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설리번/루치오] 보너스 게임

Mirror All 모나 2023. 12. 14. 21:15

  테이블이 크게 흔들렸다. 카드는 발치에 쏟아지고 칵테일이 엎어졌다. 불빛은 어스름했다. 마주 앉은 이의 얼굴보다는 윤곽만 간신히 보일 만큼. 어거스터 설리번은 미동도 없이 담배를 피웠다. 둥그런 테이블을 소리가 날 만큼 두드린 남자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남자는 “야, 이 개새끼야.”라며 험악한 말을 쏟았고, 불현듯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나더니 설리번의 머리에 총구부터 들이밀었으니 화가 났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었다. 설리번은 짧아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대답했다. “뭐가 불만인지 말해보게.” 고개를 들면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조명 탓에 그림자까지 뒤집어쓴 남자의 시커먼 형체가 있다. 커다란 선글라스도 한껏 사나워진 기운을 가리진 못했다. 설리번은, (그는 두 해 전 기적적으로 다시 파벨 어거스터 설리번이 되었는데,) 새로 담배를 물었다가 천장을 쳐다보며 까칠한 한숨만을 뱉었다. 희뿌연 연기는 조명을 이기지 못하고 녹았다.

 

  “내가 이 빌어먹을 도박판에 얼마나 있었는지 알아?” 남자가 기가 막힌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테이블을 후려친 손에 힘이 들어간다. 설리번은 지겹다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한 25년 있었겠지.” 대단한 계산식까진 필요 없다. 요컨대 남자의 평생이다. 그는 담배를 쥐지 않은 손을 대뜸 허공에 내저었다. “도박판에만 있었겠나, 굳이 일일이 열거하지 말게. 진부하니까.”

 

  남자의 주장이었다. “카드 바꿔 쳤잖아.” 설리번은 그저 담배를 태웠다. “내가 언제?” 시선은 천장에서 허공으로 미끄러지다가, 남자의 얼굴에 머물렀다. 이제 설리번은 남자와 영혼이 연결된 형제들의 얼굴마저 안다. “자네가 아는 손기술을 내가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나?” 이를 테면 사도 아테나, (그녀는 오레스테스 재판의 판결을 재심했다.) 남자는 잠시 제 입술만을 깨물었다. “그럴 리가 없지? 내가 그렇게나 프로였으면 자네가 이름 한 번 못 들어보고 얼굴 한 번 못 봤을 리가 없으니까.” 혹은 사도 디오니소스, (그는 언제나 광신도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열하자면 종결한 체스판에 다녀간 신들이 너무 많다.

 

  사도 멀린, 어거스터 설리번은 종말이 물러갔음에도 자신이 어찌 된 연유로 체스판에 돌아왔는지 몰랐다. 어디를 쳐다보아도 세상이 찢어지지 않는다는 건 기이한 경험이었다. 괴물은 없고 가여운 혼백은 가끔 있다. 인류는 여전히 어리석고 알아서 행성의 죽음을 초래하고 있지만, 적어도 차원 너머에서 건너오는 불가해가 인간을 해치는 일은 없다. 사도가 불필요한 시대다. 인간이 불가해를 해결하기 위해 갈망하여 태어난 반신(半神)이 무용(無用)하다. 네 번째로 돌아온 사도 멀린은 인류에게 쓸모가 없다.

 

  하물며, 이 남자는 어떠한가. 사도 헤르메스, 루치오 라니에리가 인류에게 이제 와 무슨 구원이겠나. 또다시 시대의 사각(死角)에서 현현하여 더 끔찍하게 전락한 범죄 조직에 사로잡힌 이 전령(傳令)신에게 인류는 무슨 연유로 이러한 서글픈 ‘보너스 게임’을 하사하는가 말이다.

 

  “총은 내가 들고 있어.” 우리는 그 남자의 이름을 알았으니, 그를 ‘루치오’라고 호명하자. 선글라스 아래로 번뜩이는 눈동자가 피처럼 붉다. “용어의 정의부터 정리하지, 루.” 물론, 설리번은 우리의 합의와 무관하게 루치오를 오래 묵은 애칭으로 호명한다.

 

  “카드를 바꿔 쳤다는 건, 내가 자네에게 들키지 않고 숨겨둔 카드로 바꿨다는 의미 같은데.”

  “그거 말고 다른 정의가 필요한가?”

  “자네가 말하는 속임수가 그거라면 더구나 나는 결백하네.” 어거스터 설리번은 피로한 낯빛이다. 그는 기어이 새로 물었던 담뱃불마저 끄고 손을 뻗었다. 루치오는 뺨을 스치는 손길에 눈을 짧게 깜빡였다. “숨겨둔 카드를 꺼낸 게 아니라, 카드의 모양을 마음대로 바꾼 거거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나면 폭포처럼 불빛이 쏟아졌다. 놀라 어깨 너머로 돌아보면, 들어온 출입구가 없다. 마주 앉아 있던 테이블도, 발치로 쏟아진 트럼프 카드, 숨을 죄어오는 도박장의 답답한 공기마저 썰물 빠지듯이 물러간다. 남은 것은 두 사람과 새하얀 공간(空間). 루치오는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올리고 일변한 환경을 얼어붙은 얼굴로 응시했다. “마법으로.”, 그래, 우리가 현현케 한 위대한 마법사의 마법이지.

 

  루치오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주 멍청한 질문만을 할 수 있었다. “여긴 어디지?”라거나, “도대체 당신은 ‘누군데’?”. 사실 카지노에서 처음 마주쳤을 적부터 품었어야 하는 의문이다. 한낱 민간인이 말단일지언정 마피아 조직원에게 포커 승부를 제안한다는 건 어지간한 배짱이 아니고서야 저지를 일이 아니니까. “그러게나 말이야.” 어거스터 설리번은 소리 내어 짧게 웃었다.

 

  “자네는 누구고 나는 누구지? 이쯤 되니까 나도 잘 모르겠네, 그건.”

  “나를 알아? 방금 나를 루라고 불렀지.” 루치오는 간신히 총구를 내리고 설리번을 마주 보았다.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얼굴이다. 기억에 쉽게 남을 인상도 아니거니와, 어거스터 설리번은 너무나도 평범하게 생긴 남자다. 어딜 가나 흔해 빠진 갈색 머리, 녹색 눈, 크지 않은 신장과 나지막한 목소리.

  “아니, 모르네. 잘 몰라.” 설리번은 그제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건 나의 인간성이 저지른 무모한 도둑질에 불과하네. 이렇게 이해하자고.”

 

  인간 설리번이, (이렇게 쓰게 되어 나는 무척 못마땅한데,) 루치오 라니에리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동안 조금씩 공기가 무거워졌다. 책 먼지가 부유한다. 조명이 따뜻하게 가라앉았다. 새하얀 공간에 불현듯 밀어닥치는 책장과 쓰러진 책더미, 루치오는 불현듯 책은 빛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이번엔 내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명이 별달리 없어서,” 넥타이를 제대로 고쳐주고 나서야 설리번은 손을 거두었다. “안 어울리는 낭만 해적이나 되어볼까 싶어졌다고 말이지. 이번에는 내가 길 잃은 자네를 약탈해서 안전한 바다에 버리는 거야. 단지 내가 인간이고 자네 또한 인간인 까닭에.”

 

  “…미친 소리 하지 마.” 루치오 라니에리의 대답이다. “하선할 테니까 출입구부터 열어.”

  “해적선에 출입구가 어디에 있나? 못 배운 마피아로군.”

  “아니, 젠장, 야, 이 납치범 새끼야,”

  “애초에 포커에서 지면 자네 미래를 내가 사는 조건이었잖나.”

  “아직 안 졌잖아, 이 사기꾼 새끼가,”

  “뭐, 그럼 이길 때까지 해보는 것도 괜찮겠군. <피코드 호>에서 패전해본 적은 없지만. 여긴 나의 인지가 곧 물리 법칙이거든.”

  “도대체가,”

  “말이 안 된다고?”

  “알긴 아네.”

  “당연하지, 마법은 원래 좀 터무니없어.” 설리번은 한참 웃었다.

 

  “뭐, 너무 화내진 말게. 정말 안전한 장소를 발견하면 내려줄 테니까. 나는 정말이지, 더는 해야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거든. 한가한 나머지 자네의 남은 보너스 게임이 도로 핏빛이 되지 않도록 약간 살펴는 주고 싶을 만큼.”

  “왜 그렇게까지 해?”

  “말했잖나?” 진부하게도, “우리는 물질적 형상을 갖춘 서로의 인간성이기 때문이지.” 평화로운 이 시대에 그들은 사도 아닌 까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