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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ror 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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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ror No.9 Rebellion 1.Traveler(9) C1114년, 10월 7일. 날씨 맑음. 「시공간이동장치(Temfeon)」가 목표 지점에서 얼추 비슷한 시간대에 나를 내려놓았다. 공간은 다소 어긋났다. 눈을 뜬 곳은 이종족의 숲 서탑 부근이고, 하마터면 체셔 일족에게 잡혀 허벅지를 뜯어먹힐 뻔한 찰나에 운 좋게 정신이 들었다. 목표로 설정한 시간까지 앞으로 4년이 남았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은 4년 안에 손쉽게 해치울 수 있는 종류는 아니었다. 우선 인가가 있는 곳으로 향하기로 했다. 프림데, 로헤드, 어디라도 좋으니까. 어차피 나는 몇 달 안에 이종족의 숲으로 돌아올 것이고, 그것을 폐기하기 위해 브릿 사막을 향해 나아가야 하겠지만 당장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여기서 내가 어디론가 도망쳐버린다 한들, 이 시대에 살아 있는 그가 나를 추..
Mirror No.9 Rebellion 1.Traveler(8)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눅눅한 지하를 간신히 빠져나오자, 폐부 가득히 들어차는 시원한 밤공기가 더없이 달았다. 유스터스 크롬웰은 그들을 딱 블라우 광장까지만 바래다주었다. 크롬웰이 내어준 마차에서 내려오자마자 제임스는 우선 크게 심호흡을 한 후, 고개를 쳐들어 광장 한복판에 솟은 시계탑부터 쳐다보았다. 자정이 넘었다. 담배 연기가 가득 들어차 질식할 것만 같았던 지하에서 거의 하루를 날려 보냈다는 의미였다. 나오면 기차역으로 냅다 도망치겠다는 계획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늦어 역사는 폐쇄되었을 것이다. 기차를 타려면 내일 오전 첫차가 출발하는 시간까지는 버텨야 할 테고, 역사 앞에서 담요 한 장 없이 밤을 지새우자니 치안 유지를 위해 순찰을 도는 헌병이나 자경단에게 끌려가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
Mirror No.9 Rebellion 1.Traveler(7) 제임스 윈프리드는, 최소한 애비게일 크롬웰이 담뱃불이라도 꺼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유스터스가 문이라도 열어두고 가지 않았더라면, 칼 한 번 들어보지도 못하고 질식해 죽었겠다는 험악한 생각에 도무지 표정을 펼 수가 없었다. 에디스 해터로부터 사건의 추이에 관한 설명을 들은 애비게일은 그 후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30분가량 담배 연기를 토해내기만 했다. 파이프 담배 안에 담뱃잎을 몇 번이나 채워 넣고, 새로 불까지 붙여가며 오로지 흡연에 열중하였다. 에디스와 제임스가 그 공간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한 건 아닐까, 그런 의구심이 절로 솟구쳐 오를 만큼 답답한 침묵이 공간을 내리눌렀다. 애비게일은 담뱃잎을 세 번 채웠을 무렵에야 몸을 비스듬하게 틀어, 크고 갈라진 눈으로 두 인간을..
Mirror No.9 Rebellion 1.Traveler(6) 제임스 윈프리드는 그들 일족의 본 모습이 벌레이기 때문에 축축하고 어두운 땅속을 이만큼 깊이 파내는 건축 형태를 선택한 것인지, 어쩔 도리 없는 호기심이 들었다. 숨을 한 번 들이쉬면 습하고 싸늘한 공기가 폐부 가득 들어찼다. 기침 섞인 날숨을 토하면 입안이 남은 습기로 텁텁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 무슨 굴속으로라도 들어가는 느낌이로군. 자신보다 두 발자국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가는 유스터스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생각은 그렇게 하더라도, 역시 말로 하면 무례한 일이겠지. 아무렴, 형태가 벌레를 닮았을 뿐 그들 일족은 벌레라는 말로 모두 설명할 수 있는 납작한 존재가 아닐 테니 말이다. 스스로를 유스터스라는 이름으로 소개한 소년은 에디스와 제임스를 어느 복층 건물로 안내했다. 건물은 척 보기에도 너비..
Mirror No.9 Rebellion 1.Traveler(5) 여기서부터는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다. 이러한 시제(時制)와 가정(假定)을 사용하여 일기를 적는 것이 얼마만의 일인지 모르겠다. 속내가 무엇이었든 템페온은 「사이먼」에게 어머니를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다. 해터 가문 사람 앞에서 공언한 것을 보아 그들은 노인을 이용한 탐사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해하기 어려운 바는 아니다. 아이의 시간은 노인의 시간에 비하면 무궁한 편이다. 탐사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건 두 가지다. 시간과 운. 운이 맞아떨어져 목표와 근접한 구간까지 도착하더라도 남은 시간이 부족하다면 때를 기다릴 수 없다. 따라서 「어머니」는 돌아올 것이다. 나는 이다음을 상상해야 한다. 이제 어떻게 할까? 조금 더 납작 엎드려 때를 기다리는 편이 좋을까? 나는 감시받고 있나? 아..
Mirror No.9 Rebellion 1.Traveler(4) 우편배달부가 문을 두드린 것은 아침 식사로 구웠던 식빵을 갓 한입 물었을 때였다. 올해로 열여섯 먹은 유스터스는 식빵을 고스란히 입에 꾹 문 채로 현관을 나왔다. 우편배달부는 어깨에까지 힘이 잔뜩 들어간 채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서 있었다.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번 훑어보는 우편배달부의 시선은 깔끔히 무시한 채 유스터스는 우편배달부의 손가락 사이로 편지 봉투를 스륵, 빼앗아왔다. 16살의 소년은 입안에 든 식빵을 가득 우물거리며 부정확한 발음으로 물었다. 혹시 내가 서명할 게 있나요? 편지를 전달하고도 현관에 두 발을 꾹 붙이고 떠날 줄을 모르는 우편배달부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그, 살면서 이종족은 처음 봐서요. 생각보다 인간과 그다지 다를 게 없구나, 싶어..
Mirror No.9 Rebellion 1.Traveler(3) 에디스 해터의 남부 도착이 일주일 이상 늦어질 수 있다는 편지는 필립 해터의 기분이 바닥을 기어 다니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도 필립은 다리를 꼬았을망정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었고, 한동안 말이 없기만 했다. 레오폴트 그리폰은 그것이, 해터 가문이 황야에 부랴부랴 숨겨놓았다는 사생아 필립 해터가 갑자기 자신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설령 마음에 안 차는 말이 적혀 있더라도 그가 손에 든 편지는 에디스가 적은 것이고, 평소에 한다는 것처럼 제 기분이 엉망이 되었답시고 찢어버리거나 불태울 수도 없었을 뿐이겠지. 초면이나 들리는 풍문 몇 가지만 조합하면 얼추 그림은 그려지는 타입이다. 캐릭터가 뻔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필립이 편지를 느릿느릿 10번을 읽는 ..
Mirror No.9 Rebellion 1.Traveler(2) …(전략)… 여기까지 오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프림데에서 자베이온까지 수십 년이나 걸릴 거리가 아님에도 그러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두려웠던 것도 같다. 그 작자의 권세가 두려웠다기보다는 내가 두고 왔던 모든 사람, 특히 내 가족을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마주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나보다 먼저 떠났던 선발대는 모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디에 도착했을까? 살아는 있나? 나는 운이 좋았던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수십 년만 기다리면 자베이온에 돌아올 수 있었으니까. 필요한 것도 그럴 수 있는 용기뿐이었다. * * * 제임스 윈프리드는 광장에서 자신을 자베이온에 내려준 짐 마차의 마부가 거짓말이라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날 블라우로..
Mirror No.9 Rebellion 1. Traveler(1) 미스터 버트럼, 부디 이 편지가 무사히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보내주신 편지는 제대로 도착했음을 알립니다. 마법으로 속달을 보낼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용서하시기를. 제가 지금 의탁하고 곳은 국가 공인 학회가 아닌 통에 자금이 넉넉지가 않습니다. 문의하신 일이 한시를 다투는 시급한 일은 아니었어야 할 텐데요. 우선 보내주신 편지에 적힌 마법 장치의 제작에 제가 크게 관여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돈이 급했습니다. 당시의 저는 이렇다 할 학회에 소속된 몸이 아니었고 더불어 본디 저를 후원해주고 있던 그리폰 남작과 연구 주제를 놓고 갈등이 생겼습니다. 고향인 남부 프림데를 떠나고 보니, 또 동포인 남작을 척지고 나니 이종족 그리폰인 저를 받아줄 만한 귀족 가문이 여의치 않더군요. 그러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