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출근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나온 것이 무색하도록, 연방수사국 1층에 자리한 카페는 붐볐다. 인근 금융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침부터 너도나도 커피를 주문했고, 카운터 너머로 보이는 카페 특유의 오픈형 주방은 온갖 고성이 날아다녔다. 아메리카노는 열 잔, 카페라떼는 여덟 잔, 그밖에 아나톨리가 잘 모르는 시즌 메뉴 이름들이 소란 속에 들려왔다. 여긴 아침마다 늘 전쟁인가. 커피가 나오는 픽업 공간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오가는 사람을 관찰하던 아나톨리는 막연히 뉴뉴욕의 번화가는 남다르구나, 생각했다. 재취직 전에 일했던 경찰서 근방도 제법 붐볐지만, 아무렴 아침마다 카페가 이만한 북새통을 이루진 않았다. 거기선 5분 기다리면 커피가 나왔고, 10분 기다리면 데운 베이글이 나오곤 했는데 기세를 보아 오늘은 그가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픽업하려면 15분은 더 기다려야 할 것처럼 보였다.
연방수사국은 아나톨리가 짐작하던 것보다는 큰 건물에 청사를 두고 있었다. 마천루 높이 솟은 중심가에 있었고, 덕분에 교통편이 좋았다. 아마 본청은 상징성을 위해 크게 지었겠지. 뉴아메리카 각지에 흩어져 있을 수사국들은 좀 더 작고 눈에 띄지 않게 숨겨두었을 테고. 아나톨리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아 일회용 잔이 네 개 들어가는 종이 캐리어를 픽업해 가는 사람을 메마른 시선으로 쫓았다. 목에 유명한 금융 업체 사원증을 걸고 있는 사람이 반, 그밖엔 연방수사국 사람인지 근교 다른 업체에서 일하는 사람인지 모를 새까만 정장의 사람들이 뒤섞여 아나톨리가 앉은 테이블 앞을 오갔다.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첫 출근 시간까지 30분이 남았다. 차라리 일찍 나와서 다행이었구나. 아니었으면 커피를 기다리느라 첫날부터 지각했을 테니까.
“38번 고객님,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나왔습니다.” 가까이서 들리는 고함을 듣고 아나톨리의 설표 귀가 쫑긋 움직였다. 결제한 영수증을 꺼내 맨 위를 확인했다. 큼직하게 ‘038’이라 적힌 숫자, 아나톨리가 기다리던 오늘의 평화 한 잔이었다. 아무렴, 아침엔 커피 한 잔으로 졸린 머릿속을 한 번 씻어줘야 움직일 힘이 나는 법이다. 코트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어두고 한 걸음 만에 커피잔이 가득한 픽업 장소 앞에 섰다. 얼음이 가득 담긴 아메리카노가 다섯 잔이나 있었는데, 번호가 적힌 흰 라벨을 붙여 커피의 주인을 명시하고 있었다. 아나톨리는 직원이 매직으로 꾹 눌러 적은 것 같은 숫자를 잘 확인해 38번 커피를 들었다.
“주문할 때 얼음을 갈아달라고 부탁드렸었는데….” 아나톨리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38번 커피를 챙겨 들고 코트를 두어 맡아두었던 자리로 돌아오자, 3분 전까지 아나톨리가 서 있었던 자리에 도드라지게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남자가 직원에게 정중한 말투로 주문 확인을 요청하고 있었다. 주문이 많아 요구 사항을 누락한 모양새였다. “죄송합니다, 금방 갈아드릴게요.”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직원은 남자가 주문한 커피를 들고 주방 한구석을 향했고, 웅성거리는 소음 속에 요란한 믹서 소리가 섞였다.
아마 저 남자는 연방수사국 직원이겠군. 아나톨리는 차디찬 아메리카노로 목을 축이며 무심히 생각했다. 남자의 인상만으로는 수사국 안에서도 어떤 부처에서 일할지는 모를 일이나, 수사 관련 일을 하기에 좋은 체구라는 짐작은 들었다. 아나톨리 또한 한때 경찰로 일했기에 붙은 습관이었다. 사람을 관찰하고 수상한 낌새를 찾는 게 수사 인력의 일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다 픽업 장소 앞에 멀뚱히 서서 커피를 기다리던 남자와 아나톨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나톨리는 서둘러 고개를 떨어트렸다. 스마트폰 위로 시선을 고정했다. 딱히 확인해야 할 메시지 같은 것은 없었다. 카페를 오가는 사람들은 아나톨리뿐만 아니라 한 번씩은 남자에게 한 번은 시선을 던졌다. 오가는 모든 이보다 남자는 머리 하나 정도쯤은 더 컸으니까. 그러나 당사자와 눈까지 마주치면, 아나톨리가 유난스럽게 자신을 쳐다보았다고 오해할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그저 픽업 장소와 가까운 자리라 한 번 쳐다본 게 전부인데도.
남자는 오래도록 아나톨리를 쳐다보았다. 아나톨리는 속으로 카페 직원이 얼른 얼음을 갈아 남자에게 커피를 내놓기만을 바랐다.
“여긴 아침마다 시장통이 따로 없다니까요.” 바람이 무색하게 남자는 어째선지 그렇게 말하며 아나톨리의 맞은편 자리에 걸터앉았다. 아나톨리는 놀라 고개를 들었고, 검은 머리칼을 적당히 넘겨 정리하여 깔끔한 인상을 주는 남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앉은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여기 자리 있습니다만.” 아나톨리가 스마트폰 화면을 끄고 침착하게 말하자, 이름 모를 남자는 척 보기에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흘렸다.
“에이,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맙시다. 직장 동료끼리 그러면 삭막해서 못 살아요.” 대체 무슨 소리지? 아나톨리는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오늘에야 수사국에 처음 출근했다. 직장을 특정할 수 있는 ID 카드를 목에 건 것도 아니었고, 하물며 범죄를 저지른 적도 없으니 남자가 수사국에서 일한다 한들 제 얼굴을 알 리 만무했다.
아나톨리의 표정이 조금 험악해졌다는 사실은 전혀 개의치 않는지, 남자는 넉살 좋은 미소를 유지한 채 아나톨리를 바라보았다. “수사국에서 일하시죠? 제가 얼굴을 모르는 걸 보니 신입인 것 같은데.” 남자의 갈색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아나톨리는 애써 시원한 커피를 삼켜내며 대답했다. “아나톨리 드미도프입니다.” 내가 동물원 설표도 아니고 왜 사람을 저렇게 쳐다보지? 그보다 난 앉으라고 안 했는데.
“피터 브라운베어입니다, 신입 병아리 씨.” 덩치에 맞게 악수를 청하는 남자의 손은 크고 단단했다. 아나톨리는 남자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아나톨리 드미도프입니다, 브라운베어 씨.” 악수에 응하지 않고 힘주어 되풀이하자, 피터 브라운베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눈을 크게 끔뻑거리기만 했다. 곧이어 웃음이 터졌다. 남자는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웃었다. 마치 아나톨리의 자기소개가 무척 이상하게 들렸다는 것처럼.
피터는 순순히 커다란 손을 거두었다. “신입 병아리라는 호칭, 길어야 3개월밖에 못 들을 텐데. 아나톨리 씨 이름보다 귀한 칭호일지도 모릅니다.” 아나톨리는 아메리카노를 남김없이 비워내며 생각했다. 어쩌라는 거지? 아나톨리는 첫 출근부터 이름 아닌 사내 별명을 얻고 싶다고 소망한 적 없었다.
피터가 주문한 커피가 픽업 장소에 나왔고, 아나톨리는 비워낸 잔을 카페에 냅다 반납했다. 출근 첫날부터 별난 사람에게 잘못 걸렸다는 직감이 들었다. 차라리 얼른 사무실에 들어가 있자. 로잘린드와 에이다가 있으면, 적어도 이런 이상한 직원을 상대로 유치한 입씨름을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럼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좋은 아침 보내시길 바랍니다.” 아나톨리가 의자 등받이에 반 접어 걸어두었던 코트를 걸치고 자리를 떠나려는데, 피터가 아나톨리를 불렀다. “잠깐만요, 같이 좀 갑시다. 어차피 피차 출근길인데. 직장 동료끼리 정답게 이야기 나누면서 올라가자고요. 화기애애한 게 보기도 좋잖습니까.”
아나톨리는 생각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헛소리람…. 내가 무슨 부서에서 일하는 줄 알고? 그러나 목적지가 같은 피터를 달리지 않고 따돌릴 방도는 없었다. 그렇다고 처음 출근한 직장 복도를 전력으로 질주해서 때아닌 추격전을 할 수도 없었다. 세상만사 첫인상이 중요한 법이니까.
* * *
연방수사국은 방문자의 신원을 철저히 검사했다. 수사국에 원한을 품은 범죄자는 수도 없이 많았고, 테러와 보복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심지어는 택배 직원마저 몸수색과 물건 수색을 거쳐야 할 정도였다. 오늘 처음 수사국으로 출근한 아나톨리 또한 오늘 입구에서부터 철저한 신원 검증을 받아야 했는데, 아나톨리는 그에 대한 불만이 없었다. 마땅한 절차다. 수사국 직원의 안전과 보안을 고려하면 이런 복잡한 절차 하나 없는 쪽이 도리어 수상했을 거였다.
그런데도 소지품 수색을 받고 신원 확인을 진행하는 동안 아나톨리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병아리 씨 때문에 우리 둘 다 지각하겠는데요. 주머니에 뭘 그렇게 많이 넣고 다닙니까?” 그러니까, 제발 병아리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아나톨리는 소지품을 일일이 검사하는 입구 직원 앞에 앉아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심호흡으로 가라앉혔다. 그렇게 바쁘다면 아나톨리가 검사를 받는 동안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될 일이다. 이미 신원이 검증되어 검사 절차를 밟을 필요가 없었던 피터가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오가는 입구를 떡하니 지키고 서서 아나톨리를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하등 없었다. 아나톨리가 부탁하지도 않았다. 부서 사람들과 첫인사를 나누기로 한 회의실이 몇 층인지는 로잘린드에게 미리 들었고, 아무리 낯선 건물이라도 복도에서 길을 잃을 만큼 심각한 방향치는 아니었다. 첫 출근쯤은 혼자서도 거뜬히 해낼 수 있단 소리였다.
“와! 그 껌 어디서 샀어요? 요즘엔 편의점에 잘 없던데, 반갑네. 아, 달라고는 안 할 테니 그렇게 험악하게 쳐다보진 마시고요. 과자를 좋아하진 않아서 말입니다.” 피터는 성량이 큰 편이었고, 까닭에 입구를 오가는 모든 사람이 피터와 아나톨리를 번갈아 힐끔거렸다. 그들 중 피터와 안면이 있는 이들은 그와 넉살 좋은 인사를 나누었고, 그때마다 그는 연방수사국에 오랜만에 들어온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신입이라는 민망한 말로 아나톨리를 소개했다. 아나톨리는 그때마다 일일이 엉뚱한 수식과 정보를 정정하느라 쩔쩔 매야 했다. 그리고 뻔뻔하게 웃는 낯을 곁눈질로 노려보며 가늠했다. 이 자식 머리를 의자로 후리면 출근 첫날부터 사고를 친 게 될까? 엄연히 따지면 선빵은 이 자식이 날린 거 아닌가? 첫 출근만 아니었어도 등짝 한 번쯤은 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난 지 30분 만에 사람을 열받게 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고.
피터는 연방수사국에서도 얼굴 알고 지내는 직원이 적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신원 검사를 마치고 수사국 건물로 들어서며, 아나톨리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비록 현장에서 굴리면 딱 좋을 체격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부서마다 아는 얼굴들이 있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는 아마 인사과가 아닐까? 차라리 인사과라면 나았다. 초능력 범죄 대응팀으로 이제 막 발령받은 아나톨리와 앞으로는 그다지 얼굴 볼 일이 없을 테니까.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아나톨리는 회의실이 있는 7층 버튼을 눌렀다. 고개를 들어 엘리베이터 안을 살피니 층수 버튼 옆에 인포메이션이 적혀 있었다. 아, 제기랄. 인사과도 7층이네. 아니나 다를까 피터는 층수 버튼에 손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아나톨리가 대꾸 한마디 없어도 기죽는 일 없이 온갖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내가 당신이 좋아하는 사내 식당 메뉴까지 알아야 하는 겁니까? 목 끝까지 불만이 차올랐지만, 뜨거운 한숨으로 녹였다. 출근 첫날부터 다른 부서일지언정 직장 동료와 척질 필요는 없다. 비록 하지 말란 짓만 쏙 골라 하는 폼이 좀 재수는 없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나란히 걸었다. 인사과 사무실이 복도 어디 붙어 있는진 몰랐지만, 피터는 회의실까지 아나톨리를 부지런히 쫓아왔고 친한 척 어깨에 팔까지 둘러오는 바람에 세 번이나 아나톨리가 그의 팔을 떼어놓아야 했다. 회의실이라고 적힌 푯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나톨리는 마지막으로 애써 그의 팔을 억지로 떨어트려 놓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럼 저는 회의실에 볼일이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말을 꺼내자, 피터는 서글서글한 눈웃음을 지었다. “오, 우연이군요. 저도 출근하면 곧장 회의실로 오라는 연락을 받은 참이었는데.” 회의실? 인사과 사무실이 아니라? 아나톨리는 아연실색하여 회의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는 피터를 쳐다보았다. 불길하다. 오늘 회의실로 부름을 받았다는 건….
“로잘린드, 출근길에 귀여운 신입 데려왔습니다. 아침부터 저 성실하게 일했죠?” 피터는 아나톨리의 귀에도 퍽 익은 이름을 태연하게 입에 담았다. 로잘린드 맥클레어. 아나톨리를 연방수사국으로 이끈 초능력 범죄 대응팀의 총책임자다.
“어쩌다 둘이 같이 왔어? 별일이네, 안 그래도 여기서 소개 좀 할까 했는데.” 회의실에 먼저 도착해 있던 로잘린드는 아나톨리와 피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카페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통성명은 했습니다.” 피터는 평온한 투로 보고하며 겉옷을 벗어 회의실 한구석에 있던 옷걸이에 걸었다. “그래? 에이다도 금방 올 거야. 그래도 같은 부서 사람끼리 얼굴 알고 친하게 지내야 일하기 편하지….”
로잘린드는 종이컵에 담긴 인스턴트커피로 목을 축이며 문 앞에서 꼼짝도 못 하고 얼어붙어 있던 아나톨리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서로 인사도 했다면서.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얼굴이니까 다른 사람들 올 때까지 이야기라도 나누고 있어.”
아나톨리는 뻣뻣하게 굳은 목을 움직여 피터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면 피터의 무심한 표정이 사람 좋은 웃음으로 녹아 사라졌는데, 아나톨리는 그의 표정 변화가 명백히 고의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인사만 했나요, 여기까지 오는 내내 많은 대화를 나누며 친해진 참입니다. 그렇죠, 톨랴?” 열받으라고 짓는 표정이 분명하다. 도발이다.
입사와 동시에 퇴직했던 삶이 그리워졌다. 아침부터 오래 기다려 커피로 정신을 깨우고 온 것이 무색하게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저런 난처하고 재수 없는 놈이 직장 동료가 될 거라곤 말하지 않았잖아요, 로잘린드….
새 직장에 적응할 수 있을지, 미래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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