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작한 차가 울리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도 군중은 꿈쩍하지 않았다. 제복을 갖춰 입은 경찰들이 차에서 내려 목소리를 높였다. “잠시만 지나가겠습니다.” 조그만 은행을 둘러싼 사람들은 머리 위로 스마트폰을 높이 들고 웅성거리느라 좀처럼 길을 내어주질 않았다. 그들이 경찰 제복을 입었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그들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며 밀지 말라고 역정을 내거나, 혹은 무선 이어폰을 끼고 보이지 않는 청중을 향해 속사포로 떠들어대느라 바빴다. “여러분, 보셨습니까? 방금 허공에….” 경찰들은 사람들을 밀치고 헤집어 전진했다. 그것만으로도 땀이 나고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하여간, 세상이 요지경이다. 간신히 군중 앞까지 나온 경찰 A는 뻐근한 어깨를 두드리며 불만스럽게 입을 삐죽였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만사를 가십으로 취급했다. 길거리에 사람이 쓰러져도 구급차를 부르기보다는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미는 끔찍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얼마 전 새로 깔았다는 보도블록 위로 유리 파편이 어지럽게 널브러졌다. 유리로 짠 여닫이문이 벌집이 되어 있었고, 부상자가 하나 있다더니 깨진 유리문을 치워낸 바닥에도 핏자국이 점점이 번져 있었다. 탄피가 굴러다니고 화약 냄새가 짙게 났다. 부상자는 먼저 도착한 구급대원이 들것에 실어서 간 모양이었다. A를 비롯한 경찰은 현장을 크게 돌아보았고, 관계자를 불러 자세한 사건 경위를 들었다.
요란하게 파손된 이 작은 건물의 용도는 은행이었다. 총기를 난사하는 것 같은 소리가 나더니 유리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깨졌고, 때마침 ATM을 이용하고 있던 초로의 남성이 총탄에 크게 다쳤다. 남자가 인출했던 거액의 돈이 사라졌다. 은행 앞을 지나던 사람들을 비롯해 그 소란스러운 총기 소리를 들은 수많은 군중이 몰려들었다.
수많은 시선이 은행을 지켜보고 있었고, 수십 대의 카메라가 은행에서 돈이 사라지는 순간을 촬영했다. 그럼에도 범인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갔고, 후에 정신을 차린 유일한 부상자조차 대답했다. “돌아보았을 때, 아무도 없었어요.”, “총을 든 사람이 없었다는 의미입니까?”, “아뇨, 정말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어요.” 경찰들은 대낮에 벌어진 이 은행강도 사건이 자신들의 소관을 한참 벗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아나톨리 드미도프입니다.” 초능력 범죄 수사팀의 사람들은 늦지 않게 회의실에 모였고, 아나톨리는 생각보다 적은 머릿수에 적잖이 놀랐다. 물론 특수 수사팀인 만큼 인원이 많을 거라 짐작하진 않았지만, 이 정도로 소수가 모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까닭이다. 로잘린드의 권유로 느릿느릿 소개를 이어가며 회의실 책상에 앉은 이들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어쩌면 오늘 모인 이들이 전부는 아니고, 수사팀이 정해질 때마다 그때그때 모여 안면을 익히는 식인지도 모르겠단 짐작이 들었다. 범죄 수사팀은 그러잖아도 보안이 중요한데, 초능력으로 범죄를 일으키는 이들을 상대하자면 다양한 위험을 고려해야 할 테니까.
그래도 아는 얼굴이 둘이나 앉아 있다는 건 아나톨리에겐 희소식이었다. 책임자인 로잘린드 맥클레어야 아나톨리가 도저히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아나톨리를 키운 가족이고, 난처할 때마다 그에게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는 고마운 은인이었으니까. 그의 맞은편에도 아나톨리가 익히 아는 얼굴이 하나 앉아 아나톨리의 자기소개를 적당히 흘려듣고 있었다. 에이다 맥클레어, 코드네임 「클로버」. 아나톨리와 마찬가지로 로잘린드가 거두어 키운 인물로 명실상부 아나톨리의 누이에 가까운 이였다. 그는 오늘도 새까만 머리칼을 단정히 넘겨 하나로 낮게 묶고 있었는데, 아나톨리와 눈이 마주할 때마다 짓궂은 표정으로 씩 웃어 보이며 귀여운 캐릭터 장식이 달린 볼펜 끝을 흔들었다. 아나톨리가 어렸을 적에 좋아했던 만화 캐릭터였다. 반쯤은 놀리려는 속셈이겠고, 반쯤은 자기소개 정도에 긴장하지 말라는 누이의 배려이리라.
클로버의 옆자리로 시선을 돌리면 피차 더 소개를 나눌 건 없어 보이는 피터 브라운베어가 나른한 하품을 하고 있다. 아나톨리의 첫 출근길을 곤란케 했던 주제에 막상 일을 시작하니 턱을 괴고 클로버가 쥐고 흔드는 볼펜 끝을 따라 까딱까딱 시선을 움직이기만 했다. 그리 성실한 타입은 아닌가 싶어 조금 빤히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면, 다 듣고 있다는 것처럼 눈가에 짓궂은 미소가 스쳤다. 알다가도 모를 인간. 피터에 관한 인상은 거기서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로잘린드의 옆으로 아나톨리가 시선을 두었을 무렵, 늘어놓던 자기소개가 끊어졌다. 준비했던 말이 끝난 것이다. 그는 잠시 어색하게 회의실 화이트보드 앞에 서 있었는데 때마침 클로버가 손뼉을 한 번 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향했다.
“톨랴의 소개는 이 정도로 하고, 다른 분들도 소개 한마디씩 합시다. 우리끼린 새삼스럽지만, 톨랴는 여러분을 모르니까요.”
피는 통하지 않아도 함께 지낸 세월은 통해서 그랬을까. 그는 가끔 낯을 가리는 아나톨리를 대신해 필요하고 또 적절한 조치를 기민하게 취할 때가 있었다. 덕분에 아나톨리는 더 말을 쥐어짤 필요가 없어졌다. 사람들이 일어나 아나톨리에게 청하는 악수에 응하고 소개를 듣기만 하면 되었다.
“우린 좀 새삼스럽다, 그쵸?” 모두가 기립하니 피터 브라운베어가 그들 팀 중 가장 신장이 크고 체격이 좋다는 게 특히 와 닿았다. 아나톨리는 큰 키에 어울리도록 평균보다 한참 큼직한 그의 손을 잡고 짧고 무뚝뚝하게 흔들며 대답했다. “그렇더라도 정식으로 인사 나눠 나쁠 건 없겠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브라운베어 씨.” 피터는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고선 아나톨리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던 이유는 클로버에게 이야기를 미리 들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혹시라도 불법 사찰을 했다고 오해하진 말라면서.
피터가 자리로 돌아가니, 그의 뒤에 쏙 숨겨져 있던 사람이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불쑥 아나톨리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하필 피터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던 통에 대비가 되어 순간 키가 작아 보였는데, 막상 아나톨리 앞에 마주 서니 그리 키가 작다는 인상을 주진 않았다. 클로버와 체구가 비슷할까, 아나톨리는 무심코 생각했다. 상대는 곱슬거리는 짧은 단발을 했고, 언뜻 나른한 것처럼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날카로운 시선이 눈에 띄었다. 꼿꼿한 자세며 다림질 선까지 깔끔하게 산 정장 차림을 미루어 녹록한 사람은 아니겠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아나톨리를 똑바로 응시했다. “미셸 쇼라고 합니다, 아나톨리 씨. 미셸이라고 부르세요.” 아, 의외로 성을 부르진 않는구나. 아나톨리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뒤이어 아나톨리가 자기소개를 읊는 내내 장난스럽게 굴었던 클로버, 에이다 맥클레어가 쾌활한 표정을 하고 다가서서는 새삼스러운 악수를 청했다. “널 여기서 보게 되니 기쁜데. 내심은 기다리고 있었어.” 아나톨리는 그제야 표정을 조금 풀었다. 낯익은 얼굴과 잘 아는 반응은 긴장을 녹여내기에 좋았다. “어차피 이렇게 되었으니 열심히 해볼게.” 넉살 좋고 사람 좋은 누이다. 단단한 사람이기도 했고. 그렇기에 아나톨리는 경찰로 재직하던 시절에도 가족이 아니라 일에 골몰할 수 있었다.
“톨랴라고 부르나요? 애칭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나톨리와 악수를 하기 위해 나온 이는 아나톨리와 얼추 신장이 비슷했다. 조금만 시선을 들면 바로 연한 갈색 눈동자와 덜컥 눈이 마주칠 정도였다. 건조한 시선이 아나톨리를 훑었다. 아나톨리 머리 위로 삐죽 솟은 설표 귀가 무심코 움찔거렸는데, 그가 주시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그의 귀와 꼬리라는 인상을 받았던 까닭이다.
“네, 뭐, 일단은요.” 왜 저렇게 쳐다보지? 그래도 직장 동료이니 애칭보단 성이나 이름으로 불러주길 원한다고 말하려던 아나톨리는 당황한 나머지 어설픈 대답을 우물우물 흘렸다. “그럼 톨랴라고 할게요. 전 피터처럼 살가운 성격이 아니니까, 애칭이라도 부르면 금방 가까워질지도 모르니까요. 아, 전 제이미 마운트라고 하는데….” 그는 나른하게 말끝을 흐리며 악수를 하자는 듯이 손을 불쑥 내밀었고, 아나톨리는 미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황급히 그의 손을 쥐었다. “톨랴는 설표 귀가 없으면 이런 인상이군요.”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엉뚱한 소릴 듣고, 아나톨리는 건네려던 인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남는 손을 뻗어 제 머리 위를 한 번 쓰다듬었다. 늘 머리 위에 솟아 있던 귀가 손끝에 걸리지 않았다.
아나톨리는 놀라 커진 눈으로 제이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한 겁니까?” 막상 그는 어깨만 한 번 으쓱이고 아나톨리의 손을 놓았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며 소리 죽여 웃고 있던 피터가 자리에 앉은 채로 설명을 덧붙였다. “그냥 익숙해져요, 제이미는 그런 초능력자라서 말입니다.” 초능력을 무효로 만드나? 아나톨리는 얼떨떨한 눈빛으로 제자리로 돌아가 앉는 제이미를 지켜보았다. 어쩌면 본질적으론 다른 능력일지도 몰랐다.
“자, 인사들 나눴으니 바로 일 얘기를 좀 할까.” 로잘린드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손뼉을 한 번 쳤다. 아나톨리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그는 사람 머릿수만큼 종이 파일을 옆구리에 끼고 돌아온 참이었다. 파일은 모두에게 하나씩 돌아갔고, 아나톨리는 자리에 앉아 파일을 열어보았다. 첫 출근부터 현장인가? 흔한 일은 아니었다. 연방수사국 수사관은 경찰보다 특수한 직종이었고 아나톨리는 물론 경력직에 해당했지만, 출근 첫날은 수사국 건물을 소개받고 일의 절차를 전달받는 등 기초적인 인수인계로 보내는 게 통상적일 터였다.
아나톨리의 맞은편에 앉아 마찬가지로 파일을 뒤적이던 피터 브라운베어가 무심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오늘도 현장 일인가요? 톨랴 오늘 첫 출근인데.” 말로 하지 않아도 모두가 기저에 깔린 전제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초심자를 데리고 현장에 나가라니, 아직 서로 합도 맞지 않는데 무리가 아니겠느냐는 암묵적 동의였다. 모두가 상석에 앉은 로잘린드를 바라보았지만, 로잘린드의 얼굴엔 잔물결 같은 미소만이 어려 있었다.
“하필 당장 움직일 수 있는 팀이 우리뿐이라 빼기가 좀 어렵게 됐어. 마침 이 사건 정도면 톨랴가 기존에 했던 경찰 수사와 비슷할 것 같아 수락한 것도 있고.”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종이 파일 안으로 미끄러졌다.
“은행강도?” 미셸은 미간 사이를 좁히며 말했다. “이건 경찰 소관 아닌가요? 우리보다는….” 미셸의 옆에 앉아 있던 제이미가 말없이 미셸이 들여다보고 있던 파일 아래쪽을 짚었다. 무인 강도 사건. 들어본 적도 없는 단어 조합이 적혀 있었다.
* * *
사건은 뉴캘리포니아와 뉴네바다 일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속 은행강도라고 브리핑을 통하여 전달받았다. 아나톨리는 브리핑을 듣는 내내 사건의 개요 자체는 익숙하지만, 브리핑 화면에서 재생되는 CCTV 녹화 화면은 낯설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무도 없는 은행 앞 대로변에 돌연 총기가 나타나더니 은행을 벌집으로 만들고서는, 사람들이 허둥대며 도망치는 사이 ATM 기계에 버젓이 인출되어 있던 돈이 저절로 사라졌다. 총기를 들고 은행에 뛰어드는 사람도 없고, 몰래 돈을 빼가는 인기척도 없더란 말이다.
초능력자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시대가 도래한 지 오래였지만, 일반 경찰서에서 접했던 사건과는 결이 달랐다. 보통은 초능력을 범죄에 이용하더라도 어설펐고, 금방 덜미가 잡혔다. 결국 사람이 구사하는 힘이니 CCTV를 샅샅이 뒤져보면 어딘가에는 범인의 그림자가 찍히게 마련이었고, 범죄자가 궁리하는 범죄 수법은 이미 수사권에서도 웬만큼 파악하고 있는 수법이었던 까닭이다.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었는데, 세상에 수사기관의 데이터베이스를 뛰어넘는 범죄 수법을 고안할 수 있는 천재적 범죄자는 손에 꼽았다. 대다수는 어딘가 어설프고 흔적이 남아 검거가 되었더란 말이다.
그렇지만, CCTV 화면마저 저다지도 황당해서야 경찰 인력들이 난처할 만도 했다. 돈이 저절로 사라졌으니 지문이 남지 않음은 당연하겠고, 인근 CCTV를 샅샅이 뒤져보아도 초능력을 구사해 총기를 조작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촬영된 바 없었다. 총기가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범인이 총기를 조작할 방도가 있었을 리도 없었다. 한 가지 초능력만으로 가능한 범주의 조작 범위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전문 프로파일러에게 사건 자료를 넘기지 않아도 하나는 명백했다. 수사선에 오래 있었던 이들이기에 모두가 간단히 이를 수 있었던 결론이다.
“아무래도 공범이 있는 것 같죠?” 순간이동 능력자의 도움을 받아 뉴캘리포니아주까지 이동하는 데까지는 10분 채 걸리지 않았다. 팀과 함께 현장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제이미 마운트는 특유의 느릿하게 늘어지는 목소리로 아나톨리에게 그런 식으로 의견을 물었다. 아나톨리는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렇죠. 어떤 초능력자 둘이 어떻게 손을 잡아서 만들어낸 합작인진 아직 속단할 수 없겠지만.” 고개를 기대어두었던 차창 너머로 낯선 도시의 풍경이 굴러갔다. 뉴캘리포니아주 연방수사국에서 은행까지는 차로 15분이라고 했다.
“영상을 보면 갑자기 총이 튀어나왔잖아요. 공간 능력자 아닐까요, 맥클레어 팀장님 같은.” 제이미가 짧게 하품을 섞어 말하자, 아나톨리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그런 계열 능력자는 허공에서 물건을 조작할 힘까진 없는 경우가 많죠. 어쨌든 가서 봐야 알 것 같습니다.”
“톨랴는 경력직이라 좋네요. 일반 경찰서에서도 간단한 초능력 범죄는 취급하죠?”
“단순 절도 사건이라든지, 그런 건 취급하죠. 이 사건처럼 여러 초능력이 뒤얽힌 범죄는 연방수사국에 넘기기는 하지만요.”
“더 골치 아픈 직장으로 이직하셨네요.” 차가 천천히 멈춰 설 무렵, 제이미는 담담한 투로 말을 마쳤다. “우린 톨랴 덕분에 한숨 덜었지만요. 아시다시피 손은 많아서 나쁠 게 없잖아요.”
차에서 내리니 살갗을 스치는 바람이 선선하게 대로변을 쓸었다. 나란히 늘어선 플라타너스 잎은 끝부터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고, 은행은 경찰 저지선(Police Line)을 이용해 출입을 막아두었다. 현장 보존을 위해 복구는 진행하지 않았고, 보행자 안전과 편의를 위해 임시 우회로 안내판이 서 있었다. 차에서 가장 늦게 내린 피터는 “참 화려하게도 한 건 했네요.” 하는 실없는 소릴 했다. 과연, 화려하게 한 건 하긴 했다. 통유리창이 전부 깨지고 총탄을 맞고 깨지고 망가져 성한 ATM 기계가 없을 지경이었으니. 아나톨리는 경찰 저지선을 넘어 은행과 마주하자마자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사용된 총기 종류가 뭔지는 확인이 됐습니까?” 아나톨리가 고개를 돌려 현지 경찰에게 묻자, 순경 제복을 차려입은 키 작은 경찰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인 것은 저희 측에서 조사한 참입니다. 자료가….” 그가 경찰차로 몸을 틀었을 무렵, 노란 경찰 저지선을 넘어온 미셸이 보폭이 넓은 걸음으로 선두에 나섰다.
“미셸.” 현지 경찰과 대화를 주고받던 중 어느새 곁까지 걸어와 있던 제이미의 목소리에 놀라, 아나톨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말투가 느리고 표정이 읽히지 않아 의욕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진 않았는데, 그를 호명하는 목소리만큼은 약간 힘이 들어가 있었다.
“너무 많이 읽지는 마.” 제이미의 당부를 듣고, 미셸은 대답했다. “그럴 참이야. 걱정은.”
현지 경찰이 자료를 가지러 경찰차로 돌아가자, 아나톨리는 미셸과 제이미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시선을 앞에 두었다. 미셸 쇼는 박살이 난 은행으로 들어서며 익숙하다는 듯이 끼고 있던 얇은 흰 장갑의 끝을 당겨 벗었다. 그의 손끝이 바닥에 뒹굴고 있던 탄피를 눌렀다. 사이코메트리인가? 아나톨리가 불현듯 떠올린 가정을, 피터가 목소리를 내어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사이코메트리랍니다. 우리 팀 미셸 말이에요.” 어느새 자연스럽게 아나톨리의 어깨에 팔까지 두르고 있었던 통에, 아나톨리는 샐쭉한 표정으로 그의 팔을 힘으로 떼어내었다.
“그쪽 분은요? 오전에 소개받을 때 초능력에 대해선 들은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만.” 친한 척하지 말라는 의사를 듬뿍 담아 말투에 날을 세웠더니, 피터는 호들갑을 떨었다. “너무 차갑다, 벌써 만난 지 다섯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요.” 어쩌라는 걸까? 아나톨리는 흐릿한 눈빛으로 피터의 얄미운 얼굴을 쳐다보았다. 첫인상은 본인이 말아먹었는데.
“파동으로 의사소통을 전할 수 있습니다.” 피터의 깔끔한 대답을 듣고, 아나톨리는 시선을 도로 미셸에게 두며 되물었다. “텔레파시 같은 건가요?” 피터는 어깨를 으쓱였다. “비슷한데 좀 달라요. 한 마디로 딱 설명하기 좋은 능력은 아니어서….”
“이동 능력을 사용한 흔적이 읽히네요.” 미셸의 단정한 말씨가 피터의 말허리를 잘랐다. 개의치 않는지, 피터는 도로 무심한 표정을 얼굴에 그려내며 물었다.
“이동 능력? 그것뿐입니까?”
“네, 당장은요. 더 읽기 시작하면 제게 부담이 올 것 같아서.”
“총기를 이동시키기만 해서는 조작할 방법이 없었을 것 같은데.” 아나톨리 또한 피터의 말에 동의했다. 이동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랬다간 총기가 허공에 떠 있기는커녕, 은행 앞에 도달하자마자 맥없이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을 테니까.
“톨랴가 공범이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제이미가 나른한 하품을 섞어 말했다. “염동력을 구사하는 초능력자라든지, 공범이었던 거 아니에요?”
가망은 있었지만,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주변 CCTV에 총기를 조작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찍힌 바 없었던 까닭이다.
“우선은 현장을 좀 더 돌아보죠. 연쇄 은행강도라면서요?” 미셸은 도로 손에 흰 면장갑을 드리우며 말했다. “다른 현장을 더 읽어보면 뭐라도 더 잡힐지도 모르니까. 너무 속단하진 말자고요.”
* * *
살인은 저지르고 나면 반드시 흔적이 남았다. 오웬 체스터 또한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시신을 태워도, 흐르는 물에 담가 씻기고 부패하도록 만들어도 요즘 같은 시대엔 신원 조회가 어렵지 않았다. 행성 이주가 가능할 만큼 과학이 발전했고, 인간의 능력이 진화했다. 초능력 범죄를 전담으로 수사하는 특별 수사팀이 있는 것이야 대중도 다 아는 사실이었고, 까닭에 연쇄 살인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연속된 범죄로 발전하기 전에 어설픈 범죄자들은 최초 범행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검거되었으니까.
“이, 이제 어떡할 거야? 죽은 거 같아….” 창고의 공기는 습했다. 간밤에 비가 내렸고, 창이 나지 않은 공간이라 한 번 들이찬 습기는 좀처럼 밖으로 빠지지 않았다. 시신은 두 남자의 발치에 널브러져 있었다. 콘크리트를 발라 만든 지저분한 바닥 위로 진득한 피가 흘렀다. 흔적이 남고 있다. 피를 닦아내어도 핏물이 흘렀던 길이 남고 수사관이 그들의 목을 조여올 것이다.
창고 가득 오고 가던 고성(高聲)은 사그라들었다. 둥그런 전구가 드리우는 누런 빛이 사멸해 갔다. 창백한 안색을 한 스미스는 굳어가고 있는 시신을 차마 쳐다도 보지 못했고, 검은 야구 모자를 눌러쓴 오웬은 더러운 운동화 코로 시신의 옆구리를 툭 찔렀다. 혀를 찼다.
“그러게 적당히 했으면 좋았잖아.” 오웬은 미간을 좁히며 투덜거렸다. 스미스는 이제 어떡할 거냐며 물었지만, 그것만큼 멍청한 질문이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달리 선택지가 있나? 이제 그들의 운명은 신에게 있다. 꼬리를 잡힌다면 그것 또한 저 불공정한 신의 농간이요, 그들이 끝까지 자유를 누린다면 그마저 저 잔망스러운 하늘의 뜻이다.
“태우는 수밖에.” 오웬의 입에서 떨어진 차가운 한마디에 스미스는 덜덜 떨리는 고개를 들었다.
“태…, 태워?” 스미스는 단어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이 더듬어 되물었다, “그, 그래도 들킬 거야. 연방수사국엔 별의별 초능력자들이 많아, 알잖아….”
“그럼 가만히 앉아서 잡힐까?” 오웬은 노골적으로 시신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다 잘살아보자고 저지른 일인데 너는 여기서 잡히고 싶어? 인생 바꿔주겠다고 했잖아. 너도 언제까지고 그 바닥을 기면서 시궁쥐처럼 살길 원하진 않을 거 아냐.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알전구의 빛이 점멸한다.
“말만 고분고분 잘 들으면 한탕하게 해준다니까 그래.”
* * *
강도가 들었던 은행을 빠짐없이 돌아보고 나니 도시에는 석양이 드리웠다. 미셸이 현장에 들어설 적마다 읽을 수 있는 만큼 최선의 흔적을 읽었으나 다른 진척은 없었다. 이동 능력의 흔적은 꾸준히 발견되었으나 그 밖의 정보는 미셸의 손끝에 걸려들지 않았다. “맥 빠지네.” 연방수사국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피터의 입에서 샌 실없는 소리였다. 아나톨리는 그 힘 빠지는 소리에 공감했다. 어깨에 힘이 좀 빠졌다. 사이코메트리를 동원했음에도 이렇게까지 아무 단서가 걸려들지 않을 줄은 몰랐다. 다양한 초능력자들이 모여 수사선에 뛰어들면 경찰 시절보다 일이 수월할 것 같다고 짐작했지만, 역시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이다. 현장은 발로 뛰는 수밖에 없었고, 부족한 단서로 머리를 맞대고 추리의 밑그림을 그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경찰이 이 바닥에서도 경력으로 인정되는군. 아나톨리는 출근 첫날 만에 실감했다.
피로가 몰려들었다. 차가 멈추고, 뉴캘리포니아 연방수사국 앞에 내릴 무렵엔 긴장으로 어깨가 뻐근할 지경이었다. 기지개를 한번 쭉 켜고 고개를 들면 도시엔 석양이 저물어 차츰 별 박힌 어두운 하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바람이 한층 서늘했다. 수사국 건물을 오가는 이들은 하나같이 초췌한 몰골이었는데, 수사관들은 어딜 가나 그랬다. 스스로를 꾸미고 입힐 시간에 사건 자료를 한 장 더 봐야 하는 직업이었으니까.
“영 건진 게 없는데 어떡하죠?” 수사국 입구에 들어서며 제이미 또한 나른한 하품을 토했다. “이동 능력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단서가 못 되잖아요. 뻔하다면 뻔한 사실이기도 했고….”
수사국 건물에 들어서면 말간 빛이 들었다. 아나톨리는 아침에 지급 받은 임시 ID 카드를 꺼내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재킷 안주머니로 손을 넣으며 말했다.
“경찰로 일했을 적의 경험을 토대로 지레짐작하자면, 이동 능력자만이라도 잡으면 게임 끝났다고 봐도 좋을 사건이긴 하죠.”
ID 카드를 먼저 찍고 수사국 입구를 통과한 제이미가 아나톨리를 돌아보았다.
“공범 사건이니까?” 제이미가 되묻자, 아나톨리는 임시 ID 카드를 카드 리더기에 읽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강도 사건이니까.”
“하기야, 강도 사건의 경우 공범끼리 사이가 좋은 경우는 드물긴 하죠. 결국 꼭 마지막에 틀어진다니까.” 아나톨리가 입구를 통과하는 모습을 무심한 눈길로 구경하던 피터 브라운베어가 한마디 거들었다. 제이미 마운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피터를 한 번 올려다보았고, 눈이 마주치면 피터는 금방 서글서글한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훔쳐 간 돈을 분배할 때 꼭 문제가 생기거든요. 뭐, 요컨대 그겁니다. ‘내가 더 위험한 일을 감수했는데 돈은 왜 이것밖에 안 주냐?’…심하면 공범끼리 살인이 나기도 해요. 늘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이럴 때 딱 타이밍 좋게 살인 사건이 나면 보통 그쪽이죠.” 미셸이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그렇다고 살인이 나길 바라선 안 되겠지만….”
피터는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무렴 그렇다고 살인 나길 바란다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팀 내 제 이미지가 너무 안 좋은 거 아닙니까?” 미셸은 어깨만 한 번 으쓱할 뿐, 대꾸하진 않았다.
어쨌든, 부족한 정보나마 취합해서 머리를 맞대는 수밖에 없었다. 우선 저녁을 먹고, 휴식을 조금 가진 후에 회의실에서 모이기로 했다. 쉬지 않으면 굴러갈 머리도 굴러가지 않았고, 볼 수 있었던 단서마저 놓치기 마련이니까.
식당은 지하에 있었다. 다 같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는 도중에도 실없는 대화가 조금 오갔고, 얼굴을 모르는 뉴캘리포니아주 연방수사국 직원들이 입구와 1층 복도를 흘러 다녔다. 아나톨리는 설표 귀를 쫑긋, 움직였다. 오늘 초면인 사람과 지난한 수다를 나누기에는, 피로함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이런 사건은 우리 관할이 아니지 않아? 화재 사건이잖아. 소방당국의 일이라고.” 아나톨리 일행의 곁을 스치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였다. 어디선가 화재가 났구나, 아나톨리는 그저 짧게 하품했다.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잖아. 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도 신원 확인은 한 번 해야지. 소사체가 발견됐으면.”
“본인 소유 건물이라며? 그냥 부주의로 인한 화재겠지.”
“좀 수상한 점은 있다던데. 담당 부서 말 들어보니까.”
“어떤?”
“타 죽은 사람의 신원을 조사했더니 이동 능력자라더라고. 그럼 불이 났다는 걸 알았을 때 바로 초능력을 사용해서 창고를 빠져나갔어야 말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신호가 울렸다. 모두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려는 가운데, 아나톨리는 몸을 틀어 1층 복도를 내달렸다. 대화를 나누며 1층 복도 끝으로 걷던 두 사람을 잡아채자, 뉴캘리포니아주 연방수사국에서 오래 일한 것으로 보이는 중년의 수사관은 아나톨리를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누군지 알아?” 수사관 중 하나가 아나톨리의 설표 귀와 꼬리까지 곁눈질로 살피며 묻자, 다른 한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아나톨리는 숨을 한 번 크게 골랐다.
“뉴뉴욕에서 파견 나왔습니다. 초능력 범죄 수사팀의 아나톨리 드미도프라고 합니다.”
“…어이고, 멀리서도 오셨네. 그런데 무슨 일로….”
“방금 말씀 나누시던 화재 사건에 관해 좀 자세히 듣고 싶어서요.”
수사관 두 사람은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아나톨리는 물러나지 않고 힘주어 말했다.
“수사 관련으로 드리는 요청입니다.”
이럴 때 살인이 나면, 보통 그쪽인 법이다.
* * *
화재 사건 피해자의 신원을 조사한 서류를 꼼꼼히 확인하고 있자니, 피터 브라운베어가 도넛 한 상자를 열어 아나톨리의 앞에 밀어두었다. “성실해서 큰일이시네.” 그는 8개가 들어가는 도넛 상자에서 아무런 토핑이 올라가지 않은 밋밋한 도넛을 하나 꺼내 물었다. 테이블에 적당히 기대어 선 것은, 팀과 약속한 쉬는 시간이 아직 10여 분은 남았던 까닭이다.
“쉴 땐 쉬어야 머리가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단 거 안 좋아하신다고 그러셨던 것 같은데.”
“피곤해서 좋든 싫든 당분을 좀 먹어야겠더라고요. 살기 위한 발악이죠.” 그는 아나톨리의 입에도 설탕을 입힌 도넛을 물려주었다. “자, 톨랴도 하나 들어요. 수사국에서 주는 간식비로 사 왔거든요. 먹는 편이 단연 이득입니다.”
“…자료 보고 있잖습니까.” 아나톨리는 미간 사이를 대놓고 좁혔다가 마지못해 도넛을 한입 베어 물었다. 정말 성가신 인간이다. 아나톨리로서는 그가 다른 팀원들처럼 차라리 어디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와주는 편이 스트레스가 덜할 거였다.
도시 외곽 지역의 창고에서 일어난 화재로 사망했다는 이는 물건 및 사람을 정해진 좌표로 이동시킬 수 있는 초능력자였다는 모양이다. 적성을 살려 물류 업계에서 일했고 최근에 실직했다. 회사의 정리해고는 아니었다. 작은 기업이었고, 운영 부실로 도산하면서 회사에 재직하고 있던 이들이 전부 직장을 잃은 사건이었다. 그 이후 1년 가깝게 직장 없이 살았고 근래의 행적은 따라서 마땅한 기록이 없었다. 거주지를 몇 번 이전했다는 것, 그때마다 면적이 더 좁고 치안이 불안정한 골목으로 쫓겨갔다는 사실만이 확고했다.
“생계형 범죄에 손을 댈 법도 한 상황이긴 하네요.” 남은 도넛을 입에 밀어 넣고, 어느덧 아나톨리와 마찬가지로 사건 자료를 내려다보고 있던 피터는 말했다. “만에 하나 이 작자가 은행을 턴 그 이동 능력자라는 가정 아래 하는 소리지만.”
“제 생각엔 정답 같긴 한데요.” 아나톨리는 자료를 한 장 넘기며 대답했다. “최근 통화 기록이 좀 수상해서.”
“왜요? 창고를 불태우자고 획책하는 통화 기록이라도 나왔습니까?” 피터가 서글서글한 눈을 한 번 끔뻑이며 묻자 아나톨리는 어깨만 한 번 으쓱했다.
“특정인들과 나눈 통화 기록이 너무 많습니다.”
“누군데요?”
“같이 물류 센터에서 일했던 직장 동료라는데.” 아나톨리가 고갯짓으로 제 손에 들린 서류를 가리켰다. 피터는 태평한 눈빛으로 서류에 적힌 피해자와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그들의 간단한 신원을 읽었다. 이름과 나이, 현재 직업과 소재지, 초능력 따위를 나열한 기초 정다. 보아하니 하나는 천리안 능력자, 그리고….
“톨랴, 혹시 퇴사한 직장의 경찰들이랑 매일 연락합니까?”
“안 하죠. 원래 퇴사한 회사는 돌아보지도 않는 겁니다.”
“이동 능력자, 천리안 능력자, 염동력 능력자 조합에 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죠?”
“뭐, 섣불리 넘겨짚으면 안 되겠지만.” 아나톨리는 서류를 덮었다. “은행을 털기 좋아 보이는 공범 조합이긴 하죠. 마치 총기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도록 연출하기에 참 좋아 보이긴 하네요.”
피터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웃었다.
“수상하면 들쑤셔 보는 게 우리 일이잖습니까. 안 그래도 실마리가 없었는데, 전(前) 직장 동료 세 분께서 모여 건강을 위해 배드민턴을 치셨는지 아니면 머리를 맞대고 나쁜 일을 꾸미셨는지 수사한다고 누가 뭐라고 하지야 않겠죠.”
곧 있으면 다른 사람들도 돌아올 거 같네요. 피터가 스마트폰과 연동한 시계를 들여다보며 덧붙이자, 아나톨리는 남은 도넛을 하나 더 물었다. 무릇 어떤 직장에서 일하든 업무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더 화살처럼 흐르게 마련이었다.
* * *
수사국 복도의 불빛이 깜빡였다. 오가는 이 없고, 꽉 찬 적막을 사탕을 깨무는 소리가 갉았다. 제이미 마운트는 복도에 설치된 키 작은 의자에 앉아 목캔디를 감싸고 있던 은박지를 반으로 접고, 또 접었다. 사탕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지나가며 마주친 수사국 직원이 건넨 작은 호의를 무시할 만큼 경우를 모르진 않았다. 사탕은 깨물면 인공적인 향을 가득 남기며 부스러졌고, 까끌까끌한 설탕 조각이 입안에 굴러다녔다.
그는 아나톨리와 피터의 추측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지 않았다. 실마리가 없는 것은 사실이고, 이런 시기에 우연히 벌어졌다기에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살인이라는 데에 동의했다. 그런데도 손이 모자랄 게 뻔한 피터와 아나톨리를 따라나서지 않고 복도에 앉아 있기로 결심한 데에는 다른 이유는 없었다. 미셸은 남을 테니까. 화재 사건의 피해자가 간신히 남겼다는 유품으로부터 기억을 읽고 나올 그를 친구로서 걱정하니까. 그가 사실은 어떤 물건으로부터 기억을 뽑아내는 행위가 실로 도덕적인가 골몰하는 다정한 성정이란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까닭에.
죽기 직전의 단말마는 읽는 사람의 정신에도 상흔이 남게 마련이다. 미셸은 일이 끝나면 유품을 두고 말간 불빛 아래 복도로 나오지만, 그 얼굴은 늘 태연하고 무던하지만, 제이미는 그 표정을 더는 믿지 않았다. 무의미하게 접었다 펴던 은박지를 걸치고 있던 항공 점퍼 주머니에 쑤셔 넣고선 고개를 들어 물었다. “괜찮아?” 그러면 미셸은 약속한 것처럼 “물론이지.” 산뜻한 거짓말을 했다.
“그래도 최후가 끔찍하진 않았나 보네. 단순 화재 사건이었어?”
“아니.” 미셸은 손목까지 장갑을 당기며 대답했다. “싸움이 있었던 것 같아. 살인 장면까진 못 봤지만, 그 자리에 세 명이 있었는데 한 사람의 시신만 발견되었으니 명백한 살인이야.”
제이미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허리를 폈다.
“뭐라고 하면서 싸웠는데?”
“돈 문제. 내가 더 일을 많이 했는데 왜 이것밖에 안 주냐고 했던데…진부하지?”
미셸의 질문을 듣고 제이미는 어깨만 으쓱했다. “악은 원래 좀 진부하잖아. 고생했어, 미셸.” 낮은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면 어깨가 뻐근할 지경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경력직을 쓰나 봐. 톨랴와 피터가 들으면 기뻐하겠는걸. 허탕이 아니게 됐으니까….”
* * *
그 전당포는 지하에 도사리고 있었다. 습기 제거제가 곳곳에 걸려 있었고, 불빛이 밝진 않았다. 철창 같은 창구에는 체구가 작은 직원이 앉아 신문에 실린 십자말풀이를 풀고 있었다. 입구가 낮아 피터는 고개를 조금 숙여 전당포 안으로 들어섰다. “키가 크면 이게 곤란하다니까….” 피터가 무심히 툴툴거리자 아나톨리는 속으로 그럼 덜 크지 그랬냐는 딴지를 떠올렸으나 입밖엔 내지 않았다.
직원은 피터가 일부러 낸 인기척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십자말풀이를 들여다보느라 미끄러진 뿔테 안경이 코끝에 걸려 있었다. 그는
“물건 맡기시려고요?” 그는 흘러내린 안경을 추스르며 아나톨리와 피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까만 눈망울은 특히 피터를 주시했는데, 그만한 체구는 인상에 진하게 남을 수밖에 없으니 초면이라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아뇨.” 피터는 품 안에서 신분증을 꺼내 창구 앞에 들이밀었다. “수사차 방문했습니다. 연방수사국 수사관입니다. 혹시 사장님 안쪽에 계십니까?”
많이 잡아도 고작 스무 살 조금 넘겼을 것 같은 앳된 인상의 직원은 눈을 크게 뜨고 피터가 제시한 신분증을 쳐다보았다. 연방수사국. 일반 시민들은 살면서 들을 일은 있어도 볼일은 없어야 할 기관명이 적힌 신분증이다. 그는 신문을 반으로 접어 슬그머니 카운터 한구석으로 밀었다. 손끝에 걸린 볼펜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연방수사국에서 이런 조그만 전당포엔 무슨 일이신데요? 사장님은 안 계세요.”
“아, 경계하실 것 없습니다. 당신이 아니라 이 전당포 사장인 오웬 체스터 씨께 수사 협조를 받아야 할 사건이 생겨서요.”
직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희 사장님이 무슨 범죄라도 저질렀나요?”
“그분의 친한 친구분께서 살인 사건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피터의 옆에서 상황을 살피던 아나톨리가 한마디 거들며 나섰다. “창고에서 살해당하고 시신은 불에 태워졌죠.”
“사, 살인이요? 오, 오늘 신문엔 아무 기사도 없었는데요.” 직원의 시선이 카운터 한구석으로 꽂혔다. 십자말풀이를 하려고 샀지만, 가게를 지키는 동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큼직한 기사 정도는 훑어본 참이었다.
“아직 언론 발표가 나지 않았지만, 이런 사건은 초동 수사가 중요해서요. 마침 피해자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체스터 씨를 만났다는 증언이 나와 만나 뵙고 수사 협조를 요청할 생각으로 방문했습니다.” 아나톨리는 피터의 어깨너머로 창구 안을 살펴보려 애를 쓰며 말했다. “정말 안 계십니까? 출근하시고도 남았을 시간이라 방문했는데요.”
“요즘은 출근 잘 안 하세요.” 직원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제도 은행에서 출금한 돈만 채워두시고 급하게 나가시던걸요.”
은행. 피터와 아나톨리는 시선을 한 번 교환했다. 전당포치고도 점포는 작았고, 위치는 도심에서 멀었다. 창구 너머 카운터 책상 위에 가득 쌓여 있는 메모지는 일수(日收)가 가능하다는 홍보용 메모지였고, 직원은 임금이 정해진 법보다 적어도 눈치채기 어려울 만큼 나이가 어렸다.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피터는 얼굴 가득 넉살 좋은 미소를 그렸다. “혹시 전당포 장사는 잘되나요?”
“그, 글쎄요? 전 일개 아르바이트생이니까 실제 매출이 어떤진 모르겠지만….” 요컨대 시키는 일만 하고 있어 자세한 장부는 모르겠다는 방어적 대답이었다. 어린 직원은 수사관이라는 두 남자를 부담스럽게 느끼는지 시선을 어디에다 둬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불안하게 눈을 깜박였다.
“…손님이 별로 없다고 느끼긴 하나…? 제, 제 개인적으로요.”
“사장님께서 돈을 채워 넣는 걸 깜빡한 날이 있습니까?”
“근래엔 없었던 것 같은데요. 오시면 항상 어디선가 돈은 잘 마련해오시더라고요. 그래서 제 생각보단 가게를 유지할 만큼은 장사가 되나 보나, 하고 있었죠.”
“지금 체스터 씨께 연락 가능하십니까?”
“모르겠는데요…. 전화해볼까요?”
“아뇨, 아뇨.” 피터는 어느덧 스마트폰을 꺼내든 직원을 만류했다. “그러실 것까진 없습니다. 전화번호만 가르쳐주시면 저희 쪽에서 기관을 통해 연락하죠.”
아나톨리는 생각했다. 실없는 것 같아도 할 일은 하는구나. 전화번호 정도면 충분했다. 수사국에 맡기면 스마트폰의 위치를 추적할 수도 있을 테니까. 돈을 전당포에 두었으니, 몸을 숨기고 뉴스를 확인하며 화재 사건이 살인 사건인 것이 들통났는지 수사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더라도 이 근방에서 벗어나진 못했을 터다.
현금은 기록을 남기지 않지만, 때로는 범인의 발을 묶는 법이다.
* * *
뉴캘리포니아의 밤하늘은 맑고 불어오는 바람마다 소금기가 묻어났다. 코드네임 ‘클로버’, 에이다 맥클레어는 고개를 들어 달을 가리는 달무리에 시선을 던졌다가 날숨을 길게 내려놓았다.
해가 서녘으로 저물고야 팀에게 남아 있던 잔업을 처리하고 뉴캘리포니아에 당도했을 적에 사건은 제법 진척을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연방수사국에 남아 있었던 제이미와 미셸을 통해 현재 상황을 전달받았다. 마침 손이 모자라던 차에 타이밍 좋게 오셨다며 제이미 마운트는 그녀를 담담히 환영했다. “톨랴와 피터가 출동한 전당포 근처를 감시해주세요. 당국에 허락을 받아올 테니까, 마담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주시면 돼요.” 그의 부탁에 클로버는 호쾌하게 웃었다.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 그 두 가지 일을 하기 위해 모인 다섯 사람. 본부에 남은 리더 로잘린드를 포함하면, 총 여섯 사람이다.
바람이 불어 다행이로구나. 그녀의 넘겨 묶은 머리칼이 흩날렸다. 떨어질 것처럼 어깨에 걸쳤던 재킷을 한 손으로 붙잡고, 그녀가 문 파이프에서 또 흘려보내는 날숨에서 희뿌연 연기가 피었다. 바람이 불 적마다 연기는 더께처럼 도시 골목 사이에 내려앉았고, 사람들의 발목 아래 도사렸다.
오늘 밤, 덫에 걸린 이는 눈이 멀고 발목이 잡힐 터였다.
* * *
오웬과 스미스는 공범의 시신을 불태우고 밤이 깊도록 답답한 반지하 원룸에서 꼼짝하지 않았고 빠르게 한계에 부딪혔다. 일주일쯤은 이렇게 살 수도 있었다. 길면 2주, 어쩌면 한 달쯤은 비좁고 쿰쿰한 이곳에서 벽에 코를 박고 모로 누워 깜빡깜빡 잠만 청하며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문제는, 그 삶이 영원할 수는 없으리라는 거였다. 이렇게 살자고 많고 많은 은행을 돌아다니며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었다. 잘살고 싶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오늘보다 내일을 훨씬 더.
“수사망이 좁혀 오기 전에 돈 찾아서 뉴캘리포니아를 뜨는 게 신상에 이롭지는 않을까?” 누가 먼저 그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반지하 방엔 담배 연기가 가득했고, 오웬이 독한 담배를 한 갑 줄지어 피우는 동안 스미스는 각종 신문에 실린 십자말풀이를 20개나 풀었다. 수사기관 측에서 아직 그들에게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창고 화재 사건은 초능력 수사팀으로 이관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단순 화재로 종결됐을 수도 있고, 만약 그렇다면 아무도 그들의 뒤를 쫓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은행강도 현장에서 그들도 모르게 흘린 어떤 단서가 더 나오기 전에 정든 고향을 떠나는 편이 좋을 성싶었다.
오웬은 조그마한 창문을 열었다. 창문에 걸린 비좁은 창살 틈으로 독한 담배 연기가 빠져나가고 골목에 도사린 차디찬 안개가 밀려들었다. 가로등 불빛이 깜빡였고, 아스팔트를 덮은 도시 뒷골목엔 오가는 이라곤 없었다.
“스미스.” 오웬은 담배를 끄고 차디찬 바닥에 부쩍 짧아진 담배꽁초를 내던지며 말했다. “일어나. 아무래도 지금 아니면 못 빠져나갈 것 같아.”
“자, 잡히진 않겠지?” 스미스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신문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정적을 갉았고, 옹송그린 등 위로 형광등에서 떨어지는 말간 빛이 닿았다. “아직 안 들킨 거 맞지? 응?”
“당연하지.” 오웬은 골목을 주시했다. “아무도 없어. 내 눈에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확실해.”
* * *
“이러면 주변에서 민원이 들어오지 않나….” 전당포를 빠져나온 골목엔 어느덧 안개처럼 희뿌연 연기가 곳곳에 스며 있었다. 아나톨리로서는 익숙하고, 그래서 의아했다. 그의 누이, 에이다 맥클레어의 초능력이었다. 가시적으로 보이는 연기는 사람들의 초능력을 증강하거나 시들하게 했는데, 골목마다 그녀가 풀어놓은 연기가 배회하고 있는 것을 미루어 시가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건물에서 연신 파이프를 피우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쩌면 도시 민원을 접수하는 콜센터는 벌써 불난 듯이 바쁠지도 몰랐다. 이 시대의 인류는 초능력이 없이 사는 법을 많이 잊어버렸다.
피터는 고개를 숙여 건물을 빠져나오며 나직하게 웃었다.
“아마 이 일대에 미리 고지가 갔을 겁니다. 재난 문자로. 나름대로 절차가 있거든요.”
“용의자들한텐 소식 안 갔겠죠?”
“물론 제외했겠죠. 운 나쁘면 그래도 소식을 접했을지도 모르지만.” 피터는 기지개를 켜며 나른히 하품했다. “그래도 절차는 지켜야 하니까요. 누군가의 초능력이 누군가의 생명과 직결되기도 하는 시대니까.”
고개를 들면 낮은 담벼락 위로 집 없는 고양이 한 마리가 줄타기하듯 걸었다. 어둑한 밤하늘엔 달무리가 졌고, 가로등 불빛은 골목마다 환한 빛으로 어둠을 씻어냈다. 돌아보면 건물과 건물 사이엔 시에서 마련한 헌 의류 수거함이 설치되어 있었고, 도시 곳곳에 난 생채기 같은 그 좁은 통로 너머로 불빛 번쩍이며 차가 다니는 대로가 보였다.
연기는 대로를 넘지 않았다. 클로버가 판을 조율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애꿎은 사람들에게로 피해가 번지지 않도록. 아나톨리가 주변을 살피는 동안 피터는 미셸이 본부에서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고,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듯이 자전거를 탄 시민이며 지친 몸을 이끌고 귀가하는 후줄근한 양복 차림의 남자가 골목 안쪽으로 사라졌다.
피터는 담벼락에 바짝 붙은 채 말했다. “톨랴, 미셸이 전당포 사장의 사진을 보내뒀는데 한번 볼래요?” 아나톨리는 시선으로 기지개를 켜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중년 남자를 주시하다 스마트폰의 화면을 밝혔다. 사내 메신저로 공유된 사진은 방금 골목을 가로질러 사라진 남자와는 영 생긴 게 달랐다.
“역시나 전과가 있었군요.” 아나톨 리가 미간 사이를 좁히며 퉁명스럽게 말하자, 피터는 웃었다. “초범이 저질렀다기엔 대담하긴 했죠. 공범을 죽이고 시신을 불태웠으니.”
전당포를 운영하는 오웬 체스터는 피해자의 전 직장 동료였다. 현재는 부친이 하던 망해가는 전당포를 물려받았으며, 시청에 등록된 초능력은 천리안. 이전에 크지 않은 전과가 몇 개 있었지만, 징역을 살 정도까진 아니었다. 물론 그랬던 덕택에 수사기관에 그의 사진이며 지문, 초능력 정보 따위가 남아 있을 수 있었지만.
화면 속 남자는 특기할 만한 인상이라고 할 게 없었다. 머리카락이 붉었으나 그밖엔 특징이라곤 없었다. 둥근 눈매며 이목구비며 번화가를 걷다 보면 열에 다섯은 그렇게 생기지 않았나 싶을 만큼 선한 인상의 남자였다. 기록된 체구도 크고 우락부락하거나 도드라지게 왜소하지 않았고, 영화에 등장하는 뻔한 악역처럼 험상궂게 생기지도 않았다.
그건 아나톨리가 수사 관련 직종에 종사하며 깨달은 놀랍고 초라한 진실이었다.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 카리스마를 갖춘 특별한 인간이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니라는 것. 악(惡)은 늘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신경을 기울이지 않으면 시선을 사로잡지 못할 만큼 평범하게 생긴 얼굴을 하고 시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상을 산다.
특별한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인류는 누구나 죄를 저지를 소양을 품고 있는 것이다. 서글프게도.
“사진이 한 장뿐인데, 염동력을 구사했을 공범 쪽은 초범이라 정보가 없나…?” 아나톨리는 숨을 쉬듯 독백을 흘렸다가 문득 시선을 들었다. 야구 모자를 쓴 남자가 가로등이 우뚝 서 있던 골목 어귀에서 돌아 나왔다가 아나톨리와 시선이 마주치자 화급히 걸어왔던 길을 더듬어 돌아갔다.
“…톨랴.” 피터 또한 무심한 눈빛으로 골목 안쪽을 주시하다가 성량을 죽인 목소리로 그를 호명했다. 그가 큼직한 손에 들린 스마트폰으로 분주히 메시지를 보내는 모습이 아나톨리의 시야에 걸렸다.
“혹시 연기 잘합니까?”
“그걸 잘했으면 제 직장이 연방수사국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극장이었겠죠.”
“그럼 달리기는?” 피터는 시선을 도로 스마트폰 화면에 두며 물었다. 아나톨리는 설표의 귀를 쫑긋 세웠다.
“지구상에 저보다 빠른 인간이 있을 것 같진 않을 정도는 됩니다.”
“전 가끔 제가 수사관을 하기엔 너무 눈에 띄는 인상착의가 아닐까 싶어요. 이상하게 평범한 시민들도 날 보면 도망간단 말이지.” 가로등 불빛이 미끄러지는 화면 위로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조그만 팝업이 뜨자, 피터는 마치 평범한 근황을 논하듯이 태평한 투로 말했다.
“뭐, 좀 눈에 띄시긴 하죠. 몸을 좀 줄여봐요. 지금의 절반 정도로.”
“할 수 있었으면 키를 한 20cm는 덜어냈을 겁니다. 신께선 야속하기도 하죠. 이 일을 사랑하게 하셨으면 재능도 주셨어야지.”
“아마데우스?” 발목을 덮어내며 골목을 배회하던 연기의 색이 달라졌다. 바람에 흩날리는 하얀 머리칼 위로 무늬가 새겨졌다. 검고 동물적으로 소용돌이치는 문양.
“옛날 영화인데 알아주시네.” 피터는 스마트폰 화면을 끄며 넉살 좋은 시선을 거두었다.
“마담 클로버의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드미도프 수사관.”
코드네임 클로버, 에이다 맥클레어의 초능력이 순풍으로 바뀌었다. 일대의 시민들 주머니에 든 스마트폰엔 또 시끄러운 경보음과 함께 초능력 증폭 경보를 알리는 메시지가 날아갔을까? 아나톨리는 무심코 그게 궁금하다고 느꼈지만, 당장은 그것보다 중요한 목표가 있었다.
인간의 두 다리는 표범보다 빠르지 않았다. 이 순간 그들이 도망칠 수 있었던 유일한 탈출구였던 사람은 화마에 스러진 시신이 되어 영안실에 누워 있었고, 그 배를 불태운 것은 오웬 체스터 본인이다.
* * *
바라는 게 많지는 않았다. 적어도 스미스는 그랬다. 직장에서 해고당하니 거리를 나와도 정 붙일 장소 하나 없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만한 자리 하나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를 가는지 안다는 것처럼 결연하게 걸어 다녔고, 스미스는 흐르는 물속에서 굴러다니며 마모되는 돌멩이라도 된 것 같았다. 카페에서 30분 앉아 있을 자리를 구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했고, 잠을 청할 반지하 방을 유지하려면,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으려면 또 몇 푼 안 되는 돈, 통장에 찍혀 실물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를 그 숫자 몇 자리가 절실했다.
오웬 체스터는 그에게 다른 건 하나도 약속하지 않았다. 그저 밀린 월세를 갚아주겠다고 했고, 거리에 내몰려 쓰레기 수거함 옆에서 잠들지 않게 도와주겠다고만 했다. 계좌에 매일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금액을 넣어주겠다고.
“세상에 공짜는 없잖아.” 체스터는 말했다. “인간다운 삶도 돈으로 사는 거지.”
은행에 무더기로 고여 있는 현금을 훔치고 사람을 죽였다. 어느 순간 스미스는 기울어진 내리막길에 제 몸 하나를 무책임하게 내던진 건 아니었나, 그렇게 후회했다. 구를 수만 있고 거슬러 올라가기란 어려운 것이다.
중력을 거스르기 위해서는 상응하는 의지가 필요했다. 스미스에겐 그럴 체력이 없었다. 기력도 없었고, 사유는 말할 것도 없이.
그리고 그들은 더 많은 이익만을 약속했다. 스스로의 안위만을 가슴에 품었다.
* * *
아나톨리는 그날 밤, 골목에서 오웬 체스터를 체포했다. 야구 모자를 벗기면 미셸이 공유했던 체스터의 사진과 인상이 일치했고, 체스터를 버리고 도주한 스미스를 체포하는 것 또한 시간문제였다. 두 공범은 취조실에서 서로에게 더 많은 죄를 밀어주기에 바빴다. 은행강도를 계획한 주범에게 더 긴 형량이 떨어질 것은 자명했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온갖 구차한 변명이 교차했다. 강도 계획을 세운 건 나였지만, 살인은 저 사람이 저질렀다든지. 증언은 좀처럼 맞아떨어지지 않았고, 인근 연방수사국에서 근무하고 있는 뛰어난 프로파일러가 용의자 면담에 참석할 거라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뭐, 높은 확률로 주범은 체스터겠죠.” 며칠이 지나, 회의실에서 마주친 제이미 마운트는 사건의 진척 상황을 출근한 아나톨리에게 전달하며 무심히 말했다.
“누가 계획했든 범죄는 범죄인데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인정하면 인간이 되는 걸 텐데.” 아나톨리가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며 혀를 차자, 제이미는 나른히 하품했다.
“현금에서 나온 지문이며 뭐며 물증이 나날이 확실해져 가니까, 여기서부터는 형량 싸움이라고 생각한 거 아니겠어요? 체스터 쪽은 판사한테 반성문도 제출했다던데.” 제이미의 말을 들은 아나톨리는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기력이 있으면 선량하게 살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착하게 사는 인간들이 바보라고 생각하는 거겠죠. 왜 어렵게들 살아? 남의 걸 빼앗으면 이렇게 쉬운데,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렇지만 톨랴, 난 그 말 좋아해요. 제이미는 티백이 든 종이 포장지의 입구를 찢어냈다.
“선한 길의 반대말은 사악한 길이 아니라 쉬운 길이라는 말. 누가 했더라? 무슨 위인이었던 것 같은데.”
“…덤블도어요.”
“아, 맞아. 뭐 하는 사람이었죠?”
“마법사예요. 해리 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우와, 옛날 영화네….” 뜨거운 물이 담긴 종이컵에 티백이 가라앉았다. “옛날 영화죠. 애들 영화고.” 아나톨리는 그의 나른한 말을 받으며 피곤한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제법 멋진 말이죠? 애들 영화라도.” 제이미가 턱을 괴고 차를 홀짝이며 물었다.
“뭐, 원래 애들 보라고 만든 영화일수록 인생의 진리를 담고 있잖습니까.” 그것이 아나톨리가 수사관을 하며 깨달았던 진부한 진리 하나였다.
'커미션 작업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팡님 커미션/자캐 1차] 페루노브나 (0) | 2023.02.06 |
---|---|
[익명님 커미션/2차] 추론에 의한 존재증명 (0) | 2022.11.18 |
[듐님 지원 로그] 그대가 무엇을 상상하든, 오로지. (0) | 2022.04.26 |
[민크님 커미션/자캐 1차] 악은 부유하고 정의는 도사린다. (0) | 2022.03.29 |
[롶님 커미션 작업물/자캐 1차] 모든 일엔 첫인상이 중요하다. (0) | 2022.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