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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ror No.9/Mirror No.9 1부

Mirror No.9 1-1. Snowwhite(完)

 와이엇 윈프리드에게는 웬만하면 약점을 잡혀서 좋을 게 없다는 말이 극단에 꽤 오랫동안 떠다녔다. 말을 만든 게 누구인진 몰라도 로즈 헌터는 제작년 말부터 그 말이 신빙성이 있음을 체감하고 있었다. 딱 한 번 무대에서 선배의 드레스 자락을 밟고 넘어졌을 뿐인데 그는 그 사소한 실수를 지금까지 들먹이며 놀려대기 바빴다. 그 이후 로즈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그의 앞에선 절대 실수하는 일 없으리라 몇 날 며칠을 다짐했더랬다. 그러나 그러한 결심은 하기는 쉽고 이루기는 어렵다. 아무리 처음이었다고는 해도 호언장담을 했는데, 예상과 다른 곳에 떨어져버리다니 이는 또 몇 년 와이엇이 그녀를 놀리며 괴롭힐 만한 사안이었다. 공식 대입은 꽤 잘 했지만 암산이 틀렸다. 물론 다행히 거하게 엇나가지는 않았다. 창은 깨졌고 핏자국은 만연했지만 불길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더없이 가깝게 들려왔다. 마치 천장 하나 사이에 두고 화로가 타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난 교회가 박살났다고 들었지, 영원의 탑이 박살났다는 소린 못 들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래, 이게.”

 

 로즈는 깨진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발목까지 오는 긴 면 치마가 바람의 방향을 그려내듯이 흩날렸다. 머리칼을 한 손으로 눌러 쓸어 넘기고, 탑 안으로 걸음을 물렸다. 신발 밑창에 아직 덜 마른 핏자국과 함께 커다란 깃털이 달라붙었다. 으. 그녀가 신발에서 깃털을 떼어내어 깨친 창문 밖으로 내던졌을 때, 와이엇이 그녀의 이름을 길게 소리 내어 불렀다.

 

 “로즈, 너 이 정도 되는 건 이해 못 하지?”

 

 와이엇은 한 손으로 붉은 표지로 장식한 책의 첫 머리를 펼쳐 들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 글씨까지는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로즈는 문가에서 가장 가까운 책장을 향해 사뿐한 발걸음을 옮겼다. 와이엇과 반 보 정도의 거리를 두고 책을 향해 고개를 가득 숙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종이와 같은 종류의 공식이 적혀 있었으나, 그녀의 미간 사이에는 종이를 읽을 때보다 더 깊은 주름이 올라왔다. 영원의 불길을 계산하는 공식임은 틀림없었다. 첫머리 제목 정도는 이해할 만 했다. 뭐야, 이게. 그에게서 빼앗다시피 책을 건네받고 책장을 훑듯이 빠르게 넘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수식이 적혀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에도 온점은 찍혀있지 않았다.

 

 “뭐야, 공식이 안 끝나는데. …설마 이 책장들이 전부 한 가지 공식이라고? 눈 돌아가네. 난 마법사 하래도 못 하겠다.”

 “야, 아냐. 저기부터는 책 등표지 색이 다른데. 저기부터는 다른 거 아니야?”

 

 와이엇의 손가락이 가리킨 끝부터 푸르스름한 등표지의 책이 책장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로즈 헌터는 그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똑바로 걸었다. 푸르스름한 표지의 책을 뽑아들었다. 제목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녀로서는 책장을 넘겨도 알아들을 수 없는 수식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첫 머리 정도만 이해해도 공식의 사용 용도는 대충 알아차릴 법 했다. 공식은 처음부터 정확하게 불길을 계산하는 공식을 뒤집어 놓았다. 본 공식과 정확히 똑같이 책 장 세 개 분량의 공식이었다. 온점은 찍혀 있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전혀 모르겠네. 애초에 스노우화이트는 어디에 있는 거야? 있어야 할 양반은 없고, 마법만 덩그러니 남아있고, 애는 없어졌고, 여긴 온통 피바다고.”

 

 로즈가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어 책을 덮으려 하자 와이엇이 손을 뻗어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혹시 모르니까 너 그거 좀 계산해 보면 안 되냐? 그, 뭐야. 대입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수학 같은 거지?”

 “사칙연산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한테 뭘 시키려는 거야? 뭣보다 영원의 불길을 멈춰서 뭘 어쩌게.”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뭐 그런 건데.”

 

 와이엇은 천장을 한 번 눈짓으로 가리켰다.

 

 “혹시나 얘가 저기 있으면 불길이 타고 있음 안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위가 어떤 구조인진 몰라도 밖에서 봤을 때도 엄청 밝으니까 어마무지하게 큰 불길이 타고 있는 거 아냐? 그런 불길이 코앞에 있으면 사람은커녕 앞뒤 분간도 안 갈걸. 그냥 한 몇 십 초라도 끌 수 있으면, 애만 찾고 후다닥 나오면 좋겠다 싶어서.”

 “아주 시급도 안 주시고 알차게도 부려먹으시네요, 윈프리드 씨. 극단 오너한테 배울 게 없어서 그딴 걸 배워왔냐?”

 “안 되면 말고, 되면 좋고, 라고 했잖아! 뭐, 과장 좀 보태서 A도 하루아침에 하는 걸 천하의 로즈 헌터 씨가 못 한다면야….”

 “이게 말이면 다인 줄 아나….”

 

 말다툼은 더 이어지지 못 했다. 창가 근처에 얼추 아치형을 그리며 흐트러져 있던 유리 조각을 육중한 무언가가 밟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둘 모두 발화(發話)를 멈추고 창가를 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침입한 것이었고, 혹시나 스노우화이트 남작이라도 돌아왔다간 고스란히 감옥에 끌려간대도 할 말이 없었다.

 

 창가로 드는 불을 온통 가릴 만큼 커다란 그림자는 금세 사람 정도의 크기로 줄었다. 이종족? 목소리가 먼저 터져 나온 것은 로즈 헌터 쪽이었고 얼었던 몸이 먼저 풀린 것은 와이엇 윈프리드였다. 그는 앞으로 쓰러지는 레오폴트 그리폰을 깜짝 놀라 튀어나가 받아냈고, 덕택에 그가 깨진 유리 조각 위로 엎어지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었다.

 

 “아는 사람이야?”

 “아니, 모르는 사람인데. 근데 이종족이 이런 차림새면 그, 뭐야. 오너가 말하던 그 사람 아니야? 극단 후원 귀족? 이종족이랬잖아?”

 “아니, 그 사람이 왜 여기서 이런 꼴로 나와?”

 

 로즈는 발끝을 들어 와이엇의 품 안으로 쓰러진 레오폴트를 건드려보았다. 한 번 툭, 건드렸을 뿐임에도 신발 코에 피가 배어나는 것이 영 심상치가 않았다. 죽은 거 아냐? 그가 들을 수 있는 상태인지 듣지 못 할 상태인지조차 가늠이 되지 않아 예의도 잊고 말씨는 쉽게 폭주했다. 아가씨. 로즈가 그를 가까이서 살피기 위해 몸을 숙이자 그녀의 입에서 짧고 가벼운 비명이 새었다. 피에 젖은 손길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기 때문이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입 좀 빌려주실 수 있으실지.”

 

 레오폴트의 눈동자는 똑바로 로즈 헌터의 오렌지 빛깔의 눈동자를 직시하고 있었다.

 

* * *

 

 화로 근처엔 더욱이나 눈에 띌 만한 오브젝트가 없었다. A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팔을 휘적이며 공간 안에 걸리는 물체는 없는지를 확인했다. 손등에 무언가 부딪히고 걸렸다 싶으면 대다수 화로였다. 설마 화로 자체가 마법을 구동시키는 장치는 아닐 텐데. 공간을 한 바퀴 다 돌도록 아무 것도 걸리지 않으니 없던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아래층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가늠할 길조차 없었다. 레오폴트 그리폰은 교전 시작부터 꽤 큰 부상을 안고 시작했다. 그건 온전히 A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으므로 A에게 책임이 있었다. 그 부상으로 인해 그가 리사 스노우화이트에게 패배했다면 A의 안전 또한 보장받을 길이 없었다. 바라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건 상당한 절박함을 몰고 왔다.

 

 그 때, 그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지나치게 놀라 있는 힘껏 뿌리친 후 한 걸음 물리려는데 발이 허공을 굴렀다. 아. 연기를 빼야 하니 당연하게 이곳은 하늘과 탑을 가르는 벽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 손길이 그의 허리를 가볍게 붙들어 안지 않았더라면 고작 열일곱의 나이로 하마터면 세상을 하직할 뻔했다.

 

 “정신 똑바로 안 차리지, 앞도 안 보이는 마당에 죽으려고 돌아다니고 있어?”

 “…왜 형이 거기서 나와?! 놀랐잖아!”

 “이건 찾으러 와도 난리야.”

 

 와이엇 윈프리드 또한 그를 붙들어 안아놓고도 상당히 놀란 것이 분명해보였다. 연기로 인하여 연이어 기침이 터져 나오는 것과는 별개로 손에서 식은땀이 배어나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불길 곧 멈출 거야.”

 “어떻게 멈춰? 공식은?”

 “어이고, 이틀 사이에 마법사 다 되셨네. 계산은 그 이종족 도련님이 하시고 마법은 로즈가 쓸 거야. 그 사람이 계산한 공식을 로즈가 고스란히 읊는 방식으로. 일단 본인이 마법을 쓰실 상태가 아니라서.”

 “로즈 누나는 또 어쩌다….”

 “아, 나중에 설명해. 불길이 멈추는 건 고작 해봐야 3분이라는데. 뭐, 그 사이에 부숴야 한다며. 찾았어?”

 “찾았으면 돌아다녔겠어?”

 “아이고, 무능해라. 뭐, 엄청 눈에 띄게 표시를 해뒀다는데 그걸 못 찾아?”

 “보여야 찾지, 젠장. 눈으로 봐야 아는 표시면 이 상황에 내가 알 바 아니잖아.”

 “아, 그러네. 총체적 난국이로군. 불길 꺼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네.”

 

 연기는 바람의 결을 따라 휘몰아쳤다. 불길의 크기가 줄어들고 있음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명확했다. A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꾹꾹 훔치며 와이엇이 전한 레오폴트의 전언을 말없이 되짚었다. 눈에 띄게 표시를 해두었다는 말이 가시처럼 턱 걸려 가시질 않았다. 레오폴트는 이곳에 올라오지 않았다. 와이엇의 말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부상으로 인해 올라오지 못 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다. 올라오지 않은 곳에 대체 무슨 수로 표시를 해두었다는 말인가?

 

 “궁금하시거든 저와 풍선이라도 찾으러 갈까요?”

 

 불길이 잡히자, 그 때에서야 화로 주변의 구조가 한 눈에 들어왔다. 뾰족한 지붕 모양으로 솟은 유리 천장 위로 밤하늘이 함빡 배었고, 유리가 한 데 모이는 곳은 딱딱한 무언가로 가려져 있었다. 분명 어떤 커다란 장식의 밑면이었다. A는 와이엇의 손을 붙들고 탑의 외곽까지 거의 날듯이 뛰었다. 와이엇이 짚이는 구석이라도 있느냐며 희망에 차 묻는 질문은 가볍게 묵살했다. 탑 바깥을 내다보자, 눈꽃 모양의 풍선은 여전히 뾰족한 탑의 처마에 걸려있었다. 고개를 들어 유리 지붕을 확인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아예 탑의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지붕의 경사면을 따라 시선을 쭉 위로 들어올렸다. 높은 탑의 구조상 광장에서 올려다 볼 땐 보이지 않았던 오브젝트가 저 높이 솟은 뾰족한 지붕 끝에 서 있었다. 커다란 십자가의 형태를 한 오브젝트 끝에 눈꽃 모양의 풍선의 실이 엉켜 하늘거렸다.

 

 시간은 많지 않았다. 평생 할 도박을 몰아서 한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형, 잠깐 화로 있는 단에 좀 올라가게 엎드려 봐.”

 “뭐? 야, 불이 꺼져도 그 근처는 온통 뜨거울걸. 관둬.”

 “참아봐야지 어떡하겠어. 아예 위를 부술 거야. 나 올려주고 바로 계단 내려가. 혹시라도 다치면 진짜 미안.”

 “무슨 수로 부수게?”

 “스노우화이트의 마법을 카피 할 거야. 마법 카피는 기초 마법이지만, 그래도 그 정도 되는 마법사가 주력으로 삼는 마법이니 저걸 부숴먹을 정도는 되겠지.”

 

 오브젝트의 밑면은 정확하게 이 공간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화로의 중앙을 향하고 있었다.

 

 “제발 한 발에 끝나라.”

 

 계산할 수 있는 공식도 카피 한 줄 뿐, 할 수 있는 기도 또한 다만 그 한 마디뿐이었다.

 

* * *

 

 그리하여, 시간은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날카롭게 벼린 얼음은 오브젝트를 파괴하기 충분했다. 화로는 꺼졌으며 탑을 휘몰아치는 바람의 온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보다 더 깊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한 가지 계산하지 못 한 게 있다면 도시의 사람들이 대부분 깨어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레오폴트 그리폰이 교회 종탑을 파괴한 바람에 모두가 잠옷 바람으로 골목에 쏟아져 나온 상황이었다. 레오폴트와의 교전 당시 시가지에 추락했던 리사 스노우화이트가 발견될 가능성은 물론 높았다. 레오폴트 그리폰이야 어차피 전투를 한 당사자이니 다음날이 되면 수사망이 좁혀 들어오는 건 별 수 없다고 쳐도, 고작 A를 찾기 위해 버선발로 뛰어나왔던 두 사람이나 A까지 침입자에 교회 종탑을 파괴한 불경죄로 몰리는 건 그들 중 그 누구도 원치 않는 상황이었다. 초심자인 마법사가 여러 명을 한 번에 이동시키는 것은 계산 실수가 터질 가능성이 높으니 로즈 헌터가 와이엇 윈프리드를 데리고 극단으로 복귀하고 A가 레오폴트를 데리고 우선 가까운 병원으로 피신한다는 것이 그들이 세울 수 있는 최선의 시나리오였다.

 

 로즈와 와이엇의 복귀는 제법 성공적이라 할만 했다. 성공적이지 못 한 것은, A의 순간이동이었다. 평생 안 쓰던 코어를 무리하게 사용한 게 문제였는지 혹은 체력이 바닥을 드러낸 바람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던 게 문제였는지 가까운 허공으로 좌표가 잘못 계산되는 바람에 하마터면 고스란히 추락사할 뻔했던 것이다. 다행히 급하게 한 번 더 공식을 암산한 덕택에 A 본인은 탑 위로 짧은 순간이동을 해낼 수 있었으나 문제는 레오폴트가 허공에 남겨졌다는 데에 있었다. 놀랄 틈도 없이 할 수 있는 한 체력을 다 쏟아 부어 레오폴트를 붙들었고, 현재에 이르렀다. 본 모습이 사람의 몇 배는 되는 덩치인 탓에 보기보다 레오폴트는 무거웠고 A는 그를 온전히 끌어올릴 체력이 없었다. 돌아버리겠네! 욕지거리 한 마디 지르고 나니 입천장까지 바짝 말라왔다. 레오폴트 또한 꽤나 말라붙은 목소리로 끊어지듯이 웃었다.

 

 "제가 과다출혈로 죽는 게 빠를까요, 추락사 하는 게 빠를까요?”

 “제기랄, 불길한 소리 하지 말아요!”

 “언제는 저랑 같이 죽기 싫다고 하셨으면서.”

 “그렇다고 죽는 꼴 보고 싶다는 뜻은 아니거든요, 알만한 양반이 진짜.”

 “아델, 그냥 뛰어내릴래요?”

 “미쳤어요?”

 “좀 너덜너덜 하긴 해도 아델을 태우고 활강은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처음부터 이 풍선 찾기는 모 아니면 도였잖아요. 레오폴트의 형태가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냥 포기해요. 내가 아델을 선택한 순간부터 곱게 죽기는 글렀으니까.”

 “진짜 지옥 갈 거예요, 당신.”

 “아델이 안 무겁기를 바랄게요.”

 

 오랜만에 찾아든 광장의 밤하늘 속에 새까만 날개 한 쌍이 탑을 감싸며 돋아났다.

 

* * *

 

 그로부터 한 달이 흘렀다. 신분이 높아 나쁠 것 없다는 사실을 어린 A가 체감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는 레오폴트가 그에게 한 거짓말이 몇 가지인가를 가늠하다가 때려치우기로 했다. 근본적으로 모든 게 거짓말이었던 사람이다. 공연을 보러 왔다는 소리부터 프림데 시를 구할 마법을 알아내고 싶어서 왔다고 했던 본 목적, 잘못하면 과다출혈로 죽겠다는 소리까지 무엇 하나 제대로 된 사실이 없었다. 슈니플로케 시에 하얀 여왕이 직접 행차한 건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A로서는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정치가 끼어있는 모양이었다.

 

 리사 스노우화이트를 슈니플로케의 영주로 앉힌 건 붉은 여왕이다. 그녀들은 5년을 번갈아가며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얀 여왕, 브라이어 로즈는 붉은 여왕의 선정의 상징인 리사 스노우화이트를 남작 자리에 계속 앉혀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할 수 있다면 실각시키고 싶었고 그것을 통해 붉은 여왕의 정치적 이미지에 타격을 가해 정권을 오롯이 차지하고 싶었다. 그녀와 이해관계가 맞물린 것이 루카스 그리폰 남작이다. 그는 리사 스노우화이트에게 지원을 하여 ‘영원한 불길’을 완성시킨 후원자였고, 해당 마법에 커다란 하자가 있어서 그녀가 잠적했으리라는 심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스노우화이트가 그에게 꾸준히 연구 논문을 제출했던 기후 조절 마법을 발전시킨 형태의 마법을 통해 작위를 받고 유명세를 얻었다. 그리폰 남작은 그리폰 남작대로 어쩌면 스스로가 키워낸 괴물인지도 모를 스노우화이트를 조사하고 싶었고 하얀 여왕은 하얀 여왕대로 그녀의 정치적 라이벌의 선정의 상징이 되어버린 스노우화이트의 하자를 찾아 실각시키고 싶었다. 그리하여 레오폴트 그리폰이 슈니플로케에 파견되었다. 그리폰 가의 후계자까지는 아니면서, 평소부터 예술에 관심이 많기로 정평이 나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극단 후원’ 같은 부족한 구실을 가져다대도 그 어떤 정치 세력들의 의심을 사지 않았다.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슈니플로케를 방문한 사내이니 중앙 정부와 직접 연결되는 연락 수단 없이 슈니플로케를 방문했을 리는 만무했다. 리사 스노우화이트의 실정은 곧바로 수도에 알려졌디. 약 2주 만에 이 얼어붙은 도시에 현 여왕 폐하께서 직접 발길을 했다. 이유는 물론 이전 부패 정권의 상징으로 전락한 스노우화이트를 직접 연행하기 위함이었다.

 

 “기행도 꾸준히 하고 볼 일이죠? 무슨 부실한 변명으로 둘러대도 평소 기행이 알아서 부실함을 채워주거든. 그래도 아델이니까 말해주는 거예요. 워낙 고생하셨으니까.”

 

 원래대로라면 현 여왕 폐하와 함께 남하해 그대로 귀향을 할 예정이었던 레오폴트 그리폰은 구태여 정말로 연극 공연을 보고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는 하얀 여왕보다 정확히 2주를 더 슈니플로케에 머물렀고, 그 기간 동안 극단에 올라오고 있는 메인 공연들은 전부 관람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부상 회복은 A의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빨랐다. 인형극은 공연도 많지 않고 레퍼토리도 손에 꼽을 정도이건만 매 공연 때마다 꼬박꼬박 얼굴을 비추더니 A의 퇴근길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를 가까운 카페로 끌고 가 평소에 먹어볼 기회도 없었던 간식들을 먹여가며 온갖 이야기를 쏟아냈다. 이번 사건과 연루된 정치 이야기부터 이종족에 관한 이야기까지, 주된 공통점은 프림데 시에 관한 이야기였다. 창조신 요르문간드가 재버워키와 그리폰이라는 ‘커다란 흐름’에 위배되는 존재를 창조한 바람에 타 창조신들로부터 제재를 받아 영원한 잠에 빠졌다거나, 그리폰의 역사도 심심찮게 들어야 했다.―그리폰의 부상 회복이 빠른 이유도 그러한 이유라는 모양이다. A는 케익에 올라간 딸기를 포크로 찍으며 피조물에게 치사하게 그 정도 능력을 부여했으면 제재를 받을 만 하다고 생각했다.―

 

 레오폴트가 돌아가기 하루 전날, 마지막으로 잡혀 카페에 끌려왔을 때 A는 이젠 프림데 시에 사는 개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은 그의 예상을 깨고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A가 롤 케익을 먹는 모습만 유심히 관찰하다가―사실 그것도 퍽 불편했다.― 자리를 파할 즈음이 되어서야 레오폴트가 두 번 접은 메모 조각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뭐예요?”

 “이제 돌아가니까 약속했던 것. 후원 학생 시험 주선해주겠다고 했잖아요. 슈니플로케에서 일하면서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는 건 무리니까 극단 일 정리 하고, 그 도시에서 그 사람 찾아가요. 엄청 좋은 사람이라 사정 말하면 시험 접수부터 공부까지 많은 도움이 되어줄 거예요. 귀족이니까 누구를 붙들고 물어도 사는 데야 훤할 테고.”

 “아, 그 귀족…. 시험 준비 단계에서부터 후원을 해주고, 시험에서 떨어지면 후원이 끊어지는 식이예요?”

 “그런 셈이죠. 떨어지면 가차 없지만, 아델은 사전 지식도 없이 공간 결계 공식을 뒤집는 괴물이니까 별 걱정 없을 거예요.”

 “어떤 사람인진 몰라도 어디 사는 남작 가문 도련님과 달리 굉장히 건실하신 분이시네요. 가난한 학생들 후원까지 해주시고.”

 “너무 그렇게 기대하진 마시고요, 귀족은 다 어디 한 구석 정도는 괴짜인 법이니까.”

 

 레오폴트의 미소는 매번 미묘했고 자신의 농담에 만족하여 웃는 간결한 웃음조차도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리폰의 특성인지, 그의 특성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앞으로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정말로 마지막이었다. 레오폴트가 먼저 카페의 자리에서 일어났다. A에게 이런 카페의 간식 값을 지불할 돈이 있을 리 없으니, 계산이 늘 그의 몫이었던 탓이다.

 

 그러고 보면 귀족 가 도련님치고는 수행도 없이 혼자 잘도 돌아다닌단 말이야. 과연 그들 사회에서 기인 소리 나올 만 해. A는 그렇게 생각하며 레오폴트가 쥐어준 메모를 펼쳐보았다. F로 시작하는 그 도시의 이름은 종이가 접힌 자국을 따라 네 등분으로 금이 가 있었다. 발음해볼 필요도 없이, A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올 만큼 익숙했다.

 

   프림데 시, 루카스 그리폰 남작 귀하.

 

 시선을 메모에 내리꽂은 채 꼼짝을 못 하고 있자, 계산을 마치고 테이블로 돌아온 레오폴트가 그 손을 거두어 투박한 손끝에 짧게 입을 맞추어주곤 웃었다.

 

 “황야에 오게 되면 연락해요, 달링.”

 

 이제 A는 그의 이런 기행이 그리폰 일족을 대표하는 특성이 아니기를 바라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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