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의 전진 속도는 느렸으나, 인파는 마차의 바퀴만을 가로막지 않았다. 사람들의 사이사이를 헤집으며 마차의 그림자를 쫓던 제임스는 슬슬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차의 바퀴는 이미 광장 끝에서 좀 더 한산한 골목으로 굴러가고 있었고, 인파가 드문 길목에 들어서면 그걸로 끝이었다. 아무렴, 속도를 높이기 시작하면 사람보단 단연 말이 빨랐다. 그 네 발 달린 동물이 모든 물류와 이동의 총 책임자의 자리에 올라 문명의 핵심이 된 게 우연의 산물은 아니었다. 저것을 따라잡을 만한 수단이 필요하다. 사이먼 버트럼이 과거로 떠나버리기 전에 그 애의 발목을 잡아챌 수 있을 만큼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수단이.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마차가 기어이 진입해버린 널찍한 골목으로 들어서자, 야속하리만큼 청량한 하늘이 바다와 맞물려 저 내리막 아래에 누워 있었다. 바닷바람이 골목을 휘몰았고, 제임스의 길게 땋은 검은 머리칼이 바람과 몸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아, 그래. 수단만으로는 안 된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들의 행선지를 알아내어 먼저 앞지르는 것이 더 확실할지도 몰랐다. 이러는 동안에도 그와 마차 사이의 거리는 착실히 멀어졌고, 마차는 어느새 시야에서 거의 사라질 듯 아슬아슬하게 길과 바다, 하늘이 맞닿는 선 위를 내달리고 있었다.
자신이 레슬리 라몬트라면 이 신성모독적인 마법장치를 어디에 숨겨두었을까? 대체 어디에 숨겨두었기에 아무도 템페온의 배후에 라몬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나는 나의 소중한 어떤 것들을, 나탈리 호의 어디에 숨겨두었더라?
창고다. 나의 영역이며,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복잡하고 미로 같은 나탈리 호의 창고. 가장 사적인 영토. 출입이 드물고, 혹은 출입을 통제할 수 있는 영역. 이를테면 사유지. 감히 열어보아서는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
문득, 그와 반대로 저 내리막 아래에서 터덜터덜 걸어 올라오는 남자가 하나 눈에 띄었다. 제임스의 어깨 위로 낯선 목소리가 스쳤다.
“벌써 북새통이구만. 역시 이런 날엔 일 끝났으면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게 차라리 낫다니까…. 새벽에 부지런히 물건 옮겨놓길 잘했네.”
발휘할 수 있는 최대치의 반사신경을 발휘하여 발화자의 팔목을 우악스럽게 잡아채었다. 상대의 몸이 불현듯 우뚝 멈추어 서는 것이 손아귀 가득 느껴졌다. 제임스에게 붙잡혀 가던 걸음을 멈추어야 했던 남자는 주름진 얼굴 한가득 불만을 담아 그를 돌아보았다가, 제임스와 눈이 마주치자 미간 사이가 좁아졌다. 입술 한 번 달싹이지 않아도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것 같았다. 뭐야? 사람 방해하지 말고 꺼져. 그러나 제임스는 무언의 협박은 모르는 척했다.
“…라몬트 가문의 선착장까지 가고 싶은데. 최대한 빨리.”
“…뭐?”
영문도 모를 소릴 들은 사람답게, 남자의 목소리는 한 톤 더 높게 튀었다.
“당신 물류업자지? 물건을 옮긴다고 했잖아. 오늘은 물건 말고 사람 하나 옮겨줘. 대가는 치를 테니까. 방금 말했듯이 최대한 빨리, 당신이 아는 모든 지리 정보를 동원해서.”
“…웃기는 꼬마일세. 내가 얼마를 부를 줄 알고?”
“얼마든 상관없어. 해터 가문에서 지불할 테니까.”
이럴 때야말로 에디스 해터에게 복수를 할 때다.
“웬 꼬마 한 번 태워주고 팔자 한번 고쳐보시라고. 그놈들보다 우리가 더 먼저 도착하면 몇 푼이든 더 얹어줄 테니.”
* * *
칼 하멜은 숲을 빠져나오기 위해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고, 그만큼 이종족은 숲을 침범해 들어온 무방비 상태의 인간에게 녹록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사막과 숲 중 선택하라면 숲이 차라리 나았다. 사막을 건너 오즈로 넘어가는 것은, 말 그대로 미친 짓이었다. 오즈 난민 중 사막을 넘는 시도를 했던 자가 한 사람도 없는 건 아니었으나 아무도 그들이 오즈에 도달했다고 믿지 않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숲과 오즈 사이를 가로지르는 사막은 숲보다도 더 광활했고, 사막을 오롯이 횡단하는 데만도 한 달은 넘게 걸렸다. 물 한 모금 구하기 어려운 극한의 사막은 그곳에 무엇이 사는지, 어떤 위험이 있는지조차 알려진 바가 하나도 없었다. 다만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불모의 땅이라는 정보만이 유명했다. 쉽게 말해, 고르자면 비록 이종족이라는 커다란 변수가 도사리고 있기는 했으나 익숙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고 시내도 흐르는 숲이 브릿 사막보단 덜 위험했다.
칼 하멜은 메피스토텔레스가 빠져나간 우물가 앞에 앉아 만 하루쯤 고개를 푹, 두 무릎에 박고 골몰했다. 두 가지 길을 검토했다. 브릿 사막을 남하하여 오즈로 도망친다. 숲으로 북상하여 지금이라도 메피스토의 만행을 막기 위해 발버둥 쳐본다. 북이냐, 남이냐. 책임질 것이냐, 도망칠 것이냐. 만일 브릿 사막이 숲보다 위험 요소가 많지 않았더라면, 하멜은 어쩌면 남하를 선택했을지도 몰랐다. 도착만 한다면 오즈는 안전했다. 레슬리 라몬트의 영향력이 닿기에는 너무나 먼 이국이었고, 머지않은 미래에 태어날 ‘사이먼 버트럼’과 마주쳐 존재가 흔들릴 일도 없을 테니까. 그러나 그는 사막을 버틸 자신이 없었고, 죽고 싶은 마음은 더군다나 없었다. 이건 어쩌면 선택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이렇게까지 해서,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덜컥 눈물이 솟고 온몸이 떨려올 만큼 두려워진 건 칼 하멜이 특별히 비겁하거나 겁이 많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살고 싶어서 시간을 건넜다. 인간답게 살고 싶어서. 제시 버트럼을 사랑하고 싶어서.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싶어서.
그리하여 칼 하멜, ‘사이먼 버트럼’은 북상을 택했다. 조금이라도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방향으로 길을 잡아 걸었고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한 달여에 걸쳐 숲을 빠져나와 황야의 메마른 밤하늘에 박힌, 당장이라도 지상에 쏟아질 듯한 보름달 앞에 서서 사이먼은 깨닫는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몰라. 황야엔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 나탈리 호는 이미 사상 최악의 해적에게 넘어갔을지도 몰라.
그는 다음 날, 도시 국경을 통과해서야 시빌 다이애나 라몬트의 부고를 들었다. 벌써 2주도 넘은 일이라고 했다.
* * *
라몬트 가문의 마차는 선착장 한구석에 마련된 자그마한 벽돌집 앞에서 멈추었다.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오고 가는 길목에서 한참 떨어진 외진 구석이었다. 초여름 햇살 속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흰 꽃을 나뭇가지 가득 달고 있는 아몬드나무의 존재감이 너무 강했던 탓에 나무의 뒤편에 가려져 있는 2층짜리 좁은 벽돌 건물의 존재감은 흐트러지고 뭉개져 좀처럼 기억에 남지 않았다. 마차에 내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건물의 문을 똑바로 마주 보고 선 사이먼은 막연히, 어쩐지 템페온이라는 시간이동장치와 퍽 어울리는 형태의 건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아마도 그렇게 사라졌을 것이다. 템페온이 빚 대신 사람을 잡아가 환금한다는 강렬하고 잔혹한 소문이 모두의 이목을 잡아끈다. 그러나 그뿐이다. 가십이다. 실제로 도시의 빈민층을 구성하고 있던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 구체적인 향방에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의 비극은 카타르시스를 주지 못하니까. 고리대금업자라는 자산가의 악행은 흥미로우나 그가 잡아갔던 모든 가난한 자들은 악행의 희생양이라는 대명사 아래에 뭉개져 사라질 뿐, 그들 개인의 삶은 아무런 주목을 사지 못한다. 사람들은 여기서 이 벽돌집처럼 사라졌을 것이다. 사이먼도 그렇게 될 터다.
그를 그곳까지 태워준 여자는 문을 열어주지도 않았고, 뭘 어떻게 하라고 훈수를 두지도 않았다. 마차에 기대어 서서 사이먼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는 라몬트 가문에서 일하는 마부 중 하나였고, 그저 사이먼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깥에서 문을 잠글 것만을 지시받았다. 사이먼은 자신보다 키가 머리 하나만큼은 더 큰 마부를 돌아보았고, 흘러내린 망토를 단단히 여몄다. 문고리를 꾹 쥐며 설명받았던 사항을 되짚었다.
사이먼은 타고난 마력코어이기 때문에 템페온이라는 이름이 붙은 마법장치를 만지기만 하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다만 시대는 특정할 수 없다. 도박이다. 어쩌면 운 나쁘게도 사람이 살 수도 없을 만큼 환경이 나빴던 태초로 내던져질지도 몰랐고, 또 어쩌면 바로 몇 년 전의 과거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템페온이 그만한 사람을 잡아가고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중대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알맞은 시대에 떨어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마력코어의 수명으로도 버틸 수 없을 만큼 과거에 떨어진 이들도 많았고, 그들 중에는 과거로 돌아가 계약을 저버리고 도망쳐버린 경우도 많았다. 한 번에 원하는 시간대에 떨어질 수 있다면야 라몬트가 직접 움직여도 좋았을 테지만, 이래서야 계약을 저버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수많은 탐사자를 무작위로 태워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성공할 때까지. 성공한들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인지, 그조차도 미지수였음에도 오로지 이사야 에델슈타인과 시빌 라몬트의 죽음이 야기한 죄책감을 벗고 살기 위해서.
과연 이건 끝날 수 있는 이야기일까? 사이먼은 문고리를 천천히 비틀었다. 나와 레슬리 라몬트는 어쩌면 영원히 이러한 일을 반복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일 신이 정한 운명이라는 게 실존한다면, 모든 건 어차피 돌이킬 수 없는 헛짓일지도 모른다. 시간이동장치가 아니라, 시간을 고이게 만드는 장치일지도 몰라. 사이먼은 태어나고, 일련의 사건을 거쳐 과거로 돌아간다. 신이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빌 라몬트는 왜 죽고, 레슬리 라몬트는 왜 미쳤는가? 사이먼 버트럼을 과거로 돌려보내기 위함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빙글빙글 반복되는 것이다. 과거로 간 사이먼은 실패하고, 시빌은 죽고, 레슬리는 망가진다.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레슬리 라몬트는 사이먼 버트럼을 다시 찾아내어 또 과거로 돌려보낸다. 그 후 사이먼은 실패하고, 시빌은 죽고, 레슬리 라몬트는….
벽돌집의 문은 안으로 열렸다. 공간은 널찍하기만 하고, 생활에 꼭 필요한 가구라곤 하나도 없었다. 누군가가 사이먼의 등을 살짝 밀었다. 아마도 그를 그 집 앞에 데려다놓은 마부의 손길인 듯했다. 문이 잠기고, 창문으로 드는 햇빛 속에 점점이 부유하는 먼지가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초여름 햇빛에 바삭바삭하게 마른 공기가 폐부로 들어왔다.
괘종시계의 초침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 벽돌집과 어울리는 잿빛의 괘종시계가. 사이먼은 망토의 후드를 벗고, 눈앞의 광경을 명확히 받아들이기 위해 뻑뻑한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이 뫼비우스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최후까지 움직였던 변수는 괘종시계 앞에 앉아 있었다.
“…넌 정말, 의미 없는 발버둥을 즐기는구나.”
사이먼으로서는 이름도 모를 소년이 대답했다.
“뭐 어쩌겠냐? 난 팔려 가는 애들한테 약해. 그게 얼마나 개 같은 일인지 너무 잘 알거든.”
소년, 제임스 윈프리드의 목에 걸린 붉은 결정 위로 빛이 한 줄기 미끄러졌다.
* * *
(전략)
…그러니까, 존경하는 웬디 달링 씨.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은 이겁니다. 만일, 제가 그 아이를 이용해 여기저기 뿌려두었던 모든 변수가 성공적으로 맞아떨어져서 사이먼이 과거로 가지 않게 된다면 시빌 라몬트는 어떻게 되며 헤르만 아델하이트의 운명은 어떻게 변하나요? 지금, 저 바다를 호령하고 있는 나탈리 호는 어디로 사라지며 사상 최악의 해적이라는 그들의 삶은 어떤 궤도로 수정되겠습니까? 사이먼은 자베이온으로 돌아오겠습니까? 돌아오면 어떻게 되나요? 제시에게 오빠를 돌려주고 나면, 남은 칼 하멜은 사라지겠습니까? 죽어버리나요? 내게 주어진 180년의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불시에 숨이 끊어지겠습니까?
왜 신께서는 저라는 변수를, 칼 하멜을 미리 벌하여 삭제하지 않으셨을까요. 차라리 천벌을 내려달라고 빌고 싶은 심정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나 감히 당신의 권능을 침해하였으니 벌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 한 번의 궤도 수정을 허락하소서.
가여운 두 사람에게 가족을 돌려주소서. 그 모든 대가는 저, 칼 하멜이 치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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