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평생 바다를 사랑할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로부터 받은 은혜로서 일어선 자들의 피를 물려받았으므로, 내 혈관에는 피와 더불어 바다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운명도 함께 뒤섞여 흐르는 줄로만 알았어. 이제 나이 마흔이 가까워져서야 깨달았다. 우리의 창조신은 어떤 규칙을 창조했을 뿐이라고. 그들은 일일이 피조물의 운명을 들여다보며 조율하지 않는다. 그저 선의와도 악의와도 거리가 먼 어떤 이치들을 만들기만 하고 이 땅에 내버려 두었다. 그러니 운명은 인간의 서러운 착각이다. 우리는 단단히 고정된 거라면 무엇이든 허락받지 못했다. 마음은 요동치고 이성에는 금이 간다. 창조신과 달리 내던져진 이치에는 아무 감정이 없고, 우리에게 다정할 의무도 없다. 그러한 이치들이 ‘우연히’ 맞물려 태어난 우리는 지독한 우연 속에서 번민한다.
이사야, 사실은 네가 황야에서 목숨을 끊은 게 대단한 숙명에 의한 결과였다고 생각하지 않아. 사랑하는 나의 시빌, 네가 나탈리 호에서 죽어간 것이 신의 의지였다고 믿지 않아. 부모님이 차례로 돌아가시고, 눈길이 닿는 곳마다 망망대해가 뻗어나가는 이 항구 도시에서 내가 최후의 라몬트가 되었다는 사실에도 그 어떤 의미, 운명, 가치가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너희의 죽음에 침몰한 채, 그저 시간, 과거만을 더듬어 보고 있는 현재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숨 쉬고 싶을 뿐이지.
산 자는 죽음이라는 심해 속에서 호흡할 수 있는 아가미를 달고 태어나지 않아. 나를 이 끔찍한 바다에서 건져낼 수 있는 건 우습게도 이 숨 막히는 해수(海水)를 이루고 있는 너희뿐이고. 결국 너희가 나를 건질 수 없다면, 글쎄. 남은 건 익사뿐이다.
* * *
제임스 윈프리드는 나탈리 호가 어디에서 온 배인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팔자에 떠밀리듯이 해적선이 된 그 배를 타던 순간에도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이 무식하게 커다란 배에서 살아남는 것만을 생각해야 했고, 또 알고 싶어 한다고 해도 가르쳐 줄 법한 선원이 없었다.
새벽이 깊었다. 마법장치로 밝힌 방 안은 글자를 충분히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불그스름한 빛이 감돌았다. 오래된 신문에서 나는 종이 먼지 냄새가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침대와 바닥에 신문들이 낱장으로 흩어져 있었고, 제임스 윈프리드는 침대 가장자리 바깥으로 반쯤 다리를 내놓은 채 침대의 이불 위에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전부 10년 전, 블라우 앞바다에서 벌어졌던 어느 살인사건을 다룬 신문이었다. 그는 마지막 신문을 들고 있던 왼팔을 툭, 침대 위로 떨어트리고서는 가만히 정보를 추렸다. 그러니까, 이 살인극의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았다. 시빌 다이애나 라몬트.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이름의 미완성 이종족. 페러그린이라는 이름의 재버워키. 그리고, 시빌 다이애나 라몬트의 심장을 취하여 황야로 달아났다는 살인자 아델하이트.
그리고 그들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사람이 둘. 그들이 10년의 세월을 통과하여 무대 위로 올라온 것이다. 시빌 라몬트의 유일한 유가족, 그리고 사랑했던 사람.
그는 나탈리 호에서 죽어가던 어린아이들 몇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름은 생각이 안 나도, 시신의 얼굴 생김새는 또렷이 기억난다는 게 불쾌했다. 그때, 아델하이트를 피해 시신을 바다에 던지면서 무슨 감정을 느꼈었는지도 되짚어 보았다. 안타깝게도 아무것도 되살아나지 않았다. 시간이 무서운 게 그런 점이었다. 강렬했던 어떤 감정 위로 묵직한 흙을 덮어버린다는 것. 오래 지나 다시 파내어보면 곰팡이가 슬고 흙먼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어서 원형을 찾기 어려워진다.
왜 시간은 레슬리 라몬트의 감정만을 비켜 갔을까? 가족을 잃는다는 건 어떤 느낌이지. 알 수 없었지만, 더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살아남는 데에 연민은 불필요하다. 멈춰서는 자는 조류에 휩쓸려 도태된다. 그게 바다의 생태다.
* * *
다음 날, 에디스 해터가 라몬트 저택의 주소를 적어 엽서를 띄웠다. 또 하루가 지나 새벽, 에디스의 우편함에 답장이 도착했다. 왜 갑자기 해터 가문에서 아무런 교류도 없는 자신의 가문을 방문하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고 적혀 있었다. 에디스가 막연히 기억하는 레슬리 라몬트다운 문장은 아니었다. 그 시절 사교계에서도 모두의 인정을 한 몸에 받던 마당발이, 교류가 없던 집안의 차기 가주가 몸소 행차해주시겠다는데 기회를 걷어찰 리가 없다고 오판했다. 자신이 템페온을 추적한다는 정보가 라몬트 가문에도 들어간 것일까? 크롬웰이 라몬트와 교류가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는데. 만약 답장으로 도착한 편지가 두 장 겹쳐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더라면, 에디스는 진실을 향해 한 발자국 크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하마터면 걷어찰 뻔했다.
그러나 혼자 남은 저를 연민하여 찾아와주시겠다는 의미라면 환영하겠습니다. 원하시는 시간을 적어 답신 주십시오. 최대한 시간을 맞추어보겠습니다.
에디스는 답장을 딱 두 문장으로 요약하여 속달로 부쳤다. 내일 아침 찾아가겠습니다. 부디 놀라지 마시기를.
* * *
블라우에는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항구는 아침이 빨랐다. 밤새 꾹 삼켜두었던 태양을 붉은빛과 함께 토해내는 바다 위로 불규칙한 파도가 미끄러졌고, 조금씩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한 선착장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사이먼의 구두코에도 새벽이슬이 맺혔다. 정오면 템페온의 가동 준비가 끝날 거라고 했다. 그때까진 뭘 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그 말이 제일 어려워요. 그런 말이 절로 튀어나왔지만, 레슬리 라몬트는 뭘 해도 좋다는 말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할 게 없으면 정오까지 아무것도 안 해도 됩니다.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라 잠까지 설치고 말았던 사이먼은 그의 도주를 우려하여 라몬트 가문에서 붙인 어린 하녀 하나를 데리고 새벽에 가까운 아침 산책을 나섰다. 선착장에 앉아, 딱히 하는 말도 없이 파도와 뱃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바다 특유의 짠 냄새가 바람에 감겨 선착장 곳곳을 떠돌아다녔다.
“…안 무서워요?”
하녀가 남부 억양이 짙은 말씨로 물었다. 저택에서부터 선착장에 이르기까지, 멀지 않은 길을 나란히 걸어오면서 그들은 한마디 말도 섞지 않았다. 그 침묵이 못내 무겁고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사이먼이 돌아보았다. 바다에서 막 떠오른 햇빛이 그의 얼굴 윤곽을 더 또렷하게 만들어놓았다.
“무서워. 황야에는 가본 적이 없거든.”
“왜 그걸 무서워해요? 거긴 무서워할 거라곤 사람과 물 부족밖에 없어요. 내 말은, 그게…. 과거로 가는 건 안 무섭냐는 의미였어요.”
황야라더니, 프림데 일대엔 정말 물이 부족한가 보군. 평생을 중부 어촌에서 자란 어부의 아들은 황야란 붉은 태양 빛이 가득 물든 바다처럼 불타고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을 실없이 했다.
“그것도 무섭지.”
“도망…치지 그래요? 이런 소리 하기 정말 그렇지만, 그게, 시빌 아가씨가 죽든 말든 그건 당신하고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남는 것도 무서우니까 됐어.”
“남는 것도 무서워요? 왜요?”
“끝이 없으니까.”
해가 오롯이 바다를 빠져나오자, 태양의 불그스름한 기운이 말갛게 씻겨나가고 아침이 찾아왔다.
“과거로 가면 메피스토텔레스의 부활을 막거나, 헤르만 아델하이트를 일찍 죽게 만들기만 하면 되잖아. 그럼 아무 부채감도 없이 내가 어떻게 살든 자유야. 그렇지만 여기 남으면 난 평생 부채감과 의무감에 짓눌려 시달리게 될 게 뻔해. 빚은 안 줄고, 제시한텐 해줄 수 있는 게 없고 입에 풀칠하기도 힘드니까.”
여긴 자유가 없어. 가난 앞에선 내가 나일 수가 없다고. 사이먼은 몸을 일으켰다.
“그보다 황야의 이야기를 좀 해줄래? 메피스토에 관해 아는 게 있으면, 더 알려줘도 좋고.”
도망치지 않고도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버트럼 가족이 서로를 쳐다보며 입에 올리는 사랑은 가난하기에 지독했다. 제시에게로 돌아가려면, 이 가족애가 족쇄가 아니려면 사이먼으로서도 과거를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템페온의 존재를 부정해야 한다. 레슬리 라몬트에게 죽은 시빌과 이사야를 안겨주고, 영원히 시간을 손댄다는 발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이 원대한 계획에 신이 요구한 희생양은 딱 하나. 시간 속 표류자 사이먼 버트럼이다.
* * *
C1118년, 칼 하멜은 레슬리 라몬트와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프림데의 도시 경계를 통과했다. 요르문간드의 숲으로 간다는 열여섯 먹은 남자아이를 안쓰럽게 생각한 관원이 잠시만 기다리라며 그를 사무소 한구석에 앉혀두었다. 남자는 곧이어 새하얀 비둘기 하나를 새장에 넣어 돌아왔다. 갓 잡은 것은 아니고, 경매를 통해 수도 근처에서 구매하여 키우고 있던 놈이라고 했다. 그는 이 사무소에서 20년 넘게 일했기 때문에 한눈에 알아보았다고도 덧붙였다. 이놈은 이종족이야. 사냥당해서 산 채로 경매장을 전전했고, 이놈을 경매에 붙였던 모든 주인이 이 징그러운 괴물이 어설픈 인간의 모습을 취하지 못하도록 조그마한 새장에 가둬둔 거지.
그렇게 징그러워하면서 경매에서 이건 왜 구매하셨습니까? 얼떨결에 새장을 떠안은 하멜이 물었다. 뭐, 인간의 말도 알아듣고 동물에 비하면 손이 덜 가기도 하고. 뭣보다 내가 취향이 좀 특이하거든. 전엔 뱀을 키웠어. 관원은 더불어 당부했다. 이종족의 숲에서 나고 자란 놈인 만큼 혹여라도 저기서 길을 잃으면 이놈이 좀 도움이 될 거야. 밥은 하루에 두 끼 주면 되고, 너무 많이 주지는 말고. 그냥 말하는 비둘기라고 생각해. 잘해주지 말고, 명령은 엄격한 투로 내리는 게 좋아.
그리고 경고하건대, 새장은 열지 마. 관원은 새장을 한 번 툭, 두드렸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을 취하면 위험할 뿐더러, 기분만 더 나빠질 테니까.”
관원은 하멜이 어째서, 무엇을 위해 숲에 가느냐고까지는 묻지 않았다. 그저 너만한 딸이 있어서 마음이 쓰였다며 안전하게 다녀오라고만 했고, 비둘기는 쓰고 돌려주기만 하라고 덧붙였다. 하멜의 품 안으로 넘어온 새장 속 비둘기는 관원이 새장을 두드리건 말건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하멜과 함께 국경 결계를 통과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아, 집이다. 집이야.
하멜은 이틀이 지나서야 그 비둘기가 자신의 이름마저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머릿속에 남은 정보는 몇 가지 안 되었다. 산비둘기 일족이 사는 곳의 위치. 몇몇 재버워키들이 차려놓은 개인 거점으로 가는 길. 숲의 남부, 브릿 사막으로 통하는 경계선으로 가는 꼬불꼬불한 숲길.
그러나 그는, 창조신이 그들 일족의 선조에게 남겼다는 최후의 당부마저 오래전에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그걸 하멜이 탓할 수는 없었다. 그의 일족은 무언가를 자꾸 잊어버리는 게 체질이라고 했다. 일종의 숙명 같은 거야. 광활한 숲에서 몇 주를 함께 동고동락하며 사막으로 남하하는 동안, 이 이름 없는 비둘기는 칼이라는 이름조차도 가끔 까먹곤 했다. 하멜은 숙명적으로 타고난 체질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관원이 강조했던 대로, 비둘기에게 존댓말을 쓰지 말았어야 했다. 높임말을 쓰지 않으면 죽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던 걸까. 이 작은 이종족에게 마음은 왜 주고, 그가 고향 친구들을 만날 수 있게 길을 우회했던 건 어째서였을까. 새장은 왜 열었지?
후에 칼 하멜은 텅 빈 새장을 안고 생각하였다. 창조신 루이스가 레슬리 라몬트가 시간에 손대고 있는 현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는 알면서도 방치했다. 왜냐하면, 시간은 영원불멸하니까. 라몬트와 파우스트가 템페온이라는 시간이동장치를 개발하고, 템페온이라는 회사를 이용하여 과거로 보낼 탐사자를 모집하고, 그 가운데 사이먼 버트럼이 섞여 있었던 것마저 신이 정한 이치가 미리 설계한 일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름 없던 비둘기는 메피스토텔레스에 씌어 날아갔다. 하멜이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 날아가는 새를 붙잡을 수 있는 도구 같은 건 가지고 오지도 않았으니까. 그저 숲과 사막의 경계에 서서 텅 빈 새장을 안고 우물가에 앉아 스스로가 열어버린 판도라의 상자가 앞으로 무슨 일을 저지르게 될지 그 미래에 관해서만 생각했다.
흰 비둘기의 육체를 빼앗은 메피스토는 블라우에서 발견된다. 소식을 들은 재버워키 페러그린이 움직일 것이다. 프림데에 기거하고 있던 두 사람이 움직일 테고, 시빌 라몬트는 심장을 약속할 것이며, 아델하이트는 끝내 나탈리 호라는 최후 무대에 오를 터다.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메피스토를 따라잡아야 한다. 문제는, 이종족 동포 없이 이종족의 숲을 그만한 속도로 통과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흰 비둘기 일족은 그가 그들을 뒤로 한 채 사막으로 건너오는 사이에 칼 하멜을 잊어버렸을지도 몰랐다. 숲은 이방인에게 잔혹했다. 서탑의 체셔는 아직 식인 풍습을 가지고 있었고, 재버워키들은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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