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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환찬] 레테를 건너

1.

  장치에 손을 얹으면 쏟아지는 폭언이 영상에 불이 드는 것보다 신경을 사로잡았다. “얘가 왜 이래.”, “너 대체 어느 집 애니?”, “시발, 이거 안 놔? 내가 저새끼 죽이고 오늘부로 깜빵 간다. 놔, 새끼야,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어른이란 새끼들이….” 기억을 헤집어 날을 특정하자마자 무의식에 파묻고 잊어버린 푸닥거리가 펼쳐진다. 눈살을 찌푸렸다. 그날로부터 14년이 흘렀다. 오래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시간이 무정하게 흘러 내 기억을 엉망으로 꼬아놓았구나. 어떠한 물리적 개입이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10년 전 오늘 누구와 만나 어디서 밥을 먹었는지 따위 정황을 기억할 수 있는 인간이 없듯이, 내게도 자연스러운 마모가 일어났던 것뿐이다. “아, 하람이 저새끼 저날 교복 입고 왔었네….” 그마저도 잊어버리고 살았다. 부모님의 장례식에 그 애가 교복을 입고 올만치 어렸다는 것. 그땐 머리칼이 까만색이었고, 키는 이미 나와 비슷했고, 그 애가 다녔던 먼 동네 학교의 교복 색깔이 안 어울리게 짙은 초록색이었다는 사실이나, 이 발칙한 19살짜리가 내 외삼촌이란 작자의 멱살을 잡았다는 사실마저도.

 

  이런 기억은 도저히 남들과 함께 들여다볼 수가 없다. “아, 씨, 근데 쟤 왜 동복 입었지? 우리 부모님 기일 11월인데, 불길하게.” 자랑은 아니지만 나나 저 <불경한 무직자>나 언어생활이 고운 편은 아니었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우리는 둘 다 항상 정신의 끄트머리 어딘가엔 분노로 얼룩져 있었다. 온 친척 어른들이 달라붙어 그 애와 나의 외삼촌을 떼어놓느라 애를 먹는다. 그러는 동안 나는 별다른 말도 없이 뻗어 올라가는 향불의 연기, 그리고 나란히 배치한 영정사진 속 사랑했던 이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시야가 흐리지 않다. 울진 않았던 모양이다.

 

  사랑하던 이들이 청천벽력처럼 하루아침에 통으로 도려내지니 막막할지언정 슬프지가 않았다. 내가 거기에 왜 있는지도 모르겠고, 주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인지가 되지 않았다. 어제 우리 집 근처에서 틈새가 발생했다. 하람이는 사정상 도저히 올 수 없었고, 협력하기로 한 다른 사도가 오지 않은 바람에 일이 조금 꼬였다. 나는 그때 내가 정말 사람 새끼가 아니구나, 사람 새끼가 아니라면 신이라도 되었어야겠는데, 어설프다는 건 둘 다 이를 수 없다는 의미다. 인류는 나에게 보상할 의지가 없다.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이건 그러니까, 내가 짐작하던 것보다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이 죽고, 주변은 소란스러운데도 말 한마디 입 열지 않고 서서 국화 꽃잎 한 장 한 장 세듯이 실없는 생각을 했던 것만 같은데….

 

2.

  아일랜드에서 마난난 맥 리르가 오겠다고 했다. 나는 12사도에게 부고를 보내지 않았다. 누구에게 들었느냐고 물을 기력도 들지 않았다. 그 어르신은 어째서인지 사도인데도 몸이 자주 아팠고, 저택 밖으로 직접 행차하는 일이 많지 않았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알겠다. 그날 나를 도와주러 오지 않은 사도가 마지못해 알고 지내는 모든 사도에게 연락한 것이다. “도와주세요, 잘못했어요….” 뻔하지. 오기로 했던 그는 겁이 많았다. 사도로 태어나 행복할 사람은 아니었다.

 

1.5

 

  기억을 조금 미래로 당겨보자. 머리 위로 허여멀건 빛이 떨어진다. 오가는 사람은 없지만, 누가 탔고 어디로 떠나는지도 모를 자동차 몇 대가 장례식장 앞을 미끄러졌다. 가까이에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고, 나는 그날 장례식장에 쳐들어와 내게 “자식 팔자가 부모를 잡아먹었다”고 힐난한 외삼촌의 멱살을 기어이 틀어쥐었던 세 살 어린 그 애에게 콜라 한 캔 사줄 수밖에 없었다. “너 근데 수능은 어쩌고.” 아, 빌어먹을. 어쩐지 저 새끼 교복 입고 왔더라. “어차피 공부할 시간도 없었는데 수능 친다고 인생이 뭐가 달라지겠어요.” 그 애는 이상하게 나하고 있으면 애교가 팍 죽었다. 버릇없는 놈. 나는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는데, 난들 그 애가 왜 수험을 포기했는지 모르지 않아서였다.

 

  “형도 저런 말 자꾸 참아주지 말아요. 돈 받고 하는 일도 아닌데, 정신적인 보상이라도 챙겨야지.”

  “틀린 말인가? 자식 팔자에 부모가 잡아먹혔지.” 스스로의 과거를 14년만큼 떨어져 내려다보는 행위는 기이하다. 고작 스물하고도 두 살 더 먹은 네가 뭘 안다고 담담한 척 굴고 있을까. “사람 새끼 아닌 걸 주워다 키워서 천벌 받은 걸지도 모르잖아.”

  “미련곰탱이 같기는. 그럼 우리 할머니는 애저녁에 돌아가셨게. 사람 아닌 거 주워다 키운 인간이 어디 형네 부모님뿐이래요?” 자조가 역병처럼 번진다. “진짜 짜증 나. 우린 인생 전반을 포기하고 열심히 하는데, 결국 듣는다는 소리가 저런 거라는 거요. 인류는 우리에게 보상하지 않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까지 해서 세상을 구해야 하는 건데요?”

 

저 어린 사도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영상을 통해 반추하던 나는 낡은 영상에 대고 무심히 대답한다. “선량함이 올바른 선택이니까.” 그러면 그 애는, “또 그 소리지.” 반박은 하지 않는다.

 

2.5

  마난난이 현현했다는 그 어르신은 나보다 서른이 많았다. 나는 그 노인이 그 시절에도 나이가 많았다고 기억했는데, 글쎄, 지금 보니 나이에 비해 늙었다는 인상을 주는 노인네는 아니었구나 싶다. 그가 장례식장을 찾았고, 별안간 나타난 외국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로 장례식장 분위기가 한층 더 얼어붙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가 나를 따로 보자고 했다. 장례식장 로비에 앉아 무슨 말인가 들었다는 사실만이 내게 선명하게 남아 있었는데 무의식 속에 묻어두었던 기억을 기계의 힘을 빌려 꺼내니, 그의 사나운 목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네게 사과하러 왔다.” 사과하러 왔다는 사람치고는 파리한 안색을 하고 꼿꼿하게 앉아, 목소리는 마치 호령하는 것처럼 들려서 불편했다. 나는 그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도를 대신해 사과하겠다는 말인 줄로만 알았다. “왜 그날 잠수 탔던 양반이 직접 안 오시고?” 그렇게 물어도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놈 사과는 그놈한테 들어, 내가 그놈 대리인으로 온 줄 알아?” 아아, 하여간 사도란 존재들은 하나 같이 사회성이 떨어진다.

 

  “원래는 내가 오기로 했던 걸 그 유약한 멍청이한테 좀 떠넘겼거든. 전화 들으니 이건 뭐, 내가 사과를 해둬야 문제가 깔끔해지겠단 추측이 들더구나.”

  “…아프신 거 같은데요. 지금도.”

  “난 현현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안 아팠던 날이 없어.” 노인은 혀를 찼다. “몸 아플 적마다 돌아버리게 짜증이 치밀어서 내가 스트레스로 죽는 게 빠를지, 통증으로 죽는 게 빠를지 모를 지경이다.”

  “안 오실 줄 알았습니다. 당신 능력이 많이 필요할 괴물이긴 했지만, 아일랜드에서 여기까지가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요. 당신이라고 그 새끼가 잠수 탈 줄 아셨던 건 아니잖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래도 좋았다. 누군가가 와서 내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길 원했던 것도 아니었고, 그저 이 모든 일이 당장 내일 끝나기를 바랐다. 고개를 조금 숙여두고, 시선으로 장례식장의 바닥 무늬를 하나하나 세어가면서, 혹은 장례식장에 쌓인 지긋지긋한 하얀 꽃잎을 장마다 세듯이, 아니, 지금 당장 전부 끝나면 좋겠다고 바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군데군데 잊어버렸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괜찮으니 귀국하실 때까지 당신 건강 챙기세요. 지금 12명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새로운 사도가 자랄 때까지 기다려줄 틈조차 아쉽습니다. 당신 아픈 거, 잠수 탄 놈이 겁 많은 거, 다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니까….”

 

  그러나 나보다 더 호랑이 같은 이 지독한 켈트 신은, 다리를 꼬고 앉아 아픈 기색 가득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그가 했던 말이 14년이 지난 지금에야 되살아났다. “그게 다 너랑 무슨 상관이냐?” 영상 속의 내가 영문 모를 얼굴을 하고 마주 쳐다보면, 노인은 좀 더 단호한 목소리로 강조했다. “내가 아픈 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고.” 이 작자는 신이구나. 정신적으로는 이미 완벽한 수준이다.

 

  “나이도 어린 게 어설프게 다 짊어지려고 들지 마, 건방진 놈. 나는 네게 용서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 마땅한 책망을 받으러 왔다.” 나이도 지긋하시던 분이 자세는 꼿꼿이 세우고 앉아서. “내가 판단을 잘못해서 인간이 둘 죽었다. 신이 되어 희생자의 자식에게 베풀 수 있는 마땅한 보상이 무엇인지는 생각해볼 필요도 없지.” 아픈 몸을 이끌고 먼 바다 몇 개를 건너 날아온, 차라리 허무할 만큼 책임감 강한 신적 존재.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해라. 네가 나를 때려야 속이 시원하겠다면 그렇게 하고, 험악한 말을 쏟고 싶다면 그렇게 해. 네가 아니라 ‘내’가 네 부모를 죽게 했다.

 

  말간 빛이 빚어내는 영상 속 나를 쳐다보다가 조금 놀라고야 만다. 아, 이건 잊어버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래, 당장 하고 싶은 건 우는 건가 보지? 어지간히 미련한 놈….”

 

  그래도 부모님 장례식에서 한 번은 울었구나. 이걸 알고 싶었다. 그랬다는 증거를 원했다. 그 사람들이 죽는 그 순간까지 내가 사람이었고, 그들이 사라진 세상이 도저히 슬펐으며, 그렇다는 사실이 나를 여기에 이르게 했다고.

 

  나는 그들이 물려준 세상을 잃고 싶지가 않아. 두 번 잃고 싶지는 않다. 도저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