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록 미워했고, (중략, 지워내기, 자격 미달, 삭제, 권리 없음) 앞으로도 그럴 거야.
1.
위성도시는 흠 없이 여전했다. 커다란 시장이 가까운 대로변은 번잡스럽고,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는 도로를 납작 기어 다녔다. 하늘 가득 석양이 들었다. 여기선 서울은 가까우나 바다는 멀었고, 일상은 가시적이고 비일상은 비가시적이었다. 골목을 파고들고 언덕을 올라가는 도환찬은 모두의 이목을 끌지만, 저무는 태양이 길게 늘여놓은 그의 기이한 형태의 그림자에는 그 어떤 시선이 닿지 않는다. 해가 짧은 계절이다. 노을은 서녘으로 후퇴하고, 별 한 점 없는 밤하늘은 해일처럼 금세 밀려들었다. 집 앞의 어둑한 골목에 가로등 불빛이 들었다. 그가 세 들어 사는 옥탑방은 2층 주택가가 이고 있었다.
녹슨 대문 앞에 오도카니 서서 고개를 들면, 흐릿한 연기가 시야에 잡혔다. 옥탑엔 불빛 한 점 없지만, 기다렸다는 것처럼, 보름달을 찢어 놓는 달무리 마냥.
2.
옥상으로 올라가면 아니나 다를까 담배 냄새가 났다. 환찬은 계단 끄트머리에 서서 지겹다는 얼굴을 한다. “이 개새끼가, 남의 집 앞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고 내가 200번은 말했다.” 옥상엔 불빛이 없으나 달빛은 밝고 도시 골목을 밝힌 가정집의 불빛들은 별빛을 삼켜가며 난간 아래에 도사렸다. 원하는 만큼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비켜줄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려는 것처럼 문 앞을 틀어막고 기대어 서 있던 남자는 비아냥거렸다. “아니, 세상에 몇 달 만에 만난 동생한테 한다는 소리 좀 봐. 형이 그러니까 친구가 나밖에 없는 거예요. …아니, 이제 나도 없구나?” 담배를 물면 얼굴 주변만 붉은빛이 돈다. 어둠이 물러간다. “나도 이제 형이 없고. 뭐, 전 형 없어도 친구 많지만.”
겨울이 끝물이었다. 바람엔 수분기가 없었다. “비꼬러 왔냐, 새끼야?” 그 사실이 낯설었다. 어쩐지, 눈앞의 남자와 둘이서 대화를 나눌 적이면 바람에선 물 냄새가 날 적이 많았다. 둘 다 바다가 지척인 도시에서 나고 자랐으니 별수가 있었을까. “아뇨.” 파도가 아닌 생활 소음이 신경을 거슬렀다. 골목 앞을 느릿느릿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나 자전거를 몰며 울리는 종소리.
불빛이 사그라든다. 불편한 정적 속에 환찬은 ‘용하람’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나이 가까운 사도의 얼굴을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멍청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는 어느 멸망하는 세계에서 만난 수많은 이들로부터 이 남자와 화해할 것을 종용받았다. 대뜸 돌아오자마자 얼굴을 마주할 줄 알았더라면 할 말을 정리하는 행위를 미루고 미루진 않았을 터다. 아니, 사실 화해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미루나 미루지 않으나 매한가지였겠지. 환찬은 우리에겐 할 말이 없다고 확신했다.
해는 동녘 하늘에서 떠오르는 것이고, 그는 이 땅의 인간을 지키겠다고 약속한 신격(神格)이다. 그와 달리 도환찬은 해가 저무는 바다에서 났다. 무슨 말을 더 나눌 수 있겠느냔 말이다.
“저 여기 오는 거 피셔 어르신한테 말 안 했어요.” 대체 왜? 환찬은 다만 눈살을 찌푸렸다. 핀리 어빈 피셔는 로마의 바쿠스다. 지금도 여전히 틈새 수선에 절절매고 있는 멍청한 여섯 명을 그나마 통솔하고 있을 어르신이니, 사도가 둘로 파가 갈린 지금 뜻이 같은 자들끼리 서로의 거취를 공유하는 건 기본일 터다. “미샤한테도 말 안 했고요.” 이 사태를 예언했을지도 모르는 프로메테우스에게조차도, 그래, 요컨대 아무에게도 말하고 오지 않았다는 의미다.
“얼씨구, 니들끼리도 쳐싸우고 있냐? 인간한테 쳐돌아버린 프로메테우스랑 한판 했건 피셔 노인이랑 한판 했건 이제 와 네가 우리집 온다고 내가 퍽이나 달래주겠다, 등신 같은 새끼.”
“아뇨. 그럴 새가 어디 있겠어요? 형이 놀고 자빠져서 틈새 수선하느라 저 한 이틀 못 잔 거 같은데. 댁 때문에 술도 못 마시고 친구들도 못 만나고, 와, 진짜 답지도 않게 영웅 노릇 제대로 하고 있다. 발전했다, 매지컬 드래곤 하람이.”
“농담 따먹기나 하자고 온 건 아닐 거 아냐, 불경한 무직자 새끼야.” 환찬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하여간 저 멍청한 낯짝만 보면 화가 치밀어서 말이 험악하게 나가기 일쑤다. “왜, 팔 하나 부러진 걸론 교훈이 안 생기든? 어딜 더 부러뜨려야 대가리가 좀 돌아가겠어? 말만 해, 시발, 온 김에 한 판 더 하든가.”
“고집불통도 정도껏 합시다, 좀. 쌍욕 말고 할 말을 좀 하자고요. 우리가 뭐 아직도 10대예요, 서로 욕이나 쳐박고 헤어지게? 시발, 진짜 깝깝한 인간.”
도시의 어둠이 눈에 익는다. 도환찬은 그 순간 더 무슨 말을 이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를 대체 몇 달이나 보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시간을 세진 않았고, 그럴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마지막으로 본 게 한강 근교였고, 물비린내가 지독하도록 비가 내렸으며 소음이 끔찍했다는 사실만을 기억했다. 그 몇 달 사이에 저 끓어오르는 다혈질이 나을 리는 없는 거였다. 하람은 감정이 욱하면 몸부터 나가기 일쑤였다. 장례식장에서 상주 가족의 멱살을 잡던 치기 어린 19살이 나이를 더 먹는다고 신사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불안정한 사도. 죽을 만큼 인간적이고,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 노는 걸 좋아하고 사람은 좋아하지만, 사는 게 너무 지겹다고 말했던 동방 청룡, 그러면서도 인간과 나눈 약속에 매여 있는 가엾은 신격. 도환찬이 알고 있는 그대로, 인간도 신도 아닌 채 엉망진창으로 꼬여 있는, 빌어먹게도 도환찬과 가장 닮은 인간상.
감정에 못 이겨 사람 멱살을 잡고도 울 것 같은 얼굴이나 하는, ‘끔찍한 나의 어린 시절….’
“…설명 좀 해줘요.” 무슨 험악한 비속어라도 쏟아낼 것처럼 무섭게 쳐다보다가도 겨우 내놓는다는 말이 그거다. 도환찬은 무심한 눈으로 자신의 과거를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 같은 이 가엾고 불쌍한 청룡을 쳐다보며 묻는다. “무슨 설명? 왜, 하면 바벨에 합류할 것도 아니면서.” 그가 이제 와 사람들을 저버릴 수가 있겠나, 대체 어느 누가 그걸 허락한단 말이냐.
“말하면 듣기는 할 거고?”
“들어도 이해 못 하겠죠.”
“그럼 떠들어봐야 시간 낭비잖아.”
“정리는 될 수가 있잖아요.”
“무슨 정리?”
“남은 될 수가 있겠지.”
“…….”
“차라리 남이 되자고요. 지독하게 타인이 되자고요, 우리. 당신 때문에 매사가 짜증 나 죽겠으니까 정리란 걸 좀 하자고.”
한때 서로를 가장 잘 안다고 착각했던 시절이 있다. 거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이 되었던 순간이 많다. 서로의 불행한 처지를 쳐다보며 치졸하게 안도하고, 내가 겪었으나 아침이 오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는 비일상이 실존함을 확인하고, 우리가 미친 게 아니라 세상이 미친 거라며 작당이나 할 수 있어서.
하나만 고해하자, 환찬은 하람이 행복하길 바란 적이 별로 없다. 그건 하람도 마찬가지일 테고. 서로가 끝까지 죽도록 불행해서, 내가 좀 더 행복한 사람처럼 느껴지길 바랐던 적은 많아도.
사도가 아니었더라면 죽는 한이 있어도 친해지지 않았을 유형의 인간이다.
“설명하고, 변명하고, 그렇게 남이 되어서 더는 슬프고 싶지 않으니까….”
“…미련한 새끼.” 반쯤 당겨 안아도, 알 수 있는 건 자신이 상대를 열성을 다하여 싫어했다는 사실뿐이다. “꼭 정리 좀 하려고 치면 쳐울고 지랄이지. 일부러 그러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을 사랑했고, (대체 무슨 자격으로?)
“듣고 꼭 나한테 질려서 나가떨어져라, 새끼야. 죽을 땐 나한테 죽고, 내가 너 죽는 방법은 수백 가지 연구해주마. 죽는 그 순간까지 불행해. 지독하게, 끝까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해라, 난 네가 불행할 때 행복하니까. 알아들었냐?”
우리가 사도인 이상, 인류는 우리의 목줄을 쥐고 있다.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다. 살고 싶은 인간들이 그를 놓아주지 않고, 한편 죽고 싶은 인간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 한 영원토록.
“오늘 이후로 다신 보지 말자, 세상이 멸망하는 그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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