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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란/호생미] Agnes

 

  세 판째 패전이었다. 후배란 놈은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된 이래 2년 가깝게 칩거하면서 게임에 매달렸다고 했는데, 아주 거짓말은 아닌 모양새였다. 쉬는 날이었고 그 애가 놀아달라기에 남아도는 시간을 베풀어주기로 했다. 그게 내가 그 애에게 베푸는 시혜라는 사실을 그 애도 아는 것 같았다. 게임 타이틀을 고르면서 원한다면 봐주겠다고 했는데, 그러지는 말라고 했다. 그러면 득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지니까. 네가 재미있어야 나로서도 도와주는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책장에 꽂혀 있던 수많은 게임팩 중에서 초보자가 할만한 게임을 고르던 그 애가 나를 돌아봤다. 그래? 대답은 그게 다였고, 그 후부터는 패배의 연속이었다. 딱히 이기고 싶진 않았으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 애로선 이기기 쉬운 게임이 좀 시시했던 것 같다. 그 후 두 판쯤 더 하고 나서야 게임 타이틀을 바꾸겠다고 했다. 과자도 가져올게.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든가. 그렇게만 대답했다.

 

  “좋아하는 게임 있어?”

 

  책장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어차피 아는 게 있을 리 없었다.

 

  “있겠냐? 해본 적도 별로 없는데.”

  “그럼 게임 말고는? 좋아하는 거 있으면 내가 어울려줄게.”

 

  거실에서 내다보이는 창 너머의 하늘이 눈부시게 청아하고 파랬다. 누런 가을 햇살이 테라스 바닥으로 쏟아졌다. 말없이 점점이 흩어져 파도처럼 쓸려가는 구름을 보기만 하다가 입을 열었다. 주제에 괜히 나한테 맞추려고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알아서 가져와. 후배는 과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게임 타이틀은 고르지 않고, 과자를 들지 않은 손은 비어 있었다.

 

  “원래는 쉬는 날에 뭐 해?”

 

  과자도 딱 자기가 먹을 것만 가져오는 게 묘하게 얄미운 구석이 있었다.

 

  “식물들 돌보거나 필요한 공부. 해야 할 일이라면 많아.”

  “뭘 그렇게까지 해? 쉬라고 주는 날인데, 취미라도 좀 만들어보지.”

  “예전엔 뭐, 이것저것 했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그럴 시간도 아까워서. 말했잖아, 해야 할 일이라면 많다고.”

 

  후배는 처음 왔을 때 낯을 심하게 가리다 못해 얼굴에 인형 탈을 쓰고 도망을 다닐 정도였다. 지금도 여전한 구석이 있지만, 많이 발전한 편이다. 나를 비롯해 히어로 사무실의 식구들과는 대면할 줄 알게 됐고 과자를 한입 물고 이런저런 건방진 소리도 지껄일 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사는 게 당신의 의무다, 이거야?”

 

  의외로 숨 막히게 사네. 열어둔 테라스 문틈으로 메마른 바람이 들어왔다. 후배가 그렇게 한 마디 슬쩍 덧붙이고 난 후 또 바람에 휩쓸려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정적이 거실을 감돌았다. 많이 컸네, 아델하이트. 후배는 감자칩 봉투에 도로 손을 넣었다. 서른 먹은 늙은 선배는 모르겠지만 20대에게 1년은 성장하기에 모자란 시간은 아니거든. 차라리 인형 머리를 쓰고 도망쳐다니던 시절이 귀엽기라도 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불만이 좀 들었다.

 

  “선배는 누군가를 구하고 싶다는 말은 안 하잖아. 구해야 한다고 하지. 늘. 그게 그렇게 태어난 당신의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더 고지식한 다른 선배들조차 할 수 있다면 돕고 ‘싶다’고, 구하고 싶다고 하는데. 누가 선배한테 세상을 구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이라도 했어? 왜 그러고 살아? …이해가 안 가, 나는.”

  “…누가 날 협박하겠어? 너나 나한테 협박이 유효하기나 해?”

 

  세상은 기울어져 있고, 그 경사의 밑바닥에 처박혀져 있는 자에게는 온당한 스피커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오만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이다. 이 빌어먹게도 엉망진창인 사회를 고쳐먹으려면 마이크를 잡을 수 있는 환경에서 태어난 자에겐 마땅한 의무가 주어지는 거다. 적어도 저 가엾은 자들을 상처 입히지 말라는 의무. 혹은 주제에 맞게 가진 것을 내려놓고 제 사지를 잘라내어 균형을 맞추라는 헌신.

 

  “…아델하이트, 너 그거 피해망상이야. 아델하이트 가문의 초능력을 물려받은 너는 네가 원하기만 하면 가진 힘과 권세를 휘둘러 타인을 숱하게 상처 입히고 파멸시킬 수 있을지언정, 그런 기득권을 타고난 너 스스로는 받아도 좋을 상처가 없어. 신은 너나 나에게 그런 걸 허락하지 않았다고.”

  “선배의 그건 얄팍한 영웅주의지. 난 솔직한 것뿐이야. 다 가지고 태어났어도 수적으로 소수인 걸 어쩌란 말이야? 배척당하면 상처 입고 이용당하면 슬프고 배신당하면 울고 싶어, 나는. …그리고 당신이 좀 가엾다고 생각해.”

 

  단 한 번도 들어본 일 없는 말.

 

  “화왕의 계보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당신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자유롭게 살았을걸. 하고 싶은 거, 좋아하는 거 다 잘라내지 않고 더 그럴듯하고 행복하게. 적어도 당신 같은 사람이 초능력자 가문에서 태어난 건 차라리 저주야. 그런 데서 태어나 버티기에는 당신, 너무 완벽주의라고.”

 

  도덕적으로 완벽하고자 당신의 자의식에서 모든 걸 덜어내려 들지 마, 그러다 0이 되어버리면 어떡해?

 

  “…좀 놀아주니 기어오르네. 난 너처럼 자기연민에 취해서 사는 인간쓰레기가 딱 질색이야.”

 

  연민은 필요 없다. 받고 싶은 구원도 없고, 개선할 것도 없었다. 중요한 건 어떤 이상을 이루고 싶은가가 아니야. 어느 지경까지 타락하고 싶지 않은가 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