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ror No.9 (19) 썸네일형 리스트형 Mirror No.9 1-1. Snowwhite(完) 와이엇 윈프리드에게는 웬만하면 약점을 잡혀서 좋을 게 없다는 말이 극단에 꽤 오랫동안 떠다녔다. 말을 만든 게 누구인진 몰라도 로즈 헌터는 제작년 말부터 그 말이 신빙성이 있음을 체감하고 있었다. 딱 한 번 무대에서 선배의 드레스 자락을 밟고 넘어졌을 뿐인데 그는 그 사소한 실수를 지금까지 들먹이며 놀려대기 바빴다. 그 이후 로즈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그의 앞에선 절대 실수하는 일 없으리라 몇 날 며칠을 다짐했더랬다. 그러나 그러한 결심은 하기는 쉽고 이루기는 어렵다. 아무리 처음이었다고는 해도 호언장담을 했는데, 예상과 다른 곳에 떨어져버리다니 이는 또 몇 년 와이엇이 그녀를 놀리며 괴롭힐 만한 사안이었다. 공식 대입은 꽤 잘 했지만 암산이 틀렸다. 물론 다행히 거하게 엇나가지는 않았다. 창은 깨졌고 .. Mirror No.9 1-1. Snowwhite(4) 그녀는 연구가 완성된 이후의 자신을 여러 번 상상했다. 리히트 대학의 시계탑에서 내려다보는 프림데 시는 그녀의 고향에 비해 바라보는 경치가 좋진 못 했다. 가엾은 땅이다. 연민은 쉽게 차올랐다. 그 땅은 강수량이 줄어든지 너무도 오래되었다. 명석하다는 그리폰들이 이루지 못 할 꿈을 꿔야 할 만큼 오래되었다. 그녀는 시계탑 내부와 황야를 나누는 유리창을 새하얀 손끝으로 한 번 쓸었다. 구해야 할 땅은 저 너머에 있고 그 땅을 구할 지식은 그녀의 머릿속에 있었다. 남작은 리스크는 커도 좋다고 했다. 그 땅의 식수난을 해결할 수 있는 마법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갈아 넣을 수 있다고. 기후를 지배하는 마법이 신의 영역이라면 그 신의 영역에 닿을 때까지 지원해줄 의향이 있다는 의사도 밝혀왔다. 그 말을 믿고 연구를.. Mirror No.9 1-1. Snowwhite(3) 숙소는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하루를 쉰만큼 점검해야 할 사항이 많았다. A는 주 관객층이 어린아이들인 인형극 팀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그의 팀은 하루 더 유예를 받았기 때문에 시간이 퍽 남았지만 오늘부터 공연 재개를 해야 하는 연극 팀은 사정이 달랐다. 공연 리허설부터 조명 체크, 동선 체크, 무대 장치 점검까지 저녁 공연을 위해 반나절은 꼬박 투자해야 하는 것이 이 바닥이었다. A는 오늘까지 쉬는 날이라는 사실도 무색하게 숙소 룸메이트들의 등쌀에 못 이겨 아침 일찍 눈을 떠야 했다. 그들의 아침 식사며 옷매무새를 봐주다 보니 얼굴 구석구석 묻어있던 잠이 홀딱 달아나고 말았다. 문가에서 배웅까지 해주고 나니 그 때에서야 숙소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A는 숙소 안을 제 어깨 너머로 한 번 돌아다보.. Mirror No.9 1-1. Snowwhite(2) 동행한 지 몇 시간 만에 알게 된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 우선 A의 고향 슈니플로케는 악명만 높았지 제대로 알려진 바는 하나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레오폴트는 슈니플로케의 지형, 관광 포인트 무엇 하나 숙지하고 온 게 없어 보였다. A가 무엇을 추천하고 보여주든 그는 난생처음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굴었다. 체험에도 적극적이었다. A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세상이 뒤집어져도 슈니플로케는 A의 고향이었다. 슈니플로케를 고향으로 둔 사람들이 그 땅을 욕하는 것과 타지 사람이 그 땅을 욕하는 것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외지인이 슈니플로케를 알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A의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차 한 잔 정도는 제가 살게요, 하는 건방진 소리가 절로 나왔다. "상상했던 것.. Mirror No.9 1-1. Snowwhite 영원히 타오를 것이라고 약속했던 불길은 5년 만에 잡혔다. A는 역한 냄새와 산더미 같은 재만 간신히 남기고 불씨까지 사그라진 화로를 생각했다.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슬슬 팔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구름보다 조금 낮은 위치를 떠다니는 칼바람이 한 줄기 그의 머리칼을 쓸었다. 평생 올라올 일이 없을 거라 믿었던 탑 위에서,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무거운 '이종족'을 끌어올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우습기까지 했다. 불길이 타오르지 않는 슈니플로케가 이토록 추웠다는 사실을 그는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오랜만에 달까지 차게 얼었다. 저 산 너머에서 밀려오는 먹구름도 단단히 얼어붙은 눈구름일 것이 분명했다. 눈꽃의 도시는 이제야 5년간의 짧은 봄을 끝내고 다시 본연의 겨울.. Mirror No.9 Rebellion 1.Traveler(完) 제시에게 마지막 인사 남기기. 자베이온을 떠나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새로 정착하기.―어디가 좋을까? 연안의 섬도 괜찮을 테고, 아. 그래. 북부도 좋겠다. 빙하가 군림하고 눈이 내린다는 최북단 슈니플로케.― 잠을 많이 자기. 떠나는 길에 만난 많은 사람과 인사하기. 유적을 돌아보고,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기. 책 읽기. 사랑하기. 서로 미워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는 가족을 만들기. 사이먼 버트럼이라는 이름을 자베이온의 바닷가에 묻어두고, 칼 하멜로서 죄책감 없는 새 삶을…. * * * 교착이 오래 이어졌고, 사이먼 버트럼은 햇살이 방울진 낡은 레이피어의 끝을 내려다보았다. 끝내 그들은 조금도 타협하지 못했다. 이름도 모를 소년은 자신에게 지옥에 서 있으라 명령하고, 이 생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 Mirror No.9 Rebellion 1.Traveler(13) “팔려 가는 아이들에게 약하다고 한들, 이제 와선 어쩔 수도 없어. 너도 이제 어디로도 못 가게 되었으니까.” 문은 맞물린 채 사이먼 버트럼의 어깨너머에 서 있었다. 바깥에서 잠겼을 테고, 굳이 문고리를 비틀어 열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러기 위해 마부는 사이먼이 건물 안에 들어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을 터다. 어쩌면 그는 이 앞에서 사이먼이 시간을 건너갔다는 사실이 확인될 때까지 버티고 서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 버티고 서 있을 거다. 레슬리 라몬트는 마치 갈 것인지 가지 않을 것인지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처럼 굴었으나 사실 사이먼이 손에 쥔 건 선택지가 아니라 외길로 향하는 표 한 장이었다. 사실, 그가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고 해도 오늘 정오쯤엔 사이먼은 이 살풍경한 공간 안으로 내던져졌을.. Mirror No.9 Rebellion 1.Traveler(12) 마차의 전진 속도는 느렸으나, 인파는 마차의 바퀴만을 가로막지 않았다. 사람들의 사이사이를 헤집으며 마차의 그림자를 쫓던 제임스는 슬슬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차의 바퀴는 이미 광장 끝에서 좀 더 한산한 골목으로 굴러가고 있었고, 인파가 드문 길목에 들어서면 그걸로 끝이었다. 아무렴, 속도를 높이기 시작하면 사람보단 단연 말이 빨랐다. 그 네 발 달린 동물이 모든 물류와 이동의 총 책임자의 자리에 올라 문명의 핵심이 된 게 우연의 산물은 아니었다. 저것을 따라잡을 만한 수단이 필요하다. 사이먼 버트럼이 과거로 떠나버리기 전에 그 애의 발목을 잡아챌 수 있을 만큼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수단이.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마차가 기어이 진입해버린 널찍한 골목으로 들어서자, 야속하리만큼 청량한 하늘이 바다와.. Mirror No.9 Rebellion 1.Traveler(11) 그들은 계획과 달리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야 블라우 도시 국경을 넘어갈 수 있었다. 그날따라 도시 국경 관문을 통과하려는 이들의 행렬이 길었던 탓이다. 물류업자는 물론이고 수도에서 왔다는 행상들, 사람들, 여행객들이 몰려 도시 국경 관문부터 북새통이었다. 어디 축제라도 열린대? 어처구니가 없어진 제임스가 투덜거리자, 에디스가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그럴 때가 되었네요. 5월이잖아요.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앉아 신문의 페이지를 넘기는 에디스 해터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블라우의 만선제가 이맘때였던 것 같은데.” 시장도 열리겠네. 에디스에게 희소식은 아니었다. * * * 마차의 차창 너머로 흘러가는 블라우 중앙 광장의 광경은 시장통이 따로 없었다. 듣자 하니 오후부터 비상설 시장이 열린다고 했다. .. Mirror No.9 Rebellion 1.Traveler(10) 나는 내가 평생 바다를 사랑할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로부터 받은 은혜로서 일어선 자들의 피를 물려받았으므로, 내 혈관에는 피와 더불어 바다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운명도 함께 뒤섞여 흐르는 줄로만 알았어. 이제 나이 마흔이 가까워져서야 깨달았다. 우리의 창조신은 어떤 규칙을 창조했을 뿐이라고. 그들은 일일이 피조물의 운명을 들여다보며 조율하지 않는다. 그저 선의와도 악의와도 거리가 먼 어떤 이치들을 만들기만 하고 이 땅에 내버려 두었다. 그러니 운명은 인간의 서러운 착각이다. 우리는 단단히 고정된 거라면 무엇이든 허락받지 못했다. 마음은 요동치고 이성에는 금이 간다. 창조신과 달리 내던져진 이치에는 아무 감정이 없고, 우리에게 다정할 의무도 없다. 그러한 이치들이 ‘우연히’ ..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