요. 친하지도 않고.” 다이스케는 그녀의 곁에 서서, 난간 너머가 아닌 난간 안쪽 답답한 병원 옥상의 철문을 쳐다보았다. 담배를 피우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아게하는 호흡기가 좋지 않다고 들었다. 의미도 없이 시선은 바람의 결을 따라 흘렀다. 허공을 쳐다보고, 달빛이 드리운 난간 그림자 끄트머리, 아게하가 머리를 묶은 새빨간 리본 따위가 흐르듯이 다이스케의 시야에 들었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친한 사람이 있긴 해요?” 아게하가 짓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도 빼고. 전 인류 중에 당신하고 친한 사람이 있어요?”

  “꼭 필요하지도 않잖습니까?” 다이스케가 피로하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면, 이마 어딘가가 찢어졌는지 머리가 욱신거렸다. “죽었을 때 아끼는 인간 순장할 것도 아닌데.” 카마이타치의 벽안이 아게하를 힐끔 쳐다보았다. 날이 어두워 그녀는 눈앞의 인간이 틈새를 수선하다가 부상을 입었음을 알아차리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혹은, 원래 그만치 시야가 좁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

 

  아게하는 어느덧 옆에 선 두 살 어린 남자를 주시했다. “그냥 순장해달라고 해요.” 또 미친 소릴 하는군. 다이스케는 고개를 무심히 숙인 채 생각했다.

 

  “다쳐가면서 세상 구하고 있는데 아끼는 인간 순장해달라는 부탁이 너무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머리 다쳤죠?”

  “아시면 좀 보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아는 척하고 싶었단 말이에요!”

  “뭘 아는 척하고 싶었는데요?”

  “당신이 사람들 몰래 병원에 기어다니는 커다란 벌레들을 싹 처치했다는 걸 아는 척하고 싶었던 거죠. 나이도 어린데,” 그녀는 몸을 뒤척여 섰다. 달빛이 쏟아져도 숨이 턱 막혀 오는 하얀 건물. 망치를 들고 자물쇠를 부숴도, 아게하가 걸어 올라올 수 있는 한계는 결국 이 깔끔하고 하얀 건물의 울타리 안이다. “고생하고 있잖아요? 누구라도 하나 나서서 잘했다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다이스케는 지겹다는 얼굴이나 한다. “됐습니다, 칭찬이건 순장이건.” 보상이 없는데 세상을 왜 구하느냐고, 사도로 나서 수백 번 들은 질문이다.

 

  “어차피 다 유흥이고 비즈니스라서.”

 

  아게하는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마야마 군이 뭘 얻는데요?”

  “즐거움.”

  “오늘도 이마 찢어졌는데. 아픈 거 좋아해요?”

  “그렇게 표현하시면 제가 상당히 이상한 사람처럼 들립니다만.”

  “마야마 군은 늘 이상했어요. 환자들도 마야마 선생님들네 막내가 살짝 이상하다고 다 쑥덕거린다구.”

  “그렇습니까? 큰형님께서 아주 싫어하실 것 같으니 앞으로도 미친 척을 좀 해야겠네요.” 아게하는 그의 날이 선 한마디를 듣고 재밌지 않은 유머라며 투덜거렸다.

 

  “멍청하게 앉아서 엇비슷하게 죽어가는 인간들을 쳐다보는 건 지루합니다. 전 이 종말이 벌써 두 번째라서요.”

  “아, 카마이타치는 두 번째로 온 거라고 했던가요?”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전생 기억해요?”

  “그걸 전생으로 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뭐, 딱히 기억하는 것도 아니지마는요. 제가 유달리 사는 일에 일찍 질렸다는 것만 봐도 제 절반의 신격이 종말에 참여하는 게 두 번째라는 사실이 영향이 없는 것 같진 않으니까.”

  “나이도 어리면서.”

  “그러니까 말입니다. 참 억울하게도,” 다이스케는 웃지 않았다. “나이도 어린데 만사가 너무 끔찍하게 지겹네요. 그러니 전투라도 하면 좀 낫습니다. 괴물은 다양하고, 생사라도 오가면 좀 살아 있는 기분이라도 드니까.”

 

  아게하는 “가만 보면 저보다 당신이 더 시한부 같이 살아요, 마야마 군.”라면서 난간에 기대어 말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요컨대 당신은 흥미를 추구하는 것뿐인데 얻어걸린 것처럼 인간마저 구원받고 있을 뿐이니 칭찬받을 일은 아니라는 거네요.”

  “네, 뭐, 솔직히 종말이야 아무래도 좋기도 하고.” 그리고 다이스케는 매번, 아게하가 웃지 않을 때나 웃었다. “다른 사도들에 비하면 구원에 워낙 진심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만나보시면 당신도 제대로 된 비교를 할 수 있을 텐데요.”

  “뭐, 세상 구하는 일에 진정성 꼭 필요한가.” 아게하는 몸의 반동을 이용하여 사뿐한 걸음을 내디뎠다. 난간에서 한 발자국 멀어지고 나면, 커다란 달을 인 마야마 다이스케가 실존한다.

 

  “구하고 있잖아요. 그럼 된 거죠.”

  “저의 진심이 인류에게 없는 까닭에 생색내지 않겠다는 것뿐입니다.”

  “괜히 악당인 것처럼 굴기는. 다이스케 군은 악당은 못 할 팔자라니까. 진짜 악당이라면 일 안 해도 생색낸다구.”

  “막말로 한낱 인간이 신에게 무슨 수로 보상합니까?”

  “우와, 그건 진짜 악당 발언이다.” 숨죽여 웃는 소리. “이런 소릴 들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누나가 인류를 대표해서 바라는 거 하나 들어줄게요.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을래요?”

 

  마야마 다이스케는 비현실적으로 밝은 달빛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선 코이즈미 아게하를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쳐다보다가, “됐으니까 무병장수나 해주십시오.” 혀나 짧게 차고 말았다.

 

  그러고 나면 “거봐, 악당 못 할 팔자라니까.” 인류를 대표하여 아게하가 웃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