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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ror No.9/Mirror No.9 Rebellion

Mirror No.9 Rebellion 1.Traveler(13)

 

  “팔려 가는 아이들에게 약하다고 한들, 이제 와선 어쩔 수도 없어. 너도 이제 어디로도 못 가게 되었으니까.”

 

  문은 맞물린 채 사이먼 버트럼의 어깨너머에 서 있었다. 바깥에서 잠겼을 테고, 굳이 문고리를 비틀어 열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러기 위해 마부는 사이먼이 건물 안에 들어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을 터다. 어쩌면 그는 이 앞에서 사이먼이 시간을 건너갔다는 사실이 확인될 때까지 버티고 서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 버티고 서 있을 거다. 레슬리 라몬트는 마치 갈 것인지 가지 않을 것인지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처럼 굴었으나 사실 사이먼이 손에 쥔 건 선택지가 아니라 외길로 향하는 표 한 장이었다. 사실, 그가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고 해도 오늘 정오쯤엔 사이먼은 이 살풍경한 공간 안으로 내던져졌을 것이다.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는 게 갈지, 가지 않을지 그 여부를 결정할 시간을 주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유언을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는 의미였으리라. 현실을 포기하고 미련을 정리할 시간을. 평생 돈을 주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성장한 소년은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고, 기민하게 마음을 정리했다.

 

  그리하여 템페온 앞에 섰다. 그들은 사이먼의 퇴로를 끊었고, 이 낭떠러지 앞에 뜻밖의 희생양이 하나 더 섰다. 검은 머리칼 사이, 바다의 물기를 머금어 눅눅하기까지 한 햇살 속에서 또렷이 빛나는 선명한 녹색 눈동자가 템페온은 등진 채 사이먼을 똑바로 마주하고 서 있었다. 우스운 일이다. 이름조차 모르는 그들이건만 공감을 논한다. 칼을 차고도 똑바로 서 있었다. 험악한 말투를 쓰면서도 정론을 입에 올린다.

 

  사이먼은 비스듬하게 문가에 기대어 선 채, 제 두 팔을 꿰어 팔짱을 끼고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선고에 가까웠다. 이래봤자 아무 소용 없고, 너도 여기에 갇혔노라고. 사이먼과 마주한 제임스 윈프리드는 칼자루에 손끝을 얹어두고 사이먼을 한참 쳐다보았다.

 

  “나 혼자 움직이는 것도 아니니까 어떻게든 돼. 시간만 끌면 에디스 해터가 저 문 박차고 들어올 거야.”

  “에디스 해터?”

  “너 잡혀가던 날에 너희 집 앞에 왔던 여자 있잖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새하얀 여자.”

  “해터 가문의 주인이었구나. 왜 같이 안 왔어?”

  “난 널 잡고, 그 사람은 레슬리 라몬트를 잡아두러 갔거든.”

  “바보 같은 짓을 했네.”

  “왜 바보 같아?”

  “그 사람을 잡든 말든, 소문 속의 해터가 그 사람을 정부에 넘겨 처벌받게 할 리가 없으니까.”

 

  사이먼의 목소리는 호흡에 달라붙어 있었고,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괘종시계의 초침 소리에도 쉽게 먹힐 것만 같았다. 후드 망토 아래에 드러난 연갈색 머리칼, 제임스의 두 눈보다 아래로 떨어트린 연꽃빛의 눈동자는 사이먼 버트럼이 금방이라도 이 땅에서 녹아 사라질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 점이 칼 하멜을 연상하게끔 했다. 어째서 한눈에 그들의 연결고리를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들 사이에 묵직한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고 해도, 자라면서 어렸던 얼굴이 사라지고 몰랐던 생김새가 드러났다고 하더라도 눈빛과 언행이 빚어내는 분위기만큼은 숨길 수 없었을진대.

 

  제임스 윈프리드는 에디스 해터가 라몬트를 정부에 넘기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에디스 해터는 여왕의 번견이 아니었다. 개를 자처할 생각도 없고,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영웅의 길을 밟을 결기는 더군다나 없었다.

 

  그의 발길을 움직이는 건 미스터리다. 이 지루하고 단조로운 세상을 살아내기 위한, 에디스 해터만의 살기 위한 투쟁이다. 그 과정에 정의와 윤리는 거추장스럽기만 했고, 미스터리를 권선징악으로 끝맺는 데에는 더군다나 관심이 없었다.

 

  그런 사람인 것을 요 며칠, 제임스 또한 뼈저리게 느낀 바였다. 어쩌면 템페온은 더 유지될지도 모른다. 이 베일이 걷히면, 사람들이 사라지건 말건 이 사건은 에디스를 살게 하는 미스터리가 아니게 될 테니까.

 

  “그래도 네 빚 하나 정도는 탕감해줄지도 모르지.”

 

  제임스가 약속할 수 있는 건, 그런 막연함뿐이었다.

 

  “그런 불안한 약속은 필요 없어.”

 

  날숨에 간신히 달라붙어 새어 나오던 사이먼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돌아가자고 말할 거면 더 믿음직한 얘길 들고 왔어야지. 돌아가면 최소한 빚은 사라질 거라거나, 저 기괴한 괘종시계가 가동을 멈출 거라는 것. 둘 중 하나는 들고 왔어야 해. …아니면 뭐야, 너 설마 나한테 희망이라곤 한 조각도 없는 생지옥으로 걸어 돌아가라는 소릴 하러 온 거야?”

  “넌 그래도 널 기다리는 가족이 있잖아. 돌아가면 어떻게든….”

  “가난 앞에 가족이 있어?”

 

  괘종시계의 분침이 한 칸 움직였다. 사이먼이 열기를 머금은 소리로 내던진 한 마디는 대화의 흐름을 말라붙게 했다. 끔찍하리만큼 익숙한 이야기다. 주변으로부터 많이 들었고 또 자신 또한 친구들에게 자주 논했던 불신이었다. 사랑은 그 어떤 종류이든 여유의 산물이자 사치야. 절박한 사람에겐 사랑이 없어.

 

  “우린 서로에게 짐이야. 어머니는 제시를 가졌을 때 저주라도 받은 표정이었고, 난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는 게 죽을 만큼 싫었어. 먹을 입이 늘어나니까.”

  “…사이먼.”

  “가족이라고 겉으로 말만 안 하지 서로를 성가시게 생각해. 우린 서로를 미워하면서 살아. 저것들이 내 인생에서 없어지면 좋겠다고, 혈혈단신이면 차라리 내 몸만 건사하면 되니까 좀 덜 숨 막히겠다고,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한다고.”

 

  이런 건 사는 게 아니야. 사이먼의 후드가 뒤로 넘어가고, 앳된 얼굴에 드리우던 그림자 또한 햇살을 받아 흐트러졌다. 고개를 들고 제임스를 똑바로 노려보는 듯하던 두 눈에 체념과 분노가 섞인 복잡한 눈빛이 배어 있었다. 그는 한 번 더 발음 하나하나 꾹꾹 눌러 강조했다. 연명(延命)하는 건 사는 게 아니라고. 말 그대로 죽을 수는 없기에 목숨줄을 연장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제임스는 아연한 표정으로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사이먼 버트럼을 생각하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제시를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한편, 뇌리를 스치는 얼굴은 칼 하멜이었다. 제시 버트럼의 최대 아군이자, 끔찍한 가족의 곁으로 돌아온 자. 서로를 미워하고 탓해야만 자아를 간신히 유지할 수 있는 자베이온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와서는 사이먼 버트럼이 과거로 돌아가는 연쇄를 끊기 위해 암약했던 또 하나의 사이먼 버트럼.

 

  “…그래도 사랑하잖아. 너희 가족을.”

 

  사이먼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표정이 떠올랐고, 제임스는 그 얼굴을 보고서야 그가 우는 법조차 배우지 못하고 성장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대로 거기서 살다간 내가 제시를 해칠 것 같아.”

 

  눈두덩은 뜨거웠으나 끝내 눈물이 떨어지진 않았다.

 

  “내일 먹을 게 막막해지면, 자는 제시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해. 쟤라도 없으면 입이라도 하나 줄겠지. 제시에게도 사는 것보단 죽는 편이 좋지 않을까? 저 조그마한 몸으로 매일 먹을 걸 걱정해야 한다는 건 얼마나 비참할까. 난 저 나이 때 어땠더라? 아, 그때 죽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언젠가 했던 것도 같아. 그런 식으로 제시를 해치는 일을 정당화하다가 덜컥 그런 내가 무서워져서,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어.”

 

  과거든 미래든 어디라도 좋았다. 사실 꼭 시간을 건너지 않아도 괜찮았다. 도망치고 싶다. 이 모든 책임과 의무로부터, 사랑스러운 제시를 희생양 삼아서라도 살고 싶어 하는, 지독하게 이기적인 자신으로부터.

 

  “날 그냥 도망치게 해줄 순 없는 거야?”

 

  제임스는 사이먼의 앞에 나타난 방주가 템페온이었던 것이, 자신의 앞에 나타난 마지막 세계가 나탈리 호였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옥 같은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으니 알지도 못하는 배에 오른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또 다른 지옥이다. 어리석은 망상이다. 인간은 언제나 현재라는 새장 속에서 산다. 흘러가는 과거를 바꿀 수도, 현재로부터 도망칠 재간도 없다.

 

  방주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숨 쉬는 그 순간이 현재인 이상,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지옥 밑바닥을 기어 헤매야 한다.

 

  “…칼 하멜에게 물어보고 올걸 그랬어. 여기에 무슨 생각으로 돌아왔냐고.”

 

  칼을 뽑아 들자 가는 날 위로 나른한 빛이 미끄러졌다. 모든 일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졌다. 허공을 가르는 칼끝은 소리 한 번 내지 않았음에도 눈 한 번 깜빡하는 짧은 찰나에 사이먼 버트럼의 목덜미 앞에서 멈춰 섰고, 칼자루를 쥔 제임스 윈프리드는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네 의견 같은 건 알 바 아니야. 난 네가 템페온 같은 마법장치에 닿게 할 생각 없어. 네가 뭐라든 널 그 집에 데려다 놓을 거고, 에디스 해터가 올 때까지 시간을 끌겠어.”

 

  난 너만큼은 나탈리 호에 오르지 않았으면 좋겠거든. 후회해도 내릴 수 없는 배에 오르지 마. 죽고 싶지 않으면 움직이지 말고 여기 있어. 내가 허락할 때까지.

 

* * *

 

  레슬리는 자신의 앞에서 이사야와 시빌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자를 오랜만에 목도하였다. 모든 이가 그의 앞에서만큼은 감히 그런 단어를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것처럼 굴었다. 죽은 자는 쉽게 금기가 되고, 사람들이 그들에게 바치던 연민은 한 달도 못 되어 사그라들었다. 모두가 산 사람이 중요하다고들 했다. 죽어버린 시빌과 이사야보다 레슬리의 안위가 중요하다고. 아무도 레슬리를 함부로 찾아오지 않았고, 찾아오더라도 그저 ‘그런 일’을 당해 유감이라는 모호한 위로를 건네었다. 그러고선 화제를 돌렸다.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계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런 자극적인 스캔들로 흥미를 끌면 레슬리의 머릿속에서도 죽은 사람들이 물러갈 거라고들 믿었다, 순진하게도.

 

  그는 시빌의 장례를 치르고 반년 채 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을 만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있었다는 사실마저 덮어버리려고 드는 이야기에 화가 치밀었고, 그들의 이야기에 발맞추어 그날, 프림데에서 아무도 죽지 않았고 나탈리 호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매일 다를 바 없는 시간을 새겨 나가는 현재가 숨이 막혔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레슬리 라몬트를 손톱만큼도 걱정할 이유가 없었던 에디스 해터가 그의 시야에 나타나 드디어 불문율을 깨고 그 사랑스러운 이름을 화두에 올렸다. 이사야와 시빌. 레슬리 라몬트는 소파의 등받이에 푹 기대듯이 앉아 두 사람의 이름만을 가만히 곱씹었다. 창백한 얼굴 위로 미소가 새고, 갈라진 목소리가 에디스를 호명했다. 반갑네요. 그 이름. 나 말곤 다들 잊어버린 줄 알았습니다. 아무도 내 앞에선 말을 안 하기에. 햇빛이 커튼에 가로막혀 사방이 잿빛 어둠에 잠겨 있었다.

 

  “이미 꽤 확신을 품고 오신 것 같은데. 제가 시간에 손을 댔다고.”

  “…템페온은 그걸 위한 프로젝트죠? 시간을 이용해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키기 위한.”

  “근거가 있는 확신입니까?”

  “요한나 파우스트가 프로젝트에 참여했다면 그 이유는 보나마나 시빌 라몬트를 위해서였을 테니까. 그리고 그런 파우스트와 손잡을 만큼 이해가 일치하는 건 이 일대에서 당신 정도예요.”

 

  당신 말대로 다른 사람들은 다 잊어버렸거든요. 그런 가엾기만 한 시한부는. 에디스 해터는 단어 한 조각 거르는 일 없었고, 레슬리는 눈썹을 조금 치켜올렸다.

 

  “당시엔 화제가 좀 되었었는데. 이 일대 바다에서 재버워키가 출현한 적이 없었으니까.”

  “10년이나 지났으니 어쩔 수 없죠. 모두 잊어버릴 수밖에요.”

  “…시간은 왜 이다지도 무정할까요. 사람을 몇이나 과거로 보내도 달라지는 건 없고,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니 정말이지….”

 

  대화의 틈을 비집고, 파도 소리가 밀려들었다. 이사야에게 어떻게 그런 답장을 쓸 수 있었던 건지, 지금에 와서는 도저히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해터 양. 마지막이니 솔직하게 묻겠습니다. 폐하의 명령을 받고 오셨습니까.”

 

  에디스는 안경 너머로 레슬리를 가만히 응시하기만 할뿐 고개 한 번 움직이지 않았다.

 

  “전혀요. 저희 가문이 언제 그분하고 친했다고. 그저 비즈니스일 뿐이죠. 사적인 부탁 같은 건 주고받지 않아요.”

  “그럼 이건 대체 누굴 위한 체크메이트죠?”

  “저를 위함이에요. 철저하게.”

  “취미가…나쁘시네.”

  “언젠 안 그랬나요.”

  “언제나 그랬죠. 당신의 그런 점이 정말 싫었는데.”

 

  레슬리 라몬트는 천천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응접실 한구석에 마련되어 있던 협탁의 서랍을 열자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종이 한 묶음이 있었다. 한 장을 투박한 손길로 찢고, 펜을 쥐며 에디스를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바라는 게 뭡니까? 이제 다 아셨으니 물러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진상이 시시해서 실망하셨나?”

  “딱히 다 알았다는 생각까진 안 드는데. 궁금한 게 많아요. 템페온을 만든 공식부터, 만들기로 작정한 계기에 이르기까지. 정말 사자소생 같은 터무니없는 걸 꿈꿨나요? 마음이 무심해지진 않았어요? 그 사람들이 죽은 지 벌써 10년이 지났는데.”

  “신이 만든 실패작인가 보죠. 한 번 꿈꾸기 시작하니 정말로 가지고 싶어지더라고요. 시빌과 이사야가 죽지 않은 현실, 그리고….”

 

신의 영역이.

 

  레슬리 라몬트가 돌아보았을 때, 커튼과 커튼 사이 가느다란 빛기둥을 이루며 들어오던 햇살이 그의 등 너머에서 떨어졌다. 그의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은 바다와 어우러지지 않았고, 해가 떨어지고도 이 땅에 남아 존재감을 과시하는 노을을 연상케 했다.

 

  “템페온의 위치를 적어드리겠습니다. 이제 더는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당신 같은 기분파를 어떻게 신뢰하며 당신 정도의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 내가 선 위치까지 걸어들어왔는데 이 모든 사태가 창조신의 귀에 들어가지 않으리라고는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전리품이라고 생각하십시오. 포로는 드릴 수 없겠으나. 에디스 해터는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음에도 아무런 대답도 없이 레슬리로부터 템페온의 위치를 적은 메모만을 건네받았고 응접실을 돌아 나왔다.

 

  체스가 끝났다면, 체스판 바깥으로 밀려난 말 같은 것은 에디스의 알 바가 아니었다.

 

  어둑한 응접실 안, 레슬리 라몬트는 빛이 새어드는 커튼을 맞물렸다. 파도가 밀려들고 자갈이 굴러가는 소리만이 잿빛 어둠 속에 침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