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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수스] 정신 나간 낭만주의자 코이즈미 아게하가 죽었다. 오늘, 아니면 어제…. 하하, 이건 너무 지독한 농담이겠다. 나는 그녀를 알았으나 그녀가 나를 알았다고 거짓말하려던 건 아니다. 나는 모든 사도의 주변인을 얼추 파악해두었고, 덧없고 아름다운 이름을 쓰는 그 여자가 카마이타치가 총애하는 유일한 인간이란 사실만을 알았다. “가만 보면 당신께서는 죽음만 쫓아다니시지 않습니까.” 병원 옥상이다. 사도 카마이타치는 어느덧 스물다섯이었고, 나는 불혹을 한 해 앞두었다. 달빛이 찬연하다. 그는 시멘트 바닥에 뭐 하나 깔아두지 않고 누워 있었고, 나는 그 옆 난간 앞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피워본 적도 없는 브랜드, (그런데 이 깜찍한 젊은 사도는 또 언제 담배 따윌 배웠나, 의사라는 애가 말이지….) 잘 모르는 국가. 습한 바람과, 텔레비..
[헤수스] 남겨진 사람들 1. 텔레비전에 나오는 종말론이 지겨웠다. 20세기의 마지막 해였다. 틈새는 폭주하고, 내가 알았던 사도들만 해도 셋은 죽어 땅에 묻히고 불에 탔다. 96년도에 위기에 처한 마을 하나를 구하러 떠났던 사도 둘이 함께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많이 울었고, 장례가 끝나고 나서 일부러 멍청하고 우스꽝스러운 미래를 궁리했다. “헤수스, 다들 1999년에 세상이 종말할 거라고 믿잖아,” 카를로스 그레코가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2000년에 뭘 할지 정하자.”, “미친놈. 어차피 망한다는 데 그거 정해서 뭐 하게?” 그게 나였다. “우리 세상은 인지가 휘두르잖아.” 카를로스가 기숙사 천장에 붙인 멍청한 야광 별이 반짝였다. 나는 그것을 졸업할 때까지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인류보다 강하..
[헤수스]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테지. 0. 나와 그가 같은 날에 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죽어갔을 사도들에 관하여 생각했다. 그들은 무슨 사연으로 한날한시에 죽었을까? 그러나, 우리처럼 오는 사도가 최초는 아니었을 것이다. 같은 해, 같은 날, 몇 분 차이 두지 않고 죽어버리는 사도들. 까닭에 동시에 새롭게 세상의 부름을 받고 현현하는 신격. 뭐, 나와 카를로스가 마지막도 아닐 테지. 그에 관한 이야기다. 1. 사도로서 실격이라면 할 말이 없다. 나는 메리다에서 벌어진 틈새를 멀거니 쳐다만 보았고, 기어 다니는 이형의 존재들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람을 잡아먹거나 말거나, 시민 대부분은 카르멘과 나보다 먹고사는 일에 지장이 없지 않았나. 오늘 먹을 것, 내일 입을 옷을 걱정하지 않는 인간의 미래를 대신 그..
[헤수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1. 쓰레기장에서 카르멘을 보았다. 기묘한 일이다. 사도는 현현한 날에 반드시 부름을 받은 인간에게 발견된다는 모양인데, 기억의 실을 끝까지 더듬어 올라가면 언제나 그녀가 있었다. 살갗이 타고 태양이 뜨겁고, 역겨운 냄새가 나던 장소에 지저분한 얼굴을 한 사람이. 그녀는 끝이 너덜너덜 떨어지고 색이 바랜 보라색 옷을 입고 있었고, 너부데데한 얼굴에 박힌 난처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엉망진창으로 서로 엉킨 머리카락 사이 회색 눈동자가 조그마한 나를 한참 쳐다만 보았다. 그녀 어깨 너머로 흐르던 구름이나 쓰레기장의 풍경은 군데군데 유화 물감을 덧바른 것처럼 뭉개졌거니와 세상에 갓 태어났던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는지 따위는 모호하다. 다만 눈빛을 기억한다. 망측한 걸 보았다는 얼굴. 망설임과 번민이 ..
[용하람] 그 열차에 탄 이유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 옛사람의 지혜에는 하나 틀린 것이 없다. 하람에게는 아직도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전단지 따위를 거절하지 못하는 습관이 남아 있었다. 시간대를 밝히자면 햇살이 말간 아침이다. 조카가 다니는 초등학교 앞에 녹색 깃발을 들고 서서 하품한다. 그날따라 학교 앞엔 이런저런 전단지를 나눠주는 잡상인이 많았다. 미술 학원, 태권도 도장, 영어 학습지, 홍보하는 품목도 많았다. 하람은 깃발을 들고 나온 학부모 중에서도 그런 잡상인을 쫓아내기 좋은 입장이었던 까닭에-단지 그가 체격이 좋은 남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생기는 힘이 있다. 하람이 유일하게 선호하지 않는 권력이지만.- 전단지를 품에 안은 이들을 타일러 돌려보냈다. “학교 앞에서 그러시면 안 돼요. 알만 하신 분들이 이러시네.” ..
[용하람] Farewell : 오류수정불가선언문 1. “그래, 일이 결국 그렇게 되었구나.” 노장은 15살 이후로 노화하지 않았지만, 내 앞에서 소년의 모습을 한 일은 없다. 바닷가였다. 태평양과 이어진 내 고향.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권능을 갖춘 디오니소스는 그날 딱 도환찬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모습을 하고 앉아 있었고, 이 소식을 맨정신에 들을 수는 없겠다며 기어이 고개를 한껏 기울여 술 한 잔을 들이켰다. 초겨울엔 바닷가에 사람이 잘 오가지 않았다. 우리는 머리칼에 사각사각 모래가 배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도 않고 앉거나 누워 있었다. 겨울 하늘은 물을 탄 것처럼 흐리고, 언제나 반쯤 술에 취해 있는 노장 디오니소스는 연신 포도주도 아닌 맥주를 종이컵에 따랐다. “해츨링 군도 한 잔?” 그가 불쑥 종이컵을 내밀면 웃어줄 기력도 나지 않았다...
[용하람] 회색 일색 사도란 건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할머니를 만나고, 주하와 손을 잡고 보육원에 나오고서도 몇 년이 지나고서야. 열세 살 되던 해의 겨울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식을 코앞에 두었던 날. 호랑이 같은 할머니의 손주들이 되어서, 우리는, 특히 나는 주하보다도 더 엄격하게 인간성에 관한 교육을 받으며 지냈다. 초등학교에선 빈번히 전화가 왔다. 할머니는 전화 한 통이 걸려올 적마다 나를 불러다 앉혔고, 왜 그런 못된 일을 저질렀는지 물었다. 어릴 때 쓴 반성문이 몇 천 장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별로 진지하게 잘못했다고 쓴 적은 없었지만, 그때 배운 건 하나였다. 아, 대충 잘못했다고 빌면 봐주는구나. 반성하지 않았던 까닭은 내가 우리 여사님을 사랑하지 않아서는 아니고, 초등학교에서 내가 저질렀다고 난리법석이 ..
[용하람] 신과 인간 그 사이 밸런스 뙤약볕이 쏟아졌다. 그 해 기록적인 더위라고 했는데, 돌이켜보면 20세기 여름은 버틸 만했던 것 같다. 추억이라 살만했던 것처럼 떠오르나? 기억이란 우리의 상상보다 나약한 토대를 가졌으니까. 피부로 닿았던 기온은 모르겠다고 고쳐야겠다. 그래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촉각이 있다. 종아리에 닿는 목재 바닥이 뜨거웠고, 샌들 안으로 들어온 모래가 까끌까끌했다. 주하가 말했다. “너 그렇게 살다간 사람으로 못 자랄걸.” 그 이야기를 할까 한다. 그러니까, 1997년에 신주하였던 어린양에 관해서. 초여름이다. 초등학교 수업은 오전이 지나면 끝났고, 나와 신주하가 지금보다 몸집이 작던 시절. 나와 주하가 지내던 보육원 뒷마당엔 아이들 놀라고 만든 볼품없는 놀이터가 하나 있었다. 먼지 날리는 모래가 깔려 있고, 플라스틱..
[도환찬] 세상이 멸망하는 그날까지 죽도록 미워했고, (중략, 지워내기, 자격 미달, 삭제, 권리 없음) 앞으로도 그럴 거야. 1. 위성도시는 흠 없이 여전했다. 커다란 시장이 가까운 대로변은 번잡스럽고,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는 도로를 납작 기어 다녔다. 하늘 가득 석양이 들었다. 여기선 서울은 가까우나 바다는 멀었고, 일상은 가시적이고 비일상은 비가시적이었다. 골목을 파고들고 언덕을 올라가는 도환찬은 모두의 이목을 끌지만, 저무는 태양이 길게 늘여놓은 그의 기이한 형태의 그림자에는 그 어떤 시선이 닿지 않는다. 해가 짧은 계절이다. 노을은 서녘으로 후퇴하고, 별 한 점 없는 밤하늘은 해일처럼 금세 밀려들었다. 집 앞의 어둑한 골목에 가로등 불빛이 들었다. 그가 세 들어 사는 옥탑방은 2층 주택가가 이고 있었다. 녹슨 대문 앞에 오도카니 서..
[도환찬] 레테를 건너 1. 장치에 손을 얹으면 쏟아지는 폭언이 영상에 불이 드는 것보다 신경을 사로잡았다. “얘가 왜 이래.”, “너 대체 어느 집 애니?”, “시발, 이거 안 놔? 내가 저새끼 죽이고 오늘부로 깜빵 간다. 놔, 새끼야,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어른이란 새끼들이….” 기억을 헤집어 날을 특정하자마자 무의식에 파묻고 잊어버린 푸닥거리가 펼쳐진다. 눈살을 찌푸렸다. 그날로부터 14년이 흘렀다. 오래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시간이 무정하게 흘러 내 기억을 엉망으로 꼬아놓았구나. 어떠한 물리적 개입이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10년 전 오늘 누구와 만나 어디서 밥을 먹었는지 따위 정황을 기억할 수 있는 인간이 없듯이, 내게도 자연스러운 마모가 일어났던 것뿐이다. “아, 하람이 저새끼 저날 교복 입고 왔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