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연구가 완성된 이후의 자신을 여러 번 상상했다. 리히트 대학의 시계탑에서 내려다보는 프림데 시는 그녀의 고향에 비해 바라보는 경치가 좋진 못 했다. 가엾은 땅이다. 연민은 쉽게 차올랐다. 그 땅은 강수량이 줄어든지 너무도 오래되었다. 명석하다는 그리폰들이 이루지 못 할 꿈을 꿔야 할 만큼 오래되었다.
그녀는 시계탑 내부와 황야를 나누는 유리창을 새하얀 손끝으로 한 번 쓸었다. 구해야 할 땅은 저 너머에 있고 그 땅을 구할 지식은 그녀의 머릿속에 있었다. 남작은 리스크는 커도 좋다고 했다. 그 땅의 식수난을 해결할 수 있는 마법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갈아 넣을 수 있다고. 기후를 지배하는 마법이 신의 영역이라면 그 신의 영역에 닿을 때까지 지원해줄 의향이 있다는 의사도 밝혀왔다. 그 말을 믿고 연구를 진행해왔다. 그녀는 스스로를 시계탑 안에 가두었다. 공식과 씨름을 하며 30년을 보냈다.
그 새벽, 책 몇 권 분량을 꽉 채운 공식에 온점이 찍혔다. 30년의 결과물이 손아귀에 떨어졌다. 이것이 진정한 신의 영역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상식으로서 기후를 지배하는 마법을 구사하는 창조신을 알았다. 창조신이 구사하는 마법에 이렇게 큰 리스크가 필요할 리가 없었다. 이는 유사한 마법에 불과했다. 어쩌면 인간이 신의 영역을 탐한 것에 대한 마땅한 대가일지도 몰랐다.
리사 스노우화이트는 그 새벽, 모교의 시계탑에서 황야를 내려다보았다. 달은 하늘을 비롯하여 애 황량한 땅을 오롯이 지배하는 지배자처럼 하늘 가득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황야는 달빛을 받아 은은한 빛에 싸여있었다. 손끝으로 유리창을 쓸 때마다 손자국이 남았다. 그녀는 그녀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은 그리폰 남작을 생각했다. 정확하게는 그의 성품을 계산했다. 그리폰 일족의 역사를 되짚었고 그들이 고향땅을 떠나 인간의 영역으로 이주했던 근본적 원인을 떠올렸다. 더불어 루카스 그리폰이 이 땅을 위해 무엇을 얼마나 바칠 수 있을 사람인지, 그에게 중요한 것이 실리인지 윤리인지를 가늠했다.
황야의 달을 만지려는 듯이 유리창 위로 그녀의 손끝이 흘렀다. 아. 이 땅은 적어도 루카스 그리폰으로 인한 구원은 받지 못 할 땅이다. 그녀는 달빛을 머금은 저 유리창 너머의 풍경이 자신이 바라보는 마지막 황야이리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 * *
탑은 나선계단 이외의 공간이 없었다. 레오폴트는 창이 늘어선 벽과 평행한 반대편 벽에 붙어 A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계산하는 데에 가담하라는 말이 무색하게 레오폴트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선 협소한 공간만 빼고 계단 가득히 적힌 공식들을 내려다보며 난감하다는 듯이 제 턱을 어루만졌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가늠하기 위해 붉은 빛을 희미하게 내뿜는 글씨를 따라 공식을 복기했다.
초반엔 분명 그의 글씨체로 쓰인 공식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중반부부터는 뒤집혔다. A가 그의 계산을 지켜보다 공간 결계 공식을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감이 잡혔다고 말한 순간부터 A의 계산 속도가 월등히 빨라졌다.
이대로라면 30분 안 걸려 결계 공식이 뒤집힌다. 그는 이미 저만치 계단 아래로 멀어진 A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잡힌 깃펜 아래로 공식은 여전히 늘어지고 있었고 이럴 때 말을 건네는 건 별로 현명한 처사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 레오폴트 그리폰은 공식 도출에 도움이 안 됐다. 인간 마법사의 열 배에 달하는 코어 출력량을 자랑하는 이종족인 건 적어도 그들 남매에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출력량이 높아 봤자, 저렇게 재능이 따라주지 않으면 될 것도 안 됐다.
그는 A를 방치해두고, 결계를 구동시키는 장치를 찾는 편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공식을 뒤집는 데에 성공하더라도 장치를 조작하는 게 선결 과제였다. 발꿈치를 들어 최대한 공식이 지워지지 않도록 빈 공간을 찾아 밟았다. 마법에 제약이 있으니 그나마 마법에 특화한 이종족이라는 것조차 큰 메리트는 아니었다. 강제로 인간 체험 하는 기분이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공식의 첫머리까지 올랐다. 더 올라가다 보면, 아마도 계단을 내려가는 A와 마주치겠지. 그래도 이렇게 되면 어느 정도의 공간이 꼬여있는지도 알 수 있을 테고 혹시 여태껏 계단을 오르며 보지 못 했던 이상한 부분을 찾을 수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선계단에 그의 발소리가 정확한 소리를 내며 굴러다녔다. 창은 계단과 평행하게 났다. 계단을 아무리 올라가도 창밖의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늘 같은 높이의 종탑이 보이고 똑같이 높고 낮은 지붕들이 보였다. 계단 저 멀찍이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약 10분을 계단을 더 오르자, A가 있던 출발 지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특별한 것이 없을 수 있을까. 그는 미간 사이를 좁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통 이 정도 높이의 건물 하나를 통째로 보호할 만큼 큰 결계를 구동하는 마법 장치는 부피를 많이 차지했다. 티가 나지 않게 숨기는 것이 관건이라지만, 이 정도로 아무런 티가 나지 않는 건 유례가 없었다. 리사 스노우화이트는 그 유례를 깰 만큼 결계에 특별히 해박한 마법사는 아닐 터였다…….
그는 다시 마주친 A의 머리를 한 번 가볍게 쓰다듬어주고―어차피 집중하느라 눈앞에 쥐가 한 마리 툭 튀어나온다고 해도 알아차리지 못 할 것처럼 보였다.― 그가 바닥에 적은 공식이 날아가지 않게 보호하기 위해 처음으로 본 모습으로 돌아가 공식 위를 미끄러지듯이 날았다. 복도는 사람이 열 명은 지나갈 가로 넓이였으나 천장 높이가 높지 못 했다. 머리를 잔뜩 숙이고 공식의 첫 머리까지 나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공식의 첫 머리에서 다시 계단에 발을 딛고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후, 어깨와 목 부근을 툭툭 두드리며 다시 한 번 주변을 돌아보았다. 한 쪽 벽면엔 바깥으로 난 창문, 그 맞은편은 등불이 흔들렸다. 벽은 금이 간 구석이 없이 깔끔했고, 저 멀리서 또 몇 번인가 종이 울려왔다.
그는 창가로 바짝 다가가 밖으로 몸을 내밀어보았다. 높은 곳에 흔히 부는 칼바람이 그의 붉은 머리칼을 가볍게 스쳤다. 이 공간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모든 오브젝트 중에서 이만큼 큰 결계를 구동할 수 있을 만큼 크고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레오! 이러면 뒤집힌 거 아니에요? 잠깐 여기 와 봐요!”
목소리는 위에서 들렸다. 공간이 꼬여있으니 당연했다. 그는 머리칼을 정리한 후, 계단을 두 세 개씩 건너 뛰어가며 A가 선 곳까지 올랐다. 바닥을 가득 메운 공식엔 마무리를 뜻하는 온점이 찍혀있었다. 공식은 조금 전, 그의 날갯짓으로 등불이 몇 개 꺼졌음에도 불구하고 희미하고 붉게 빛났다. 깃펜에 걸린 마법이 아직 유효한 덕택이었다. 그는 자처했듯이 공식을 뒤집어 마법을 해제하는 재주에 유독 약했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시야가 닿고 지식이 닿는 한도 내에서 공식에 불합리가 없음은 확실했다.
“걸리는 건 없어요, 합리적이에요. 시도해 볼 만 하겠어요.”
“아닐 수도 있다는 거네요.”
“제가 부족해서 확인할 길이 없을 뿐이에요…. 마법을 뒤집는 건 특기가 아니니까.”
이런 곳에서 동행의 사기를 떨어트려 좋을 것 하나 없음을 레오폴트는 알았다. 그는 격려하듯이 A의 어깨를 연이어 토닥여주었다.
“그나저나 아델, 혹시 이곳 교회는 지은 지 오래된 건물인가요?”
“그건 왜요? 되게 뜬금없는 질문이네요.”
“아는 대로만 대답해줘요. 오래됐어요? 5년 이상?”
A의 미간 사이가 좁아졌다. 열일곱 앳된 얼굴엔 별로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5년 안 됐을걸요. 저거 짓던 해가 영원의 탑이 완공됐던 해니까, 스노우화이트의 집권 기간을 생각하면…….”
“마법 어떻게 쓰는지 기억해요?”
“어제 가르쳐준 걸 잊어버릴 리 없잖아요.”
“좋은 동행이네요. 역시 아델을 데려오기 잘 했어요.”
레오폴트는 한 번 더 A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바로 옆에 난 창틀 위로 올랐다. 창은 높지 않았다. 그가 균형을 잡고 몸을 숙여 앉기만 해도 가득 찰 정도의 크기였다. A는 깜짝 놀라 레오폴트의 팔을 붙들었다. 미쳤어요? 상대의 신분조차 까맣게 잊고 소리를 질렀다. 팔을 붙든 손에도 힘이 제법 들어갔다. 레오폴트는 머리 위를 한 번 확인하여 창문의 높이를 가늠하기에 바빴다. 가늠이 끝나자, 제 팔을 거의 으스러뜨릴 것처럼 부여잡고 있는 A의 손을 떼어냈다.
“방금 아델이 계산한 공식을 사용하는 거예요. 소리를 내든, 암산이든 상관없어요. 그러면 아델의 코어가 반응할 거고, 맞는 공식이라면 결계 가동이 멈출 겁니다. 오래는 유지하지 말아요. 무리하게 무거운 마법을 과하게 사용하면 심정지로 죽을 수 있으니까.”
“뭐 하려고요? 설령 공식이 맞았다고 쳐도, 이제 마법 장치를 찾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마도 마법 장치는 교회 종탑에 걸린 종입니다. 이 탑 정도 되는 크기의 결계를 구동할 수 있으려면 장치가 꽤 커야 하는데, 여기서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가장 큰 오브젝트는 창밖의 종탑뿐이니까. 소리를 매개로 결계를 유지하는 공식은 기존에 꽤 많이 나와 있어요. 그걸 응용한다면 마법 장치를 결계로 보호할 장소로부터 멀리 떼어놓는다는 발상도 할 만 하죠. 바깥 풍경인 것처럼 속여 티 나지 않게 숨길 만 하고. …사실 모 아니면 도, 뭐, 그런 거예요.”
아이고, 신이시여. A의 입술 사이로 그런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런 소리가 나올 만 하다고 레오폴트 또한 생각했다. 물증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오로지 심증만으로 도박을 걸어보겠다는 소리에 불과했다. 고작 실낱같은 가능성 때문에 멀쩡한 교회 종탑을 부수겠다니 스케일이 커도 너무 커졌다.
그러나 하지 않는다는 선택지 또한 없었다. A는 이런 탑에서 레오폴트 그리폰과 함께 굶어죽을 의사가 없다고 명확히 밝혔고 그건 레오폴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죽고 싶어서 이 눈꽃의 도시를 찾은 게 아니었다.
“추측이 틀리면 우리 정말 천벌 받을 거예요. 창조신이시여, 이 모든 불경죄는 이 정신 나간 귀족 가문 도련님께서 하셨다는 것만 알아주소서….”
“하하, 무슨 소리예요? 결계를 푸는 순간 아델도 공범인데.”
“빌어먹을! 몰라, 전 설령 중앙 정부에 끌려가도 다 당신 탓 할 거예요!”
A는 폐부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공식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기나긴 공식의 끝이 다가오자 창가에 앉은 사내의 모습은 바람에 녹아 사라지고 단지 한 마리의 기괴한 생명체만이 밤하늘을 활강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 *
고요한 도시가 한 번 크게 진동했다. 이 땅의 사람들은 도시를 파묻을 듯이 내리는 눈발에는 익숙해도 넓은 범위를 나풀거리며 부유하는 흙먼지에 익숙하진 않았다. 리사 스노우화이트는 그로부터 프림데 시를 떠나온 지금도 비슷한 구조의 탑 안에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얼어붙은 땅과 탑 안을 가르는 유리창이 지저분하지 않았고 방 안 가득 돌아가던 태엽 대신 불길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가득 굴러다닌다는 점만이 달랐다. 벽을 따라 책장이 둘러쳤고, 제목도 붙지 않은 책의 등표지가 가지런히 늘어선 공간이었다. 자정이 넘어가면 골목마다 선 가스등에도 불빛이 스러지는데 큰 소동에 벌써부터 가스등을 점화하는 소년소녀들의 자전거가 굴러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거리마다 조금씩 불이 밝았다. 희미한 가스등 불빛 아래에 어른거리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흐름을 이루며 도시 외곽, 교회를 향해 흘렀다. 그녀는 거리를 점점이 메운 사람들을 만져보고 싶은 것처럼 유리창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끝과 유리가 맞물려 내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동시에 나선 계단과 그녀의 공간을 유리시키는 문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리사 스노우화이트는 돌아보지 않았다. 탑의 최상층에 설치된 화로로 올라가는 계단은 그녀의 곁에서 뻗어 올라가고 있었다. 종탑을 부수고 들이닥친 불청객의 모습은 영원한 석양이 흐르는 유리창 위에 비쳤다.
“남작께서 직접 오시진 않았군요.”
“바쁘시니까.”
레오폴트 그리폰의 대답은 간결했다. 레오폴트의 뒤로 거의 숨다시피 하여 공간에 들어선 A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는 수밖에 없었다. 창 너머로, 풍선은 여전히 바람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스노우화이트가 돌아보았다. A는 레오폴트의 어깨 너머로나마 그녀를 처음으로 대면한 셈이었다. 고작해야 극단에서 아동을 위한 인형극 조금 한다는 그가 이 도시를 지킨다는 영주를 이만큼 가까이서 볼 일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그녀와 레오폴트 그리폰이 구면임을 그들의 대화와 오고 가는 눈빛을 통해 알았다.
“중앙 정부에 구태여 불경죄로 그대들을 고발하진 않겠습니다.”
“저는 당신을 고발하러 왔는데, 이것 참 마음이 통하지 않아 아쉽습니다.”
“돌아가세요. 황야를 구할 수 있는 마법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으니.”
“없으리라는 걸 예감하고 왔습니다. 당신의 기후 조작 마법엔 사람 목숨이 대가로 들어갈 테고, 아무리 인간과 무관한 이종족이라고 해도 지키기로 약속한 백성을 불에 태워서 마법을 유지할 만큼 도리를 모르진 않아서요.”
소리를 내도 좋을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A의 입술 사이로 숨이 턱, 막힌 것 같은 의아함이 어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붙들고 있던 레오폴트의 옷자락을 더 세게 그러쥐고 흔들었다. 대체 무슨 소리예요? 잇새로 간신히 성량을 잔뜩 죽여 묻자, 레오폴트는 제 뒤에 숨은 A를 반쯤 돌아다보았다. 그 얼굴에 그만큼 쓴 맛이 배어나는 미소가 일렁이는 것은 A로서는 처음 보았다. 별로 어울리는 표정이 아니라는 감상이 불쑥 머릿속에 떠올랐다.
“슈니플로케는 원래도 실종 사건이 많았다고 했었죠. 기후가 추워서 식량 사정이 좋지 않고, 사람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아이를 버리러 가거나 타 지역에 팔아치우는 일이 잦다고.”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당신은 오늘 있었던 실종 사건도 몰려든 사람들은 웬만큼 전부 외지인이고, 정작 당신 같은 슈니플로케 출신들은 놀랄 일이 아니라고도 했어요. 그렇지만 아델, 그건 앞뒤가 맞지 않아요. 스노우화이트가 집권하고 기온이 따뜻해진 게 몇 년인데, 어째서 아직까지도 슈니플로케에서 실종이 빈발하죠? 연극이 활성화 할 만큼 경제 사정이 좋아졌는데도, 아이를 버리고 팔아치우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다고요?”
레오폴트는 A의 손을 한 번 더 떼어내었다.
“당신이 공범이라고는 생각 안 해요.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어요. 그렇게 생각했다면 이틀이나 데리고 다니진 않았죠. 당신은 쉬는 날에도 좀처럼 극단 밖에 나가지 않는 사람이고 이런 일에 연루되기엔 지나치게 어리고 여려요. 스노우화이트와 공모한 건 당신을 제외한 슈니플로케의 모든 어른들이예요. 당신 말대로 팔아치울 수 있는 아이가 있다면 전부 팔아치운 거죠. 리사 스노우화이트에게….”
마치 신호처럼 투박한 소리가 인간의 생살을 먹이로 삼아 불길이 타오르는 소리를 한 번 크게 가로질렀다. 레오폴트가 반사적으로 A를 밀었다. 그들 사이에 딱 한 보(步)만큼의 거리가 벌어졌다. 레오폴트의 뺨에 붉고 가는 선이 새겨졌다. 얕은 생채기에서 조금씩 피가 배어났다. A는 다치지 않았다. 그의 뺨에 상처를 새기고 날아든 얼음 조각은 레오폴트가 A를 밀어낸 덕택에 A의 구두코 앞에 떨어져 박혔다. A는 눈 깜짝할 새에 녹아 형태를 잃은 얼음 조각과 레오폴트, 그 너머의 리사 스노우화이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결계 공식을 뒤집을 때보다도 더 한 과부하가 올 것 같았다. 레오폴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리사 스노우화이트의 마법이 날아들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틀 전까지만 해도 극단 숙소에서 아무 걱정 없이 봄을 누리던 A라도 알 것 같았다.
“…살벌도 하셔라.”
레오폴트는 제 뒤에 숨기듯이 A의 앞을 가로막고 섰고, 자연스럽게 스노우화이트와 대면했다.
“웬만하면 교전 없이 수도까지 가주셨으면 하는데요. 알아서 중앙 정부에 자수해주시지 않으시면 많은 사람들이 곤란해집니다. 아마 당신도 곤란해질 거예요.”
그녀가 등지고 선 창 너머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하얀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그림자는 그녀의 표정과 눈빛에 담긴 감정의 톤을 죽였다. A는 긴 속눈썹 아래로 가린 리사 스노우화이트의 눈동자와 그녀의 뒤로 그림처럼 번진 석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녀가 시선을 들자 창문과 평행한 방향으로 날카로운 형태의 얼음이 얼었다.
“가장 곤란해지는 건 이 땅의 백성들입니다. 우리에겐 봄이 필요해요. 부모가 없는 아이들, 혹은 부모가 버린 아이들을 대가로 삼는 한이 있어도. 당신들은 모르는 고통이 이 땅에는 수 백 년 되풀이되어 왔습니다.”
“…당신에겐 미안해요. 30년 동안 우리가 당신에게 지나친 것을 요구했다는 걸 이제야 알겠습니다. 아무리 당신 스스로가 자청한 일이었다고 쳐도 지나친 세월이었어요. 책 몇 권에 달하는 공식에 매달려가며 ‘백성의 구원자’라는 자아상에 취해있기에는.”
“당신들은 황야를 구할 생각이 없고, 난 얼어붙은 이 땅을 구할 의사가 있습니다. 우리의 길은 거기서 갈라졌어요. 당신들이 내게 많은 투자를 했음은 인정하지만, 당신이 말했듯이 내가 이 마법을 연구 지원 당시 약속했던 대로 루카스 그리폰에게 가져다 바쳤다 해도 당신들은 마법을 활용하지 못 했을 거예요. 난 백성을 구하고 싶어서 이 마법에 30년을 투자했고, 쓰이지 않은 채로 사장되는 것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의 위선 때문에.”
“그래서 프림데 시에서 도망쳤고, 구원자 놀이를 할 무대를 고향인 슈니플로케로 바꾸셨다? 하하, 이런. 이러고 있으니 누가 이종족이고 누가 인간인지 모르겠네.”
얼음은 날선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로질렀고, A를 숨기고 있던 그림자는 단번에 몸집을 불렸다.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고 눈이 꾹 감겼다. 아델. 그의 앞을 가로막은 짐승의 날개는 그가 종탑을 부수기 위해 날았을 때보다 훨씬 거대한 크기로 뻗어있었다. 결코 사람의 형태라고 할 수 없을 커다란 덩치의 이종족은 그가 익히 아는 목소리로 다만 그의 가명을 두 자 새겨 불렀을 뿐이다. 박힌 얼음을 털어내기 위해 날갯죽지는 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고, 그것이야 말로 일종의 신호처럼 느껴졌다. A는 그리폰의 날개가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를 틈 타 그가 움직일 수 있는 최선의 속도로 내달렸다. 목표는 리사 스노우화이트가 곁에서 지키고 선 마지막 나선 계단이었다. 화로를 꺼야 한다. 저게 있는 한 슈니플로케는 계속해서 사람을 잡아먹는 땅일 터다.
스노우화이트의 반사 신경은 가히 무시할 만한 수준이 못 되었다. A가 그림자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의 눈동자가 무섭게 A의 움직임을 쫓았다. 얼음이 어는 것은 눈을 두 번 깜빡일 정도의 찰나였다. 다만 얼음의 날카로운 끝이 A를 향하는 데에 찰나의 시간보다 조금 더 한 시간이 걸렸다. 이 넓은 공간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는 크기의 그리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스노우화이트에게 접근하여 그녀의 중심을 무너트렸다. 아델이 계단의 첫머리에 간신히 이르고, 그녀의 어깻죽지가 딱딱한 발굽 아래 짓이겨지는 데까지 걸린 시간을 합해도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폰이 움직인 동선을 따라 짙은 색의 핏자국이 상당한 두께의 선으로 남았다.
“올라가서 불길 잡아요. 방법은 결계 푸는 방식 하고 똑같아.”
A는 창백한 얼굴로 그리폰의 찢긴 날개를 쳐다보다가 딱딱하게 굳은 목 관절을 이용하여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는 모든 체력을 들이부어 계단을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 * *
“미친 새끼가, 이거 안 놔? 이젠 머리가 너무 멍청해져서 꺼지라는 말도 이해가 안 돼?”
“아, 헌터 양. 너무 그러지 마시고. 가엾고 무능한 사람 하나 구한다 치시고 한 번만 부탁합시다.”
탑으로 통하는 입구까지도 보초병 하나 서 있지 않은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와이엇 윈프리드는 왼손으로 꾹 붙들고 있던 타인의 손을 놓고 남은 손에 들고 있던 등불을 껐다. 도시 외곽 방향을 한 번 크게 둘러보았다. 하기야 오밤중에 느닷없이 교회가 박살이 났다고 하니, 이 자그마한 도시가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병력이 교회로 몰려가도 이상할 건 하나 없었다.
“애새끼 하나 없어졌다고 내가 여기까지 와야 해?”
“그럼 애가 없어졌는데 편히 발 뻗고 자냐?”
“누가 보면 아주 네 새끼인 줄 알겠어.”
그의 뒤를 두 세 보 떨어져 따라붙었던 여자 또한 제 손에 들린 등불을 불어 끈 후,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겼다. 영원의 불길이 딱 광장의 공간만큼만 밝히는 진득한 석양을 머리부터 뒤집어쓰니 그녀의 머리칼은 한층 더 그녀의 이름과 어우러졌다. 로즈 헌터. 극단엔 마법은 쓸 줄 몰라도 마력 코어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사람들이 더러 있었고, 그녀 또한 그런 부류였다. 그녀는 등불을 탑의 입구 옆에 내려둔 후 오렌지색의 눈동자를 그 풍성한 속눈썹 아래로 반쯤 가려내며 손에 달랑거리며 들고 온 종이 몇 장을 넘겨보았다. 미간 사이엔 가는 주름이 잡혔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혀를 차고 로즈는 종이를 든 손을 도로 떨어트렸다.
“지키는 놈도 없는데 그냥 뛰어 올라가지? 순간이동은 무슨. 알아먹지도 못하겠는데.”
“뭐야, A는 뭐 보니까 금방 이해하고 그러던데. 마법사들은 다 그런 거 아니었어?”
“그럼 그 새끼 머리에는 뭐 뇌 대신 주판이라도 들어있나 보지.”
로즈는 습관적으로 입고 있는 면 원피스에 달린 주머니를 찾았으나 주머니는 텅 비어있었다. 이 요란스러운 사내 때문에 자다가 잠옷도 채 못 갈아입고 나왔으니 담배라고 챙겨 나올 겨를이 있었을 리 없었다.
요란스럽게 큰일이 났다며 자는 사람 억지로 깨워 끌고 나오더니, 그녀로서는 흥미가 떨어져도 몇 달 전에 똑 떨어진 어린애 하나가 없어졌다고 했다. 잠 깬 김에 웬 계산이나 좀 해달라고 지저분한 종이 몇 장을 그녀의 얼굴 앞에 쑥 내밀었다. a를 쓰는 방법이 독특해 금세 그놈의 사라졌다는 ‘애새끼’가 쓴 문서임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엔 무슨 유서라도 되는 줄 알고 로즈의 시선 또한 그녀 나름대로 급하게 움직였다. 물론 종이의 첫머리에 달린 단어를 읽는 순간 아주 조금이나마 일었던 조급한 마음은 차갑게 식었다. 기초 마법, 순간이동. 그 다음부터는 공간 좌표를 계산하는 공식과 포함시킬 범위를 계산하는 공식을 적합하게 붙여놓은 공식 몇 줄이 반복적으로 적혀있었다. 그 다음, 마법 카피. 한 번 밖에 카피해내지 못 하지만, 괜찮은 방법임. 그런 식으로 마법에 대한 설명이 첫머리에 붙고, 공식을 되풀이 하여 적고 계산하며 연습한 흔적이 전부였다. 도대체 얘는 하라는 연극 전향은 안 하고 대체 뭘 하는 거람, 로즈 헌터는 오랜만에 A를 생각하며 지극히 사적인 감정을 담아 그렇게 투덜거렸다.
너도 마법사잖아. 이거 계산하면 쓸 수 있는 거 아냐? 그녀의 면전에 종이를 들이민 장본인은 눈을 연신 깜빡여대며 그렇게 물었다. 대본 외우는 것 외엔 잘 하는 게 없는 놈인 건 알았지만 머리가 이렇게 안 돌아가는 놈인 줄은 몰랐는데. 하자면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했지만―그녀는 도대체 눈앞의 와이엇 윈프리드가 이런 애들도 이해할 공식을 독해조차 하지 못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순순히 해주고 싶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누구라도 자는 것을 억지로 깨우면 없던 심술까지도 깨어나는 법이다.
그러나 추진력에 있어 그녀는 와이엇을 이길 수 없었다. 그녀가 꺼지라고 하는 소리는 전혀 듣지 못 했다는 듯이 그녀의 오른손에 종이와 등불을 들렸다. 그 후 로즈의 남은 왼손을 붙들고 탑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 미친놈이 어린애 하나 실종됐다고 영주님한테 읍소라도 하러 갈 생각인가? 시내를 가로지르며 머릿속에 가득 찬 비뚤어진 생각은 여전히 로즈의 안에서 유효했다. 로즈는 기어이 탑의 입구까지 도착한 지금까지도 사라진 아이를 찾겠다면서 영원의 탑으로 대뜸 내달린 와이엇 윈프리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걸어 올라가면 오래 걸리잖아. 탑 안엔 보초병 있을 수도 있고.”
“아니, 걔가 왜 여기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근거가 뭐야, 근거가.”
“어젯밤에 스노우화이트 남작의 마법에 대해 신의 영역이니 대단하니 원리가 궁금하니 어쩌고 떠들어댔는데 혹시나 겁도 없이 남작님 계신 데까지 물어보러 쳐들어갔다가 잡혔나 싶어서.”
“…A가 그럴 만큼 겁을 상실한 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럼 어떡해. 여기 말곤 짚이는 데가 없는데. 조금만 찾아보고 가자. 아, 너도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면 마음 불편할 거 아냐.”
탑의 입구 앞에 서서 고개만 빠끔히 넣어 나선계단의 인기척을 살피던 와이엇이 로즈를 돌아보며 보챘다. 하여간 좀처럼 정신연령이 성장하질 않는 남자다.
“귀찮으니 한 번에 꼭대기까지 올라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 걸리면 나도 모르고.”
한 번 더 공식이 적힌 종이를 눈으로 가볍게 훑어내며 와이엇 윈프리드의 손을 낚아채어 쥐었다.
* * *
나선 계단의 끝까지 단 번에 내달리자 숨이 턱 끝까지 찼다. 심호흡을 해도 숨을 쉬는 것이 녹록하지가 않았다. 사람 키보다 더 큰 높이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만큼 휘몰아치는 연기의 양도 무시할 수 없었다. 들숨이 들어올 때마다 폐부에서 숨이 컥, 막혀 날숨이 아닌 기침이 터져 나왔다. A는 팔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별반 소용이 없는 행동이었다. 매캐한 연기로 인해 속눈썹 아래로 눈물이 고여 금방이라도 후둑 떨어질 것 같았다. 시야가 흐려지는 건 곤란했다. 지금부터는 혼자서 많은 작업을 해내야 했다. 불길을 작동시키는 장치를 찾아 부수고, 이 시야를 방해하는 연기를 없애려면 우선 잠시라도 불길을 멈추도록 공식을….
그는 주변에서 최대한 눈에 띄는 오브젝트를 찾다가 문득 눈동자를 굴리는 것을 멈추었다.
그는 영원의 불길을 작동시키는 공식을 몰랐다. 모르면 뒤집을 수 없다. 그보다 안다고 쳐도 30년에 걸쳐 만들었다는 공식을 그가 단 몇 분 안에 뒤집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앞에 유사가 붙어야 할 만큼 리스크가 비인도적이긴 해도, 기후 조절 마법은 180년 인생을 전부 바쳐도 이를 수 없다는 신의 영역에 가까운 마법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소리가 날 만큼 세게 깨물었다. 피가 꽤 배어났다. 그래도 어쨌든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레오폴트 그리폰이 산 채로 날개를 찢어먹어 가며 만들어준 기회를 공으로 날릴 순 없었다.
무엇보다도 버려졌다는 이유만으로 산 채로 태워지는 아이들이 더 없어야 한다고 A는 생각했다. 그게 사실은 괜찮지 않은 상처임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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