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1세기가 되어도 초등학교 컴퓨터실에 있던 컴퓨터들이 모두 폭발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삶은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나는 그 무렵에 자주 아팠고, 다른 아이들보다 결석이 잦아 졸업도 못 할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걱정했는데 다행히 남들과 발맞추어 졸업식 모자를 쓸 수가 있었다. 어머니가 오셨다. 학교 정문 앞에서 팔던 조그마한 꽃다발을 받았고, 그날 점심을 중국 음식점에서 먹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가 집에서 조금 멀었다. 어머니는 내게 돌아가는 길에 버스정류장에 들러 봄부터 타야 하는 버스 노선을 짚어주셨고, “혼자서도 할 수 있지?” 그렇게만 물었다. 나는 그럴 적이면 이해한 게 하나도 없어도 습관처럼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말했다.
석양이 들었다. 언덕 높이 다닥다닥 붙어 들어섰던 산동네 골목에 우리 모자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고, 어머니와 나란히 걸어 집에 가는 길이 오랜만이었다. 우리가 아는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면 어느덧 언덕 아래 낮게 도사린 마을 저 너머에서 달이 떠올랐다.
2001년 겨울이었다. 큼직한 달에 구름이 몰려드는 모양새를 보고, 내일은 눈이 내릴 것 같다고 막연히 짐작했다.
1-1.
나는 그 무렵부터 안경을 썼다. 유난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컴퓨터가 가정에 도입되던 시절에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고, 텔레비전과 가정용 컴퓨터라는 새로운 문물이 도입되자마자 무섭게 시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은 나 말고도 많았다. 안경을 벗으면 세상이 한껏 흐리고 경계가 뭉개졌는데,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나의 인지가 그리는 세상은 온통 구멍투성이였다. 찢긴 자국, 좀먹은 자국투성이. 보기만 해도 가끔 토할 것처럼 징그러웠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나를 냉소적으로 만들었다. 꼬마이던 시절부터.
2.
그 양반은 나에게 무식하게 커다란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졸업 축하한다, 그러니까…, 너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한겨울이다. 중학교에 들어가기 직전 겨울방학. 애써 까맣게 물들였던 머리칼 위로 찢어진 종이처럼 눈발이 흩날렸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뒷마당엔 오래전부터 도사리고 있던 블랙홀 같은 찢긴 자국이 있었는데, 나는 그게 그냥 늘 거기에 있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다들 보이는데, 그런 걸 일일이 지적하면 살기 힘들어지니까 비밀로 하자, 암묵적인 약속을 나눈 거라고 믿었다.
무슨 꽃이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기억이 난다. 지독하게 하얀 국화 한 다발. 나는 그때 난생처음 보는 이 외국인 아저씨가, 축하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 모르는 거 같다고 짐작했었다.
“도환찬인데요.” 그 아저씨는 널브러져 누워 꽃다발을 험악하게 바라보고 있는 나를 히죽거리는 낯짝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래, 찬이구나.” 바다 냄새가 났다. 걸음마다 바람을 휘몰고 다녔고, 그가 초등학교 뒷마당에 벌어진 틈새를 수선할 적엔 눈보라가 일었다. 하필이면 날을 골라도 눈이 내리는 날을. 때로 삶은 소설적이다. 놀랄 만큼 계획된 장면처럼 눈앞에 솟아나고,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음악이 흐른다. 그땐 무슨 생각으로 새로 산 휴대전화 알람 소리를 클래식 따위로 골랐던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Deine Zauber binden wieder Was die Mode streng geteilt(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은 자들을 신비로운 그대의 힘으로 다시 결합시키는도다.)….
“내가 너에게 인간의 삶에 종지부를 찍어주러 온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단다. 내 이름…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가 않겠구나. 멕시코에서 바다 건너서 왔단다. 현현한 케찰코아틀이지.”
나는 가끔 그날, 이 수상한 외국인과 행여라도 엮이지 않도록 잘 피해 다녔더라면, 혹은 적어도 저 때 그 남자의 입을 틀어막고 도망쳤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부질없는 저울질을 했었다.
그는 내가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눈은 휘몰아치고, 머리는 아프고, 소금 냄새는 지독한데….
3.
국화는 조의를 표하기 위한 꽃이다. 그러니까, 국화였던 것일 테다.
4.
손을 거두면 영상실이 암전한다. 그날 이후 나는 많은 걸 타협해야 했다. 가난한 부모님이 사랑으로 키웠음이 분명한 나는 그분들과 달리 인간이 아니라는 모양이고, 해야만 하는 사명이란 게 있으며, 내가 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것이라는 협박을 들었다. 웃는 낯으로 한다고 협박이 아닐 수는 없는 것이다. 내게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그 어떤 14살이라도, 이걸 하지 않으면 네 가족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폭력적 사실 앞에서 이성적 판단을 할 수는 없었을 거다.
그렇지만, 역시 내가 그날 빌어먹을 아즈텍의 신에게서 성공적으로 도망쳤더라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하다못해 주워온 자식을 사랑으로 키운 어느 마음씨 따뜻한 부부가 자식의 운명에 휘말려 임종하는 사건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지.
선량하게 살아도 약속된 보상은 없다. 그것이 모든 도덕적 행위의 본질이다. 그럼에도 저 가난한 부부는 나를 거두어 키우고, 나는 그들의 장례식이 끝나고 10년 넘어가도록 아직도 인류를 구할 방도를 구가하고 있다. 그렇게 살아도 알아주는 이 하나 없을 테지만, Alle Menschen werden Brüder Wo dein sanfter Flügel weilt(그리고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온화한 그대의 날개가 머무르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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