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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ror No.9/Mirror No.9 1부

Mirror No.9 1-1. Snowwhite(2)

 동행한 지 몇 시간 만에 알게 된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 우선 A의 고향 슈니플로케는 악명만 높았지 제대로 알려진 바는 하나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레오폴트는 슈니플로케의 지형, 관광 포인트 무엇 하나 숙지하고 온 게 없어 보였다. A가 무엇을 추천하고 보여주든 그는 난생처음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굴었다. 체험에도 적극적이었다. A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세상이 뒤집어져도 슈니플로케는 A의 고향이었다. 슈니플로케를 고향으로 둔 사람들이 그 땅을 욕하는 것과 타지 사람이 그 땅을 욕하는 것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외지인이 슈니플로케를 알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A의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차 한 잔 정도는 제가 살게요, 하는 건방진 소리가 절로 나왔다.

 

 "상상했던 것보다 굉장히 소탈하네요, 도련님은."

 "어떤 면이?"

 "…이만큼 걸어 다녔는데도 돌아가겠다고 나오지 않는 점이. 아니면 저 같은 사람이 사는 값싼 차를 괜찮다고 말씀해주시는 점이나."

 "저런, A군. 스스로에 대한 점수가 너무 낮아요. A군 같은 사람이라니."

 

 봄이 찾아온 지 고작 5년 채 안 되었기 때문에 날씨와 관계없이 모든 카페에선 차가운 차를 팔지 않았다. 따뜻한 차를 한 번 더 홀짝이며 레오폴트는 소리를 죽여 웃었다. 그는 A가 생각했던 것보다 무엇을 해도 소리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웃고 말할 대에나 조금 소리를 냈지 발소리부터 숨소리에 이르기까지 가만히 있으면 이렇다 할 인기척이 없었다. 심지어 컵받침 위에 찻잔을 내려놓는 데에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A는 그 사실이 신기했다. 그와 숙소를 함께 사는 사람들은 그와 딱 대척에 섰다고 할 만큼 늘 소음을 몰고 다녔다.

 

 "제가 슈니플로케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고작 이런 구석에서 불평을 하면 쓰나요. 더불어 저는 보기보다 돌아다니는 걸 좋아합니다. 호기심이 많거든요. 어쩌면 종족의 특성일지도 모르고."

 "그리폰이 어떤 존재인지 솔직히 잘 몰라서요. 발생한지 오래된 이종족이라는 건 유명하니까 알지만 딱 그 정도예요."

 "본모습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 빼면 똑같아요. 기쁠 때 기쁘고 슬플 때 슬프고 궁금한 건 궁금하고. 기록에 따르면 호기심이 인간보다 강하다는데, 제가 인간으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실제로 그런지는 잘 모르겠네요."

 "흐음…. 묘하긴 하네요. 그런 건 눈에 보이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사실 알고 보면 인간들도 학구심이 대단하죠. 집요한 연구 끝에 자연을 정복하기도 하고."

 "…그러네요. 그런 건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는데."

 

 A는 찻잔에서 손을 떼고 카페테라스에서 내다보이는 시내 중앙의 탑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가 사는 세계에는 총 창조신 일곱이 존재했다. 태초에 그들 일곱이 기나긴 타협 끝에 설정한 '커다란 흐름' 안에서 세계가 굴러가고 있었다. 그 커다란 흐름의 정확한 내용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유일하게 널리 알려져 있는 조항이 신의 영역이었다. 악용하면 세계의 큰 흐름에 해가 가기 때문에 신들의 고유 권한으로 묶인 마법들로 인간, 이종족, 마법사의 힘으로는 그 영역을 감히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러고 보면 스노우화이트 가의 영원한 불길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 걸가요? '기온 조정' 같은 기후 조절 마법은 명확하게 신의 영역인데."

 

 무심코 튀어나온 의문이었다. 내뱉어놓고도 스스로 놀랐다. A는 태어나 지금까지 약 17년을 슈니플로케에서 살았고 스노우화이트의 집권 과정 또한 지켜본 입장이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궁금하다고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영원한 불길의 작동 원리 같은 것은 너무나도 까마득한 지식이었다. 알고 싶다고 느끼는 것조차 과분하게 생각해왔다.

 

 "궁금하시면 한 번 구경이라도 가볼까요? 탑이 민간에 개방되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탑 안은 출입금지예요. 남작님이 직접 드나드는데 그걸 민간에 개방할 리가 없잖아요. 보안 문제, 그런 것도 걸려 있고. 게다가 본다고 제가 뭘 알겠어요. 마법사가 아닌데요."

 "마법사 아니었어요?"

 "아니, 물론 그렇지만. 제 말은 운 좋게 마력코어는 타고 났지만 마법을 쓸 줄 모르니까 마법사는 아니……."

 

 테이블을 가로질러 불시에 뻗어온 손길에 놀라 A는 눈만 간심히 꾹 감았다. 귀족 도련님답게 제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제법 부드러웠다. '고생이라곤 조금도 해보지 않은 손'이라는 연극 속 표현이 가슴 깊이 와 닿은 적은 처음이었다. 눈 떠요, A군. 레오폴트가 눈 밑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훑어내며 그렇게 명령해왔다. A는 눈꺼풀을 간신히 떠냈다. 조건반사였다. 거의 평생을 오너의 명령조에 시달리며 살아왔던 탓이다. 레오폴트는 A의 눈동자 색을 제대로 확인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던지 테이블에서 잠시 일어나 더 가까이에서 그의 눈동자만 가만히 들여다 본 후 빙그레 웃었다. 타인의 눈동자에 비친 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라 A는 바짝 얼어붙어 레오폴트의 금빛 눈동자를 어색하게 마주보기만 했다.

 

 "봐, 역시 마법사잖아. 마법이야 배우면 되죠. 별 걸 다 걱정하네요, A군은."

 

 레오폴트는 미끄러지는 발걸음으로 도로 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A는 눈만 몇 번 더 깜빡였다. 지나치게 긴장했던 나머지 힘이 들어가 있던 승모근이 다 아파올 지경이었다.

 

 "거 참 좋으시겠네요. 마법이라는 게 뭐 하루 만에 뚝딱 배워지는 거래요? 그보다 학비 같은 게 문제라고요, 나 같은 사람한텐. 배우는 데 얼마인진 알아요?"

 "정확한 액수까지 알아요. 방법이 없지도 않고. 당신들은 남쪽 사람들은 무례하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남쪽 사람이 그런 건 아니라서, 가난한 학생을 후원하는 귀족도 있거든요. 남부엔."

 "…아니, 왜 그런 짓을 한대요?"

 "가문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서. 중앙 정부와 걸린 계약도 있고요. 남부에선 후원 학생 시험이 제법 유명한데 여긴 너무 멀어서 잘 알려지지 않았나 보네요."

 

 레오폴트는 다 식은 차로 목을 축인 후, 찻잔을 입가에서 떼어내었다.

 

 "A군이 원한다면 시험 준비를 하는 것도 방법이겠죠. 극단보단 그쪽이 돈이 될지도 모르고."

 "저 같은 게 한다고 되겠어요. 먹고 살기도 바쁘고, 공부할 시간도 없고. 공부할 머리도 안 될 걸요."

 "음…. 왜 그렇게 속단하는지 모르겠는데. 마법 배워본 적 있어요?"

 

 빈 찻잔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훑던 A가 곁눈질로 레오폴트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며칠만이라도 배워볼래요? 나한테."

 

 누구라도 뜻밖의 제안을 받으면 깜짝 놀라는 법이다. A 또한 그 순간 하마터면 손이 미끄러져 고스란히 찻잔 값을 물어줄 뻔했다.

 

* * *

 

 와이엇 윈프리드는 휴일이 다 저물고 나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내일부터는 상시 공연에 다시 임해야 하는 처지였음에도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이유는 여럿이었다. 우선 해가 떨어졌음에도 날이 춥지 않았다. 조금씩 돋아나는 풀냄새도 좋았고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따뜻하게 피부를 스치는 바람도 퍽 마음에 들었다. 꽃도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했다. 휴일을 통째로 투자한 데이트도 나쁘지 않았다. 비록 오전 동안엔 연인인 달리아 브라운의 포목점 일을 거들어야 했지만 휴일까지 지긋지긋한 직장 동료들과 칙칙한 숙소에서 얼굴 마주하고 있느니 차라리 사랑하는 사람의 일을 거드는 편이 기분이라도 화사했다. 오후부터는 달리아 또한 비번이었다. 저녁을 함께 들고 거리를 거닐었다. 꽃망울도 구경했다. 오랜만에 누리는 제대로 된 데이트였다. 와이엇은 이 완벽한 하루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좋은 기분에 휩쓸리기까지 해서 숙소 동료들에게 주겠답시고 술 몇 병에 간식거리까지 사들고 숙소에 들어섰다.

 

숙소의 불빛은 늘 그렇듯이 간신히 밝았다. 초를 밝히는 것 또한 돈이 드는 일이었다. 때문에 가난한 그들은 초 하나라도 아끼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비를 털어 술이며 안주거리를 사온 것이 무색하게 대다수의 룸메이트들은 이미 이층침대로 기어들어가 자고 있었다. 하기야 그럴 시간이었다. 아쉬운 마음이 없진 않았으나 밤늦은 데다 내일부터는 다시 상시 공연을 시작하니 잠을 택한 것이 합리적이라며 납득할 수 있었다. 그는 대부분이 잠에 빠진 가운데 숙소에 초를 켜둔 장본인이 아직 남아있으리라 짐작했다. 숙소 안을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어, 뭐야. 너 왜 안 자?"

 

 여섯 명 분의 옷이며 책이며 생활에 필요한 잡다한 묵건들을 한 데 모아둔 다목적실의 문을 밀어 열어젖혔다. 깨어있는 남은 한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어스름하게 밝힌 촛불 아래에서도 대충 누구인지 뒤통수만 보고 알 것 같았다. A는 그가 문을 여는 소리와 그에게 건넨 말 한 마디를 미처 듣지 못 한 것 같았다. 미동도 없이 책상 대용으로 엎어놓은 나무 상자 위로 거의 코를 박듯이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에 잔뜩 열중하고 있었다.

 

 "이게 이제 형이 하는 말에 대꾸도 안 해?"

 

 와이엇이 장난삼아 그의 허리를 자근자근 밟고 나서야 A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천천히 자신을 돌아보자, 술병이 담긴 종이봉투를 안고 있던 와이엇의 팔이 가늘고 짧게 떨렸다.

 

 "와, 씨. 뭐야. 뭐 하는데 그렇게 피곤해 보여?"

 

 험악한 말이 절로 튀어나올 만한 몰골이었다. 그가 책상을 대신하여 사용하고 있던 나무 상자 위로는 무언가가 잔뜩 적힌 종이가 널브러져 있었다. 와이엇은 종이봉투를 내려두고 종이 한 장을 집어 불빛에 비춰보았다. 별 소용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알파벳 나열과 별난 조합의 숫자가 종이 양면에 빼곡했다.

 

 "너 드디어 돈 건 아니지?"

 "아냐, 수학 비슷한 걸 누가 가르쳐줘서 배웠는데 생각보다 재밌어서 연습하다 보니까."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거야, 이런 걸?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는데."

 "그게 기초라는데."

 "…사람이 사칙연산이나 할 줄 알면 되지."

 

 계속 들여다보면 눈앞마저 깜깜해질 것 같아 그는 종이를 도로 나무 상자 위에 던져두었다. A는 제 옆에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는 와이엇은 쳐다보지 않고 그가 내던진 종이들을 그러모았다.

 

 "형은 뭐하느라 이제 왔어?"

 "달리아 일 도와주고 나서 데이트. 하루 종일!"

 "와…. 정말 괜히 물어봤다."

 "날씨가 따뜻하니 이 시간까지 돌아다녀도 무리 없고. 요즘 진짜 쉬는 날마다 살맛이 나."

 "아, 그런 데에서도 날씨가 여 영향을 미치는구나."

 "당연하지, 좋아하는 사람을 얼어 죽게 만들 거 아니면 해 떨어지기 전엔 해어져야 했다고. 전에는. 적당히 추우면 춥다는 걸 핑계로 붙어있기 좋긴 하지만…."

 "'적당히'가 아니었지, 그간의 슈니플로케는."

 

 A가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주며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자 와이엇 또한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A의 말을 되풀이했다. 영하20도는 '적당히'가 아니지. 생각만으로도 과거의 경험이 역류하는지 와이엇은 가늘게 진저리까지 쳤다.

 

 "그렇게 보면 스노우화이트는 진짜 대단한 마법사인 거야."

 "뭘 새삼스럽게. 그러니까 작위도 받고 하는 거 아니겠냐."

 "아니, 그냥 대단하다는 수준이 아니라 진짜 대단하다는 거야. 오늘 그리폰 집안 도련님하고 대화를 하다 깨달았는데, 신의 영역에 이른 마법사라니 스노우화이트 전까진 듣도 보도 못 했다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데?"

 

 A는 와이엇의 질문에 대답은 않고 나무 상자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한참 말없이 흔들리는 촛불을 들여다보다가 묵직한 입을 열었다.

 

 "그냥 그런 마법이 가능한 원리 같은 게 궁금해서."

 "별 게 다 궁금하다."

 "아니, 그렇지만 그런 생각이 좀 들잖아. 그런 대단한 마법을 쓰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나? 이런 기초 마법도 어느 정도 제약이 있는데."

 

상자 위에 적당히 그러모아두었던 종이들을 손등으로 가볍게 툭 치자, 텅 빈 상자가 작게 울렸다. 와이엇은 자신보다 일곱 살이 어린 A를 곁눈질로 한 번 쳐다보았다.

 

 "글쎄다, 있을 수도 있겠지. 탑이 출입금지니까 궁금해도 알아낼 길은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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