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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카르트/42세] 모든 스러져가는 것들을 사랑해야 했던 거다.

  그다지 오래전 일도 아니다. 천장과 바닥이 분간이 가지 않고 빛 한 줄기 들지 않은 이공간에 잠겨 있었던 것이 말이다. 모두가 에카르트 크로스가 이만큼 정신을 수습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들 떠들었다. 에카르트라고 그런 줄 모르지야 않았다. 다만 그들이 간과한 것은 그렇게 흘렸던 시간은 사람의 정신에 깊이 배어들어 빠질 수 없는 얼룩을 남긴다는 것이고, 에카르트는 멀쩡해진 게 아니었다. 남들보다 빠른 속도로 멀쩡해진 척을 할 줄 알게 된 거지. 그나마 직원 하나가 들어와 꼬박꼬박 말을 붙여주기 전까지는, 이카루스와는 원래도 사적인 대화를 잘 나누지 않았던 탓에, 심하면 석 달쯤 말 한마디 않고 작업에 몰두했던 적도 있었다. 반대로 넉 달쯤 작업 시간마다 8시간 내리 대화를 한 일도 있다. 혼자서. 그러는 동안 에카르트 올리버 크로스는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를 보고, 맞물려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대화를 나누는 이의 목소리는 자주 바뀌었다. 하루는 이카루스였고, 하루는 이카루스보다 가녀린 목소리를 내던 필리피나였고 또 하루는 단단한 목소리로 집중을 흩트리는 하랄트였고, 또 하루는 모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가득—그는 저택에 도착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 모든 목소리는 당신들의 목소리였음을.—, 하루는 아버지, 하루는 빌어먹을 개새끼 에릭 그레이엄, 사랑했던 스승 아른프리트…. 시달리듯이 질문을 받고 대답하다 보면 화를 내고, 그러다 보면 마감일에 맞추어 기계는 나가고 한 주가 끝났다. 약을 타 먹으면 한동안 괜찮다가 이어졌다가, 일상은 뚝딱뚝딱 돌아가는데 스스로는 망가진 시계마냥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불쾌했다. 인간으로 태어나 제값 못하는 기계처럼 산다는 것. 약을 바꿔 죽는 건 어떨까 고려해봤을 만큼.

    

  그렇게 시달리다 눈 붙일 침실로 돌아오면 종국엔 침대 가에 그 애가 앉아 있었다. 오늘처럼 말이다.

    

  “그렇게 화를 낼 것까진 없었을 텐데. 걔 좋은 애야. 이제 너도 알겠지만.” 에카르트 크로스는 빌어먹게도 흠 없는 그가 틈에 왔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막대사탕 포장을 하나 벗겼다. 물고 나면 당분 가득한 맛이 입 안 가득 배어났는데, 사실 그렇다고 머리가 맑아져 빌어먹을 환각 증세가 낫진 않았다.

    

  “왜 하필 너지? 난 근래에는 혼자 대화하거나, 환청에 시달린 일이 거의 없었는데. 호숫가에서 이카루스의 목소리를 들은 게 다였어. 넌 늘 마지막에 나오는 새끼잖아. 하랄트의 이공간에 갇혀 있을 때부터 그랬지.”

  “그야, 여기선 내가 나오는 게 가장 합당하잖아. 누굴 원했어?”

  “글쎄다, 스승님?”

  “아른프리트 씨는 네가 벼랑 끝에 몰렸을 때 널 구하러 오는 사람은 아니었잖아. 늘.”

  “그래도 이럴 때 별말 없이 사탕이나 꺼내주실 분쯤은 됐었지.”

  “안 꺼내줘도 알아서 까먹고 있으면서.”

  “불만이냐?”

  “아니.”

    

  침대 가에 앉아 있던 에카르트 크로스는,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도 실없는 구석이 있었다. 아호른에서 있었던 실험 사고 관련 재판이 끝난 이후 잃어버렸던 귀걸이 끝을 만지작대면서도 언성 높이는 일 없이, 그냥 거기에 앉아 있는 일이 잦았다. 그러고선 보통 못 알아들을 말을 늘어놓았다. 아버지로서 이카루스에게 다정할 순 없겠냐거나. 가족끼린 사랑할 줄 아는 편이 좋잖아. 우리는 슬프게도 외롭고 싶지 않은 인간이지 않아? 지금의 에카르트로선 언제 그런 생각을 했고 왜 그런 사유가 당연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이야기를, 그 애는 호흡하듯 내려놓았다.

    

  “있잖아. 내 친구들한테 좀 잘해줄 순 없겠어?” 고개를 바짝 든 열여섯의 에카르트의 요구는 그러한 것이다. “걔들은 그냥 내가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것뿐이야. 긴이 계약서 보여줬잖아. 네가 기억을 못 해도 우린 친구고, 그건 사라지는 사실이 아니야.” 그러면 또 할 말이 생긴다. “이봐, 꼬마야. 우리는 슬프게도 외롭고 싶지 않은 인간이겠지. 더불어 수치스럽고 싶지 않은 인간이기도 하고.”

    

  입 안에서 사탕을 굴려보면 뾰족하게 녹은 사탕 끄트머리가 입천장을 긁었다. 열여섯 먹은 에카르트는 침대 가에 다리를 꼬아놓고 앉아선 한참 금빛 귀걸이의 끄트머리로부터 손을 거두지 못했다. “그거참 어려운 문제네.” 그 애는 특별히 영민한 애가 아니었다. 자신을 대단스레 전시할 줄 아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들은 모두 이 사태가 수치스럽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그러했다. 하랄트의 이공간에 갇혀 처음 마주했던 순간부터. 우리를 괴롭게 했던 그 모든 분노를 수치로 여긴다고. 복수에 눈이 멀어 사랑하지 못했던 순간을 후회한다고. 그 빌어먹을 새끼가 어떤 개새끼였든, 인간 사회가 설령 제 사지를 뜯어 잘라간다고 해도 모든 인류를 용서해야 했다고 말이다.

    

  인간의 수많은 문학은 용서를 논한다. 그러나 결국 읽는 것만으로는, 인간은 아무것도 습득하지 못했다. 에카르트 크로스 또한 전부 잃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루지 못할 거면 시작을 말았어야지. 어차피 이렇게 될 거라면, 필리피나가 되었어야지.

    

  추락하려거든 이카루스가 되어 추락했어야지. 복수의 칼끝으로 친구를 도륙한 개새끼가 될 게 아니라.

    

  “난 그래도 네가 내 친구들을 조금이라도 믿어주면 좋을 것 같은데.” 16살, 그 어느 날의 에카르트가 말한다.

    

  “그 애들은 그렇게까지 실망하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그렇게까지 실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거겠지.”

  “기대하는 게 나쁜 일도 아니고.”

  “너 지금 나와 네가 완전히 같다고 주장할 참이냐?”

  “…너 같은 어른이 되고 싶지 않기는 했어.”

  “알아. 네가 여기 남아 고스란히 컸으면 나 같은 개새끼는 안 되고 끝났을 거라는 것쯤은.”

  “살인 이야기가 아니야, 에카르트.”

    

  입천장이 사탕 끝에 베었다.

    

  “나는 네가 사람을 죽인 것만큼 사랑을 죽였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생각해. 이제와서 주제에 무슨 대단한 성인군자 같은 걸 하겠답시고, 내게서 친구를 빼앗아가겠다는 거야? 사태를 여기까지 망쳐놓은 네가 내게, 대체 무슨 염치로?

    

  사탕을 깨무는 소리를 내었다. 그 애는 결국 그 말을 하러 온 거다. 눈을 한 번 끔뻑이면 그 남자애는 사라지고 공간에 홀로 덩그러니 남은 건 나이 마흔을 넘긴 에카르트 크로스 하나다.

    

  그는 정말이지 조용히 살고 싶었다. 역사에 기록 한 줄 남기지 않고, 주어진 수명대로 살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듯이 죽는 게 꿈이다. 그 애에게 친구를 돌려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말이다, 그러면 무언가가 남아버리지 않느냐는 말이다. 누군가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어쩌면 실망스럽기만 한 이미지로서 에카르트 올리버 크로스가 생기고 만다….

    

  문제가 산더미 같기만 하군. 하여간 애새끼는 아는 게 없어. 단물에 섞여드는 핏물은 비릿하기 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