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irror No.9/Mirror No.9 1부

Mirror No.9 1-1. Snowwhite

 

 영원히 타오를 것이라고 약속했던 불길은 5년 만에 잡혔다. A는 역한 냄새와 산더미 같은 재만 간신히 남기고 불씨까지 사그라진 화로를 생각했다.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슬슬 팔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구름보다 조금 낮은 위치를 떠다니는 칼바람이 한 줄기 그의 머리칼을 쓸었다. 평생 올라올 일이 없을 거라 믿었던 탑 위에서,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무거운 '이종족'을 끌어올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우습기까지 했다.

 

 불길이 타오르지 않는 슈니플로케가 이토록 추웠다는 사실을 그는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오랜만에 달까지 차게 얼었다. 저 산 너머에서 밀려오는 먹구름도 단단히 얼어붙은 눈구름일 것이 분명했다. 눈꽃의 도시는 이제야 5년간의 짧은 봄을 끝내고 다시 본연의 겨울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젠장. 그런 간단한 욕지거리만 내뱉어도 호흡까지 하얗게 얼어붙어오는, 명실상부 슈니플로케다운 밤이었다.

 

 * * *

 

 A는 그날 아침 통보를 받았다. 얼마 없는 휴일 오후 9시쯤 일어나 아침으로 적당히 구운 토스트를 먹고 있는데 무대 조연출이 그의 허름한 숙소로 뒤어 들어왔다. 숙소는 A를 포함하여 남자 여섯 명이서 썼다. 머릿수만큼 잡다한 물건이 많았다. 조연출은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문가에 가로놓여있는 사다리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중심을 잡기 위해 가까운 곳의 장식장을 짚으려다 손끝에 걸린 반짇고리를 엎기까지 했다. 그는 아주 난장판이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A는 바삭한 토스트를 우물거렸다.

 

 "거기 발 조심하세요. 못 튀어나와 있어요."

 "너희 정리 좀 하고 살지 그러냐?"

 "여섯이서 사는데 한 놈이 정리한다고 뭐, 정리가 되겠어요."

 

 A는 조연출이 들어오는 방향을 향해 몸을 틀어 앉았다. 식탁 위에는 먹으려고 구워둔 식빵이 두 장 더 있었다. 갈색 병에 담긴 유자 잼의 뚜껑이 열려 있었다. 조연출은 간신히 방 한 구석에 위치한 식탁까지 다가와 잼이 든 병을 들었다. 병에 희미하게 묻어있는 먼지와 라벨에 적힌 오래된 제조날짜를 보며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A는 먹고 있던 토스트의 마지막 조각을 입에 쏙 넣었다.

 

 "근데 뭔데 그렇게 급하게 뛰어왔어요? 쉬는 날이라 다들 어젯밤부터 달려서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토스트 부스러기가 묻은 손을 한 번 툭탁 털고 어깨만큼 오는 의자 등받이에 팔꿈치를 얹었다. 조연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갈색 병을 식탁 한 구석으로 슥 밀어두었다.

 

 "오너가 너 찾는다. 지금 당장 준비하고 뛰어오래."

 "엑, 날 왜 찾는대요? 드디어 떼먹은 돈 좀 정산해 줄 마음이 생겼나?"

 "허이고, 퍽이나…. 그 인간이 그렇게 착하면 내가 이렇게 안 뛰어왔지."

 

 조연출의 떨떠름한 표정은 A에게 고스란히 옮아붙었다. 극단 내에서 진득하게 유행하는 병이 하나 있다면 바로 그 표정이었다. 지독한 오너 때문에 제대로 된 휴일을 보장받지 못 함은 물론이요 보수도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간신히 받고 있었다. 때문에 뚱하고 우울한 표정은 좀처럼 극단 사람들로부터 떠날 줄을 몰랐다. A는 미처 다 먹지 못 한 빵 위로 지저분한 보를 덮었다. 얼굴을 씻고 나와 낡은 수건으로 물기를 싹 훔쳤다. 외출 채비의 마지막은 늘 코트를 챙기는 일이었다. 그가 문간에 걸어둔 코트를 향해 손을 뻗자 그새 A가 앉았던 자리를 차지한 조연출이 목을 길게 빼고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밖에 안 춥다, 그냥 나가는 게 좋을걸. 더워 죽어."

 "아, 그거 먹지 말라니까."

 "요즘 같은 날씨에 밖에 그냥 두면 상하는데. 내가 먹는 게 훨씬 이득이라니까 그래."

 "…젠장, 날씨 포근해지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네요. 벌어서 남 먹여주는 취미 없는데."

 

 숙소를 나서니 햇살과 함께 풋내가 밀려들었다. 푸릇한 세상이 아직은 낯설었다.

 

* * *

 

 A가 사는 슈니플로케는 대륙의 최북단에 위치한 도시다. 슈니플로케의 북단을 가로막고 있는 아시브 산맥 너머로는 얼어붙은 바다가 있었다. 부동항을 이용하려면 남단의 숲을 한참 지나 남하해야만 했다. 1년 365일 중 눈이 내리지 않는 날이 훨씬 적었다. 그만큼 지겹게 눈이 내리는 도시였다. 남부 사람들은 듣기만 해도 얼어 죽을 것 같은 별명들을 이것저것 갖다 붙였다. 눈꽃의 도시, 얼어붙은 산골. 그곳에서 사는 사람으로선 썩 유쾌한 별명들은 아니었다.

 

 그런 슈니플로케에 최근 몇 년 사이에 찾아온 봄은 이례적이었다. 그 산골에 사는 사람들 중 영상의 기온을 제대로 누려본 사람은 몇 없었다. 봄은 매년 4월이 되면 찾아왔다. 도시 중앙에 탑이 서고나서부터 매년 4월이면 풀이 싹텄다. 이 억세고 쌀쌀한 산골을 감당하지 못 하고 떠나간 귀족들이 많았던 가운데, 유일하게 스노우화이트 가문이 마법을 통해 특정 반경 안의 기온을 조절하는 기후 조절 마법 '영원한 불길'을 창안했다. 불길은 얼어붙은 땅에 과분한 봄을 하사했다. 이 땅을 구원한 스노우화이트 가문은 중앙 정부로부터 공을 인정받아 슈니플로케를 영지로 하사받았다. 그것에 반대하는 백성 또한 없었다. 그로부터 5년이 흘렀다. 없던 봄에 적응하느라 혹은 과거보다 훨씬 온난해진 겨울에 놀라느라 사람들은 더욱 바쁘게 살았다. 불길은 탑 위에서 타올랐다. 스노우화이트가 불을 피우고 백성들이 자진해서 탑 주변의 환경을 관리했다. 기온이 온난해지니 얼어붙은 산골이라는 악명 탓에 뜸했던 관광객들의 발길도 늘었다. 극단 형편이 괜찮아진 것도 그 덕이었다. 연극은 백성이 잘 살아야 함께 흥하는 대중오락인 까닭이었다.

 

 "왜 하필 저예요?"

 

 A가 무대 본관에 들어서자마자 극단의 연출 중 한 사람이 부산스럽게 뛰어나왔다. 그의 팔 한 쪽을 부여잡고 텅 빈 객석을 가로질렀다. 무대 뒤편, 극단 건물 가장 깊은 위치에 배우 대기실이 있었다. 그곳에서 오너가 기다린다고 했다. A는 이동하면서 간신히 자신이 이렇게 급하게 끌려가게 된 자초지종을 얻어들을 수 있었다. 날씨가 풀려 더불어 살아나기 시작한 연극 시장에 후원을 하고 싶다는 남부 귀족이 하나 나타났다. 남부에선 예술에 관심이 많기로 유명한 양반이라고 했다. 그가 슈니플로케 연극 시장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극단을 방문했다는 소식이었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 A는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았다. 보통 그런 이야기는 오너 혹은 최소한 극단의 운영에 깊이 관여하는 인물들끼리 주고받을 일이었다. 그거 하고 지금 제가 끌려가는 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고요. 대기실 코앞에 이르러 그렇게 투덜거리자 연출은 그의 옷매무새를 단정히 다듬어주며 말했다.

 

 "알다시피 하필 도착하신 오늘이 공연이 없는 날이잖아. 예정대로라면 내일 모레 도착하신다고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본의 아니게 일찍 도착하셨다나 뭐라나. 우리도 예정보다 일직 오시는 바람에 뭐 준비해 둔 게 있어야지. 배우고 연출이고 작가고 오랜만에 쉰다고 자리 비운 마당에. 그래서 솔직하게 그렇게 알려드렸더니, 그럼 온 김에 극단에서 준비를 다 할 때까지 슈니플로케를 느긋하게 돌아보고 싶다고 하시더라. 혹시 한가한 단원이 하나라도 있으면 안내를 좀 부탁할 수 있겠냐고도 하시고."

 "왜 내가 한가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것도 좀 기분 나쁜데."

 "술 안 마셔, 취미 없어, 보러 갈 가족도 없어. 휴일에 숙소에 콕 틀어박혀서 뒹굴 사람이 너밖에 없잖아."

 "젠장. 내가 조만간 뭐라도 취미 만들어야지, 이젠 취미가 없다고 휴일에 일을 시키네."

 "말 좀 예쁘게 하고. 슈니플로케는 처음이라니까 어딜 데려가나 좋다고 신기해 할 걸. 적당히 시간 때우면서 기분이나 좀 맞춰줘."

 

 연출이 제 목에 걸려있던 넥타이를 풀어 A의 목에 능숙하게 매어주었다. A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성의 없이 알겠다는 대답만 두세 번 반복했다.

 

 대기실에 들어서자 환하게 밝힌 불빛이 아른거렸다. 대기실엔 햇살이 함빡 들 만큼 큰 창이 없었다. 환기를 위해 뚫은 손바닥 만 한 환풍구 하나만 간신히 나있었다.

 

 A는 태어나서 자신을 그토록 반기는 오너를 처음 보았다. 연출이 그를 가볍게 밀어 넣고 짦은 인사만을 남긴 후 대기실을 나가자 이번엔 오너가 과하게 그에게 친근한 척 굴며 그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저항할 새도 없이 A는 대기실 중앙까지 끌려오고 말았다.

 

 "이 아이가 오늘 하루 슈니플로케 시내를 안내해드릴 겁니다."

 

 오너가 인사를 하라는 듯이 옆구리를 은밀히 팔꿈치로 쿡 찔러왔다. A는 떠밀리듯이 눈앞에 앉은 사내에게 간결하게 인사를 건넨 후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가난한 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눈치가 늘었다. 이렇다 할 상황 설명 없이 오너의 태도만으로도 눈앞의 사내가 문제의 남부 귀족이라는 사실을 알 것 같았다. 입고 있는 옷의 스타일은 제법 익숙했으나 재질은 남달라보였다. A는 실제로 그렇게 갖춰 입은 사람을 처음 보았다. 그간 다른 배우들이 귀족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 이것저것 복잡하게 챙겨 입는 것도 더러 보았고 그들이 옷을 입는 것을 도와준 적도 많았으나, 무대 바깥에서 직접 저렇게 입고 다니는 사람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A의 소개를 듣고 나서 어색한 침묵이 오래 흘렀다. 오너도 감히 입을 열지 못 했다. 남작 가문의 도련님 쪽이 A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찰하고 있었다. 묵언으로나마 평가까지 매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A는 그 무거운 시선을 온당 받아내며 '남쪽 사람은 무례하다'는 슈니플로케만의 날선 격언을 마음속으로만 되뇌었다. 끝내 이 침묵을 끝까지 견디지 못 한 건 나이도 많은 오너였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으시냐고 물으며 A의 머리칼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럴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오너라고 A가 특별히 마음에 들어서 이런 자리에 불러낸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극단 오너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머리칼 색을 불길하게 여겼다. 백발에 붉은색 머리칼이 섞여있어 자연적으로는 나올 수 없는 색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지도 색'을 타고났다는 사실만 가지고 A를 완전한 타자로 밀어내었다. A가 자신의 앞머리의 끝을 손끝으로 만져보았을 때, 귀족 도련님이 반 박자 늦게 오너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 그런 건 아니에요.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니 날카롭다 생각했던 인상까지 금방 부드럽게 녹았다.

 

 "인간을 처음 보면 우선 관찰하는 습관이 있어서. 이해하세요. 당신들에게 저희가 특별하듯이 저희에게도 인간은 몇 백 년이 지나도 미지의 영역이라 말입니다."

 

 그가 소리 내어 웃자 오너도 어색하게나마 따라 웃었다. 반면 A는 그가 한 말을 단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 하고 조금 넋이 나간 채로 서 있어야 했다. 말 끝마다 인간이라니 귀족은 뭐 인간이 아니라 인간 이상이라고 주장할 참인가? 이것 참, 큰일이다. 예상보다 더 미친 놈인 것 같다. 그런 험악한 생각이 치밀어올라 표정 관리에 급급해졌다.

 

 문제의 도련님이 몸을 일으켰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A의 앞에 다가서 악수를 청하듯이 손을 내밀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남부 프림데 시에서 온 레오폴트 그리폰입니다."

 

 그리폰. 이 나라에서 작위를 받은 귀족들 중 유일한 이종족으로 유명했다. A는 그 때에서야 눈앞의 사내가 했던 말의 맥을 짚을 수 있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서 악수를 해달라는 듯이 손을 내민 이 사람은 겉으로 보기엔 그럴 듯한 인간으로 보이지만 속은 인간이 아니었다. 본모습이 따로 있다. 다만 타고난 마법을 사용하여 인간의 모습을 취할 수 있을뿐이다. 그러니 말끝마다 타인을 '인간'이라는 집단으로 묶는 버릇이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인간들도 그들을 '이종족'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어 사고를 하니 말이다.

 

 "아, 그. 다시 한 번 잘 부탁드립니다. A입니다."

 

 레오폴트 그리폰이 언제 손을 잡아줄 거냐는 듯이 손을 몇 번 까딱이자, A는 정신이 퍼뜩 들어 반 박자 늦게 그 손을 잡았다.

 

'Mirror No.9 > Mirror No.9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Mirror No.9 1-1. Snowwhite(完)  (0) 2021.01.27
Mirror No.9 1-1. Snowwhite(4)  (0) 2021.01.27
Mirror No.9 1-1. Snowwhite(3)  (0) 2021.01.27
Mirror No.9 1-1. Snowwhite(2)  (0) 2021.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