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가 선의로서 오롯이 성립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바로 서야 했다. 마르카인은 스스로가 그것을 알고 있다고 믿었는데, [성]과 연루되었던 이들이라면 또 그 낡고 기이한 왕관을 받들었던 이라면 누구든 싫어도 어느 순간은 피부로 느끼는 때가 오게 마련이었다. 바르다고 믿었던 신념이 세월 속에 영속할 순 없다. 만물은 때 되면 기울었고 금이 갔으며, 녹이 슬고 부하를 견디지 못하여 무너졌다. 섭리가 그러했다. 시대에 저항하며 총명하던 이도 초로(初老)에 접어들면 총기가 저물고, 하물며 유리잔 하나 오래되면 어딘가는 금이 가고 부스러지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니 호의와 선의 또한 흠 없이 성립하려면 환경이 따라줘야 했다. 선한 의도가 빛바래도록 오랜 시간이 흘러서는 안 되었고, 베푸는 이가 시혜적이어서는 안 되었다. 받아들이는 이는 감사를 알고 예의를 갖추며, 선의를 곡해하거나 놀림감으로 삼을 악의를 가져선 안 되었다. 인간의 친절은 그래야만 똑바로 섰다. 그래, 인간의 선한 감정은 그런 식으로 바로 서는 것이었는데….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뭐부터 잘못됐지? 마르카인은 제 이마를 짚고 미간을 좁혀둔 채 생각에 잠겼다. 그는 그저 선의로 모처럼의 휴일을 반납했을 뿐이다. [성]에는 오랜 박제로 남아버린 유령들이 있었고, 특히나 그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 박제되어 있었던 메헬펜차는 툭하면 심심함에 몸부림치며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르기 일쑤였다. 아침에 일어나 식빵을 굽고 찬장을 열어 잼을 고르다가 문득 그 가여운 선대 왕을 떠올린 게 다였다. 보나 마나 오늘도 죄 없는 이들을 괴롭히고 있을 게 뻔했고, 때마침 오늘 마르카인의 마음은 너그러웠다. 마음에 쏙 들었던 땅콩버터 잼이 아직 둥그런 통 절반 가깝게 남아 있었고, 간밤에 새로 발견한 SNS 계정에 올라온 유머가 즐거웠다. 할 일은 없고, 약속도 없었다. 원한다면 종일 침대를 뒹굴며 재밌지만 유익하진 않은 동영상을 돌려보며 피로를 풀 수도 있을 거였다. 다만 그저 그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또 오전하고도 오후가 한참 남아 있었기 때문에 아침 먹는 시간이나마 쪼개어 저 가엾은 유령에게 할애하자 너그러운 마음이 들었다.
[성]에 들어서는 것까지는 좋았다. 한 손에는 식빵, 옆구리에는 우유 한 통을 끼고 남은 손엔 아끼는 땅콩버터 잼을 들고 메헬펜차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순간까지도 나쁘진 않았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마르카인은 그 브랜드의 땅콩버터를 구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더랬다. SNS에서 급물살을 타고 유행하기 시작한 모든 상품이 그러하듯이 가게마다 품절 현상을 빚었던 까닭이다. 한 통 간신히 구했을 적엔 고작 잼 한 통에 벅찬 감격이 밀려들었을 정도였다. 모두가 호평하던 만큼, 잼은 만족스러웠다. 역시 이목을 사는 인기 상품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고, 언제 재입고 될지 모르는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아껴 먹고 있었다. 그런 구하기도 힘든 잼이 [성]에 들어서자마자 마르카인의 손아귀에서 돌연, 사라진 것이다. 그것도 어디선가 쏜살같이 튀어나온 까마귀 때문에! 아니, 정확히는 오늘은 까마귀의 모습을 취한 저 가증스러운 선왕 때문에.
자, 다시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뭐가 잘못됐지? 마르카인의 식은 눈빛이 살집 있는 까마귀를 향했다. ‘불가해’라는 말로 정의 내릴 수 있을 법한 큼직한 까마귀는 몸 구석구석 박힌 주홍색 눈들은 나른하게 깜빡였고, 털에 잔뜩 땅콩버터를 묻혀가며 잼이 든 병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잽싸게 발을 놀려 땅콩버터를 채가더니, 음식 섭취가 필수도 아니면서 보란 듯이 한 다리를 들고 흔들기까지 하는 게 명백한 시비였다. 자, 네가 아끼는 땅콩버터는 이제 내 것이다. 물론 까마귀는 말하지 않는 법이니, 땅콩버터에 머리를 처박고 내지르는 뜻 모를 울음소리를 듣고 마르카인이 내놓은 울분에 찬 상상도였다.
차마 잼을 바르지도 못한 식빵을 들고 망연히 바라보고 있자니, 역시 울컥했다. 그는 선의로 휴일을 반납했다. 모처럼이니 아침을 먹는 동안에는 저 가엾은 유령을 좀 놀아줄까 하는 호의로 [성]엘 왔단 말이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유령은 사람 속도 모르고 대뜸 튀어나와 잽싸게 땅콩버터를 채가더니 고개를 처박고 마르카인이 아끼고 아껴온, 반이나 남아 있었던 땅콩버터를 남김없이 먹어 치우고 있었다….
무엇부터 잘못되었느냐고? 처음부터 전제가 잘못됐다. 저건 인간이 아니니까, 애초에 타인의 선의를 이해하는 매커니즘부터가 없었던 거다!
“야! 내 땅콩버터 내놔, 이 망할 자식아!”
선왕에게 해도 사용해도 좋을 말투도 아니겠거니와 내뱉어도 좋을 발언도 아니었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까마귀의 털을 잡고 우악스럽게 땅콩버터 병에서 까마귀의 머리를 꺼내었다. 까마귀는 그러거나 말거나 얄밉게 울었고, 곳곳에 나 있던 흰 털에 온통 잼이 묻거나 말거나 마르카인의 화난 얼굴이 즐겁다는 듯이 기괴하게 울어댔을 따름이다.
잘해주는 의미가 없었다. 정말이지 선의를 베풀 가치가 없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얌전히 집에서 식빵에 맛있는 잼을 발라 먹고 침대에 도로 들어가 강 같은 평화, 평온한 휴일을 만끽했을 텐데. 내가 뭐라고 이 빌어먹을 유령이 심심할까 걱정을 했던가 말이다.
땅콩버터 병은 텅 비어 바닥을 굴렀다. 병을 목도하자 울컥하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마르카인은 이 통통하고 얄미운 까마귀를 엎어놓고 기분대로 궁둥이를 때렸다. 얄밉게 다리까지 흔들던 까마귀는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항의하듯이 또 소란스레 두 발을 버둥거리며 울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못된 까마귀 같으니라고! 아니, 정확히는 대선배지만, 아무튼, 사족을 달자면 길어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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