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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ror No.9/Mirror No.9 Rebellion

Mirror No.9 Rebellion 1. Traveler(1)

  미스터 버트럼, 부디 이 편지가 무사히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보내주신 편지는 제대로 도착했음을 알립니다.

 

  마법으로 속달을 보낼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용서하시기를. 제가 지금 의탁하고 곳은 국가 공인 학회가 아닌 통에 자금이 넉넉지가 않습니다. 문의하신 일이 한시를 다투는 시급한 일은 아니었어야 할 텐데요.

 

  우선 보내주신 편지에 적힌 마법 장치의 제작에 제가 크게 관여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돈이 급했습니다. 당시의 저는 이렇다 할 학회에 소속된 몸이 아니었고 더불어 본디 저를 후원해주고 있던 그리폰 남작과 연구 주제를 놓고 갈등이 생겼습니다. 고향인 남부 프림데를 떠나고 보니, 또 동포인 남작을 척지고 나니 이종족 그리폰인 저를 받아줄 만한 귀족 가문이 여의치 않더군요.

 

  그러던 도중 제게 마법 장치 개발 프로젝트 하나를 해결해주면 영구적인 후원을 약속한 자산가가 나타났습니다. 솔직히 그 작자가 제게 보여준 프로젝트 계획서는 터무니없었습니다. 그 작자도 어지간히 급했겠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아무렴, 미스터 버트럼께서도 알고 계시리라고 믿습니다만 그가 원하던 그 마법 장치가 어지간히 괴물 같지 않습니까? 그러한 공식을 완성할 수 있는 존재는 최소 10년, 20년, 30년, 100년의 세월을 견딜 수 있는 자여야 할 게 뻔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비록 그리폰 남작을 등졌으나 인간보다 확연히 수명이 긴 그리폰이었죠. 더불어 남작이 요구한 연구 주제보다는 이쪽이 좀 더 빠른 해결을 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선행 연구자가 제법 많은 문제를 해결해두었고, 제가 해결해야 하는 부분은 식음을 전폐하는 수준으로 매달린다면 10년 안에 해결할 수 있을 듯 보였습니다. 인간은 못하더라도 이종족인 저라면 어찌 해낼 수 있을 것 같았죠.―그런 의미에서 나의 선행 연구자였던 요한나 파우스트 양께서는 굉장한 천재성을 지닌 연구자였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더불어 저는 그것이 신의 영역이라고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도 신의 영역은 아니었고요. 그자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마법을 어째서 원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자는 제게 한낱 인문학 연구자라고 밝혔을 뿐입니다. 그래, 인간의 호기심은 끝이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리폰보다는 못하겠습니다마는.

 

  사담이 길어진 듯하여 각설하겠습니다. 결론은 그리하여 제가 후원금을 목적으로 삼고 프로젝트에 참가했다는 것, 마법 장치가 완성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당신도 알고 나도 아는 터무니없는 일을 목격하고 그 미친 작자와 연락을 끊어버렸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당신께서 원하신 정보를 한 줄로 간략하게 요약하여 덧붙인 후 편지 마무리하겠습니다.

 

  마력코어의 피를 사용하세요. 4명분 정도면 충분합니다.

 

  모레오드의 웬디 달링으로부터.

 

* * *

 

  마부는 마차를 멈춘 후, 말에서 내렸다. 짐을 올리기 위하여 말에 연결했던 수레에는 오늘 안에 마을의 모든 주점에 공급해야 할 술통이 요령 좋게 쌓여 있었다. 나무통 사이에 다리를 접고 앉아 손바닥만 한 문고본 소설을 읽던 소년은 수레 바닥 위로 마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자 고개를 들고 마부를 돌아보았다.

 

  “뭐야, 도착했어?”

  “도착했으니 바퀴가 멈췄지 괜히 멈췄겠냐. 내려. 삯도 내놓고.”

  “안 떼어먹어. 누굴 사기꾼으로 아나.”

 

  소년의 말은 퍽 짧았고 마부는 그 사실이 매번 신경에 거슬리던 참이었다. 소년이 오른손에 들고 있던 퍽 가벼운 책을 덮고, 왼편에 기대어 세워두었던 칼자루를 쥔 후 수레에서 내리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짝다리를 한 채 지켜보던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영 살갑지가 못한 꼬마였다. 물론 몇 푼 안 되는 돈일지언정 쥐여주겠다는데 태워주지 못할 건 없어 수레 한구석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건방진 태도가 기분 나쁜 건 별수 없었다. 그는 감정이 없는 마차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감정 없이 자동으로 움직이는 마차가 개발되었더라면 아마 그는 마부가 아니라 다른 직장을 찾아봐야 했을 터다.

 

  “자, 약속했던 돈.”

 

  소년은 수레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후, 약속한 만큼의 은화를 내놓았다.

 

  “태워줘서 고맙다는 말은 안 하냐?”

 

  마부는 햇빛에 은화를 비춰보고 유심히 살핀 후 바지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으며 투덜거렸다. 소년은 칼을 허리춤에 차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미간 사이를 좁히고 입가를 비틀어 미소 같지도 않은 미소를 그려보았다.

 

  “뭐야, 돈 받고 일한 건데 뭐가 고마워? 공짜로 태워줘야 고맙지. 당신은 빵집에서 빵 사면서 빵 구워줘서 고맙다는 소리 하고 그래?”

 

  이 조그마한 어촌, 자베이온까지 오는 도중 마부는 소년과 사사로운 대화를 시도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대화는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어딜 가나 타인의 시선을 받았을 법하게 예쁘장한 생김새와는 달리 소년의 시선은 무엇을 보든 비뚤어진 시각을 유지했고 말은 바짝 날을 세운 다음에야 내뱉어댔다. 부모가 대체 요 건방진 꼬마에게 무엇을 가르친 걸까. 뭘 가르치기는 했을까? 하긴, 어쩌면 부모가 없이 큰 꼬마일지도 모른다. 근 10년 사이 정치가 요동을 치면서 없는 사람들은 더 살기 어려워졌고, 그러는 동안 먹을 입을 줄이기 위해 자식을 길바닥에 내다 버린 부모도 많았다.

 

  무엇보다 멀쩡하게 컸다면 칼을 항시 차고 다니지 않겠지. 마부는 소년의 직업이 무엇이든 그다지 건실하지 못할 거라고 짐작했다.

 

  “고맙다고 해서 나쁠 건 없잖아, 꼬마 주제에 싹싹하질 않네.”

  “싹싹하면 등쳐 먹히기나 하지. 당신 말대로 나 같은 꼬마들은 더 그렇고.”

  “말이나 못 하면….”

 

  마부는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은 후, 담배를 피우기 위한 파이프를 꺼내었다.

 

  “그래서, 이제부턴 어디로 가냐? 갈 수단은 있고?”

 

  소년이 가는 곳은 자베이온이 아니라고 했다. 목적지는 훨씬 남부였고 자베이온은 그가 가는 길목에 위치한 마을 하나에 불과했다. 마부는 소년을 남부까지 태워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에게도 일상이 있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게 있었다. 그의 마차는 자베이온의 북부에 있는 모레오드라는 도시와 자베이온을 오가며 물자를 이동시키는 게 일이었다. 그로 하여금 자베이온보다 남쪽으로 내려가게 만들려면 소년이 내놓은 삯의 열 배쯤은 쥐여주어야 했다.

 

  “찾아봐야지. 여기서 블라우로 가는 마차 하나쯤은 있지 않겠어? 블라우에서 프림데까진 기차가 있을 테고, 프림데에서 숲까지는 뭐…. 걸어가는 수밖에 없으려나.”

  “이 마을 광장에서 출발하는 합승 마차가 하루에 한 번 블라우로 가긴 하는데.”

 

  파이프에 담뱃잎을 털어 넣으며 넌지시 생각난 바를 입에 올리자 소년이 눈을 끔뻑였다.

 

  “대금은 얼마나 드는데?”

  “120캐럴 정도.”

  “마차 한 번 타는데 완전 도둑놈들이잖아. 그 돈을 한 번에 썼다간 기차를 못 타.”

  “뭐, 그럼 블라우까지 걸어가든가.”

  “…일단 마을 좀 한 번 둘러보고. 혹시 뭐, 당신처럼 블라우로 술통이나 밀 포대 같은 걸 옮기는 짐 마차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나처럼 싼값에 태워주는 사람 없을걸.”

  “그야 모르지, 찾아보고 없으면 그때 가서 생각할래.”

 

  소년은 기지개를 한 번 쭉 켠 후 마부에게 메마른 작별을 고했다.

 

  “그럼 잘 가셔. 원한다니 태워줘서 고맙다고는 해둘게.”

 

  물론, 돈은 뜯어갔지만. 소년, 제임스 윈프리드는 감사에도 불만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 * *

 

  그가 남부, 통칭 ‘이종족의 숲’을 향해 육로로 이동하게 된 기저에는 나탈리 호 선장의 변덕이 있었다. 그는 12살에 나탈리 호에 탄 이래, 선장과 똑바로 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손에 꼽을 것도 없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선장이라는 작자는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제 기분이 좋은가 하면 오늘 기분은 지옥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오늘 얌전한가 싶으면 내일은 또 어처구니없는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 가히 미친놈이라고 할 만했다. 그런 그가 제임스의 이름을 똑바로 기억하고 있을 리도 없었다. 물론 몇 번인가 머리채를 잡힌 일이야 있지만, 선장에게 이유 없이 맞고 걷어차였던 소년 선원이 어디 한둘이던가. 선장의 시선에서 제임스가 특별할 리 없었고, 그런 그가 갑작스럽게 제임스를 호출한 일은 그야말로 해가 서쪽에서 뜨는 일이었다. 제임스는 선장의 선실을 향하면서도 출발하기 전에 유서를 써야 했던 건 아닌지 고민했다. 운이 나쁘면 이놈의 미친 선장의 기분이 지옥 밑바닥을 넘어 행성의 내핵까지 뚫고 들어갈 만큼 나빠서 맞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던 탓이다.

 

  “조만간 배에서 내리게 해주지.”

 

  미쳤군. 막상 마주한 선장의 입에서 떨어진 간결한 한 마디에 제임스는 망설임 없이 그렇게 판단했다. 배에서 내리게 해주겠다니 제정신이 박힌, 정확하게는 평소처럼 이상한 사고방식으로 행동하는 선장이라면 할 법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모든 소년 선원들의 하선(下船)을 금지했다. 제임스가 들어온 이래, 배가 정박해도 살아서 뭍으로 내려갔다는 아이는 한 명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미쳤다고 대답할 순 없었다.

 

  “뭍에서 뭘 하면 됩니까? 시키실 일이 있으니까 내리라고 하시는 거 다 압니다.”

  “…편지를 전달해. 여기 적혀 있는 사람에게.”

 

  선장은 책상 위에 있던 편지 한 통을 제임스에게 던졌고, 그의 날선 태도에 익숙한 제임스는 요령 좋게 허공으로 날아오던 편지를 잡아채었다.

 

  편지의 봉투에 적힌 이름은 제임스로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메르헨에 있는 사람이면 우체국을 통해 보내시는 게 빠를 텐데요. 누구든, 뭐, 시킬 사람은 많잖아요. 수배까지는 안 걸린 어른 선원들도 수두룩한데.”

  “네가 편지를 전달해야 하는 곳은 요르문간드의 숲이다.”

  “아, 저런. 이종족의 숲이요? 거긴 아직도 우편 마차가 안 가던가.”

  “10년이 지나든 20년이 지나든 인간 사회가 발전하지 않았다는 증거지.”

 

  아, 네, 그러십니까. 비딱한 빈정거림이 제임스의 입 안 가득 차올라 입천장이 간지러울 지경이었으나, 꾹 참고 바지 주머니에 편지를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제가 도중에 연락이 끊어지거든 숲의 이종족들한테 잡아 먹힌 줄 아십쇼.”

  “…그럴 가능성이 가장 낮아서 널 골라 보내는 거야. 어쨌든, 넌 그렇게 생겨 먹었으니까 누구든 하나는 알아보겠지.”

 

  미쳐도 좀 곱게 미칠 순 없는 건가? 제임스는 메르헨의 최북단 출신이었고 요르문간드의 숲은커녕 남부 황야 지대에 발 한 번 들여본 적이 없었다. 그럴진대 숲에 아는 얼굴이 있을 리 만무했다.

 

  저놈의 선장은 어젠 또 뭘 했기에 저런 헛소릴 하는 걸까. 그러나 제임스로서는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거부하려면 대가를 치러야 했다. 물론 그 대가는 목숨이었다.

 

* * *

 

  마부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웬만한 짐 마차는 사람 하나를 태울 수 없을 정도로 가득 물자를 실어 이동하는 것을 선호했고 몇 푼 안 되는 돈에 어린아이를 태워주려고 들질 않았다. 난감하군. 선장이 그에게 준 기간은 3개월 남짓이었고, 그것도 썩 넉넉하게 준 건 아니었다. 프림데까지는 인간의 영역이니 빠르게 이동한다손 쳐도 이정표도 없는 숲에서 편지를 받을 이종족 하나를 찾아 헤맨다는 것은 여간 시간이 들어가는 작업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급적 인간들이 장악하고 있는 영토만이라도 빠르게 주파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얼마 오지도 못한 지점에서 발이 묶여서야 곤란했다. 태워줄만 한 값싼 이동 수단을 얻지 못했으니 돈이 좀 아깝더라도 합승마차를 알아보는 수밖엔 없었다.

 

  물류업자가 모여서 업무를 보는 상업 지구를 벗어나 우선 광장을 목적지로 삼았다. 듣기로는 마을의 모든 길이 하나뿐인 광장으로 통하는 구조라고 했으니 방향만 똑바로 잡는다면 길을 잃을 일 없이 광장에 도달할 터였다. 해는 중천에 걸렸고,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수레를 굴리거나 부단히 발을 놀리며 스쳐 지나갔다. 제임스는 길의 왼편 가장자리에 붙어 느릿하게 걸었다. 나탈리 호는 그를 인적 드문 바닷가에 내려놓았고, 뭍에 들어와 똑바로 된 인가를 둘러보게 된 건 자베이온이 거의 처음이었다. 본디 이렇게 활기찼던가. 나탈리 호에 타기 전에 살았던 블라우나 고향인 슈니플로케는 어땠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둘 다 여기보다 큰 도시이니 훨씬 복잡하고 번화했을 텐데, 제임스의 기억 속에서 뭍이란 늘 우중충한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쩌면 빈민가와 뒷골목을 전전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멀쩡한 보호자 없이 먹고 살려다 보니 그런 거미줄 같은 지옥에라도 걸어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기에 그는 고개를 젓고 똑바로 앞을 보았다. 골목길은 점차 넓어졌고, 건물 틈틈이 새어드는 파란 하늘은 청명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됐는데?”

  “음, 배를 띄워서 다 같이 오즈로 떠나버렸어. 해피엔딩이지?”

  “하멜, 오즈는 좋은 나라야?”

  “글쎄. 안 가봐서 모르겠는데, 좋은 곳이니까 다 같이 떠나버린 게 아닐까.”

 

  제임스의 걸음이 천천히 느려지다 못해 우뚝, 멈추어 섰다. 그가 걷고 있던 제법 널찍한 골목길과 연결된 실핏줄 같은 골목 어귀에 한 남자가 여관이 내어놓은 빈 나무 상자에 앉아 어린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좁다란 골목에는 햇살이 들지 않았고, 남자와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에도 가득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렇더라도 그들의 얼굴 생김새를 식별하는 것이 어려울 만큼 어둑하진 않았다. 제임스는 그들이 영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미루어 가족이 아니리라고 짐작하며 때아닌 오지랖으로 입을 열고야 말았다.

 

  “가보면 오즈도 별거 아냐. 귀족의 탈을 쓴 도둑놈들 천지라고. 여왕인 테미스 스완도 좀 이상한 사람이고.”

 

  아이에게 ‘하멜’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남자는 그제야 제임스가 그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제임스는 그의 선명한 분홍빛을 띤 눈동자를 보고 생각했다. 마력코어로군. 보기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모르겠는데. 어쩌면 별로 닮지 않은 할아버지와 손녀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습관처럼 얼굴에 배시시 웃음을 녹였다.

 

  “친구는 오즈에서 왔니? 그 나라를 잘 아는 것 같네.”

  “거기서 온 건 아니고…. 뭐, 어쩌다 보니 들을 일이 많았어. 오즈에 관해서. 친구가 거기서 왔거든.”

  “오, 그렇구나. 요즘은 중북부에도 난민이 많이 늘었다고 들었단다. 정말 그런가 보구나.”

  “…내가 북부 출신인 건 어떻게 알았어?”

  “억양이 그쪽이어서.”

  “망할, 배에서 지내면서 억양도 많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부질없는 바람이었군.”

  “하하, 뭐, 꼭 억양을 이 근방 사람들처럼 바꿔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야 그렇지만.”

 

  하기야, 슈니플로케에 두고 온 게 뭐라고 출신지를 들키는 게 큰 흠이겠는가. 그가 하멜의 말에 쉽게 납득했을 무렵, 하멜은 천천히 나무상자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자신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 있던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다.

 

  “아무튼, 오늘의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야, 제시. 사이먼이 점심 먹자고 찾으러 오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렴.”

  “왜? 오빠가 올 때까지 이야기 하나 더 해줘도 되는데. 우리 오빠를 왜 그렇게 싫어해?”

  “사이먼은 너만큼 귀엽지가 않거든. 그래서 별로 보고 싶지가 않네.”

 

  제시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두 손으로 열심히 눌러 정리하더니, 바짝 고개를 들어 하멜을 쳐다보았다.

 

  “내일도 여기 올 거야?”

  “제시가 오면.”

  “그럼 내일은 더 재밌는 얘기 가져와!”

  “신에 가까운 마법사보다 더 재밌는 거? 그런 게 있으려나.”

  “없으면 만들어 와도 돼.”

  “그래, 최선을 다해 지어내 보겠습니다, 공주님.”

 

  내일 보자. 남자는 아이와 손을 흔드는 인사까지 꼬박 주고받고 나서야 제임스가 서 있는 대로변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 사라졌고, 아이는 머리칼을 한참 더 매만진 후에야 제임스를 한 번 홱, 쳐다보았다.

 

  “너도 내일 여기 와?”

  “…나? 아니, 뭐…. 아마 내일은 여기 없지 않을까?”

  “왜?”

  “왜냐니, 난 여기 사람이 아니야. 여길 지나서 다른 델 가야 한다고.”

  “그래도 내일 와. 어디 가지 말고.”

 

  어처구니없는 꼬마네. 제임스가 입안으로 웅얼거리는 소리를 제시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내일 와서 오즈 얘기를 해줘. 여왕님 얘기가 좋겠어.”

  “너 정말 웃기는 애구나.”

  “그치만 이 근방엔 오즈에서 왔다는 사람 한 명도 없는걸. 말 안 해주면 아무데도 못 가게 오늘부터 종일 네 다리에 매달려 다닐 거야.”

  “협박하냐? 이상한 꼬마네, 진짜.”

  “다리에 매달린다?”

  “정말 훌륭한 해적의 재목이로구만.”

 

  물론 그렇다고 나탈리 호를 타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이 처음 보는 꼬마는 치사하다고 생각할지 모를 일이나 제임스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광장에는 가야했고 합승마차의 시간은 알아봐야 했으며 3개월 안에 숲에서 특정 재버워키를 찾아야만 했다. 할 일이 그다지도 산더미 같지 않았더라면 꼬마가 해달라는 이야기 한 두 개쯤 지어내주지 못 할 것도 없었으나 제임스는 그다지 자유로운 몸은 아니었다.

 

  “알았으니까 너 얼른 집에나 가. 너희 오빠인가 뭔가가 애 없어졌다고 온 동네에 난리를 피우기 전에.”

 

  난리를 피우기는 하는 오빠일까? 물론 제임스는 사이먼이라는 사람은 머리칼 한 가닥도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제시가 원하는 것처럼 아무렇게나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