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극장은 한가하지 않았다. 제목은 익히 알고 있던 홍콩 느와르 영화는 매진이었고, 매표소에 앉아 있던 직원은 두 시간 후에 상영하는 낯선 국내 영화 관람은 가능할 것 같다 말했다. 1986년이라는 낯선 시대는 때로 이렇게 세진이 살아온 33년 세월을 무색한 것으로 무너트리곤 했다. 스마트폰은커녕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니 영화표를 예매하려면 직접 극장에 발품을 팔아야 했고, 그마저도 경찰처럼 일이 바쁜 직종이라면 녹록하지 않던 시대다. 21세기에는 세계적인 규모로 커져 있었던 한국 영화 시장은 볼품없이 작았고, 98년도작 「쉬리」처럼 관객몰이를 하는 국내 영화는 전무했던 시절이다. 홍콩의 배우들이 사람들의 우상이던, 혹은 할리우드에서 만든 액션 영화 상영관에만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던 시대가 세진이 떠밀려 온 1986년이었다.
그는 마지못해 국내 영화표라도 달라고 했다. 직원은 빨간색 펜으로 표에 동그라미를 그려가며 영화 상영 시간을 안내했다. 쉬는 날이라지만, 두 시간이나 할 일 없이 붕 떠버릴 줄은 차마 몰랐는데. 그렇다고 집에만 있자니 매시간 뉴스는 고장 난 라디오처럼 대통령의 집무 소식만을 늘어놓았다. 1년 후, 86년도를 장악하고 있었던 군부 독재 정권이 민중에 백기를 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세진으로서는 멍하니 보고 있기 미묘한 뉴스들뿐이었다.
영화표를 주머니에 넣고 극장을 나오면 연극 혹은 영화에서나 보았을 법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거리를 거닐었다. 시민을 가득 실어나르는 버스가 도로를 주행했다. 키 작은 상가 건물이 뻗었고, 고층 빌딩이 흔하던 시절은 아니었다. 버스 정류장 근처에 이르면 성냥갑 같은 매점이 하나 있었는데, 매대엔 오늘 나온 신문이 그득했다. 세진은 매대 앞에 몸을 낮추고 앉아 신문사의 이름을 살피고, 헤드라인을 훑어보았다. 나라는 한창 아시안게임을 치르고 있었고, 스포츠 기사를 전면에 세운 신문이 많았다. 개봉하는 영화가 많아지고, 프로 스포츠 경기가 창설되던 시절이다. 국민 모두 86년도 아시안게임을 발판으로 삼아 성공적인 88년도 하계올림픽 개최에 열을 올렸다. 정부가 나서 거리의 빈민들을 가두었고, 시대는 발전으로 인한 열망과 독재로 인한 비극으로 들끓고 또 침울했다.
세진이 고등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교사들은 우스갯소리로 그의 세대를 두고 ‘88올림픽조차 관전하지 못한 세대’라 일컬었는데 이제는 그 말이 무색해졌구나 싶었다. 만약 사건을 해결하고 21세기로 돌아간다면 물론 굴렁쇠 소년이 푸른 운동장을 질주하는 모습 같은 건 볼 수 없겠지만, 그는 최서 86년 아시안게임을 관전한 21세기 청년이 될 수는 있었다.
그는 신문을 한 부 구매했다. 그가 신문을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모습을 매점 주인이 사납게 쳐다보고 있었던 까닭이다. 「고바우 영감」이 연재되는 신문이었는데, 사실 무엇을 사도 기사를 읽을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저 제목만이라도 알고 있는 문화 콘텐츠와 조우하면, 세진은 그것을 선택하여 사게 되었을 뿐이다. 마치 21세기를 향한 일종의 향수병처럼.
거리를 걷다 보면 대학 캠퍼스와 가까이 붙은 성당의 첨탑이 보였다. 정한 시(市)에 오래 있었다던 대학으로 가톨릭 재단에서 가지고 있다고 했다. 캠퍼스 건물은 여전한 것도 있고 세진이 살던 시대엔 허물고 새로 지어 올렸던 건물도 있었는데 성당만큼은 세진이 알고 있던 모습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입구를 지나면 성모상이 있고, 첨탑 높이 세운 성당 건물로 올라가는 완만한 언덕이 있었다. 세진은 언덕을 느릿한 걸음걸이로 올랐다. 미사를 드리고 나오는 노부부는 언덕을 내려오고, 형제로 보이는 씩씩한 아이들은 세진의 외투 자락을 스치며 언덕을 재빠르게 달려 올라갔다. 등 뒤에서 형제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자가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다 넘어진다. 성당에선 뛰면 못 써… .
성당 안엔 학생과 시민이 앉아 쉬어갈 수 있을 법한 벤치가 군데군데 있었다. 세진은 무심코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가 스마트폰이 들어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손을 빼내어 손목시계를 어색하게 들여다보았다. 21세기엔 패션으로서나 간신히 살아남은 문물이 이 시대엔 필수품이었다. 영화 상영까지 시간은 한 시간이나 남았고, 번화가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길이라도 잃으면 아까운 영화표 한 장을 날릴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벤치에 앉아 읽을 예정은 아니었던 신문을 메마른 시선으로 살폈다. 간결한 선으로 이룬 만화를 읽고, 대한민국이 몇 개의 금메달을 기록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커다란 전경 버스가 성당의 정문을 지났다. 벤치 앞을 오가는 사람들 사이 부유하는 수군거림이 있다. “오늘 또 대학에서 데모를 한다는 모양이야….” 사회면으로 넘기면 경찰을 규탄하는 기사 몇 토막이 도사리고 있었다. 경찰 권력이 대학생을 고문했다고….
20세기 1986년은 세진에게 당연했던 문물을 앗아갔다. 늘 품에 가지고 있던 스마트폰이 사라졌고 세진의 눈에 익었던 경찰 신분증을 바꾸어 놓았으며, 어릴 적 이후로는 본 적도 없었던 누렇게 코팅한 주민등록증이 지갑 안에 들어 있었다. 「태극기 휘날리며」 이래 자연스럽게 도래했던 천만 관객의 영화 시장이 과거로 되감겼고, 도시마다 골목마다 붉은 지붕과 초록색 옥상을 인 주택가가 낮게 엎드려 있었다. 높은 마천루며 아파트가 귀했고, 세계인은 한국을 몰랐다. 라디오엔 김완선의 데뷔곡이 흘러나오다가도 정시가 되면 관제 뉴스가 흘러나왔다. “지금 이 시각 대통령 각하께서는….” 이젠 세진마저 눈 감고 외울 지경인, 무의미한 보도 첫 줄. 그래, 1986년은 민주주의마저 당연하지가 않았던 시대다. 모두가 힘겹게 투쟁했고, 경찰은 결코 시민의 편이 아니었다.
시대는 세진이 동경했던 경찰 조직마저 과거로 돌려놓았다. 과학 수사 개념이 도입되지 않아 사건 수사는 지지부진했고, 현장에서 경찰이 증거를 조작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상부가 원한다면 없는 범인도 만들어냈다. 수많은 대학생이 단지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잡혀 들어갔고, 거리를 걷다 보면 어디선가 전경 버스가 들이닥치고 최루탄이 터지던 시기다. 1987년 6월이 코앞이었다. 대통령은 서울올림픽만 무사히 끝내면 세계로부터 독재 정권의 위신을 세울 수 있다 믿었고, 영화와 프로 스포츠 경기를 통해 대중을 우민화하던 시절. 그리고 그 수단으로서 경찰 조직이 있었던.
세진은 신문을 반으로 접고, 성당 정문까지 뻗은 내리막을 내려다보았다. 그 끝엔 성모 마리아가 있고, 버젓이 전경 버스가 있었다.
그는 경찰이 사람을 구하지 못했던 시기로 돌아왔다. 절차보단 권위가 기승을 부리던 20세기로. 86년도에도 변함없이 경장의 신분인 그로서는 저 거대한 압력 앞에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있지 않나.
어디까지 지켜낼 수 있을까? 무고한 사람을 경찰 권력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까? 합리적 수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할 수는 있을까? 훼손 없이 증거물을 보존하고 오로지 논리와 이성, 세진이 알고 있는 상식과 도덕 선에서 난제 사건을 수사하고 피해자를 구제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21세기로 돌아갈 수는 있고?
가만히 숨을 조여오는 무력감이 있다. 혹은 두려움. 그럼에도 세진은 지키고 싶은 가치가 있고 또 나름의 긍지가 있었던 까닭에.
성당의 첨탑에서 종이 울렸다. 소리에 놀란 비둘기가 일제히 날았고, 대학 캠퍼스에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함성과 구호가 터져 나왔고,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울었다.
끔찍한 시대로구나. 세진은 가만 몸을 낮추어 무릎에 고개를 묻고 생각했다. 비극적이면서도 뜨거운 열망과 부르짖음으로 끓어오르고 있는 시대. 부정의는 부유하고 정의는 몸을 낮추어 우리 모두의 발밑에 도사리고 있었던.
1987년까지 약 1년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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