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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작업물

[익명님 커미션/2차] 추론에 의한 존재증명

* 해당 글은 잔나비의 <여름가을겨울  봄.>이라는 곡의 2차 창작입니다. 신청자 분의 곡 해석을 기반으로 작성하였습니다.

 

  호흡이 하얗게 얼어붙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하여 나는 그대가 왔음을 실감하였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니 이 몸 하나를 오롯이 파묻던 눈이 허벅허벅하게 녹았고, 어느 연못가에 끼었던 살얼음에 금이 가는 소리, 그 밑에서 우는 개구리 소리 따위를 들었습니다. 아직 나무는 앙상한 가지마다 하얀 눈을 이었지만, 나는 하루가 다르게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곧 살을 에는 바람이 따뜻한 숨처럼 녹을 것이고, 동면하던 동식물이 깨어나 그대를 맞이하겠지요. 그리고 내게는 세 계절에 이르는 묵직한 수마(睡魔)가 닥칠 것입니다.

 

  오래도록 포근하고 물기 어린 눈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아직 하늘은 시리도록 파랗고, 새털구름이 바람에 찢기며 흩어지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찰나입니다. 우리에게 계절의 순환만큼 자명한 진리가 어디에 있고, 틀리지 않는 예언은 또 어디에 있을까요. 나의 계절이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태어나기를 겨울로 태어난 나는 눈꺼풀을 간신히 깜빡거리며 이 글을 적고 있고, 그대는 수만 번을 읽어 물렸을 문장들을 읽어주시겠지요. 다정하게도. 그대의 이름은 봄이고, 상냥함은 그대의 덕목인 까닭입니다.

 

  개구리가 깨어났으니, 곧 그대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새싹이 돋을 것입니다. 공기는 따뜻하게 녹고 마른 땅마다 새살이 돋듯이 만물이 활기를 되찾겠지요. 모두 그대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찬미할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시작을 알리는 계절인 그대가 언제나 어린아이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것 또한. 흙 위에는 그대의 조그마한 발자국이 춤을 추듯이 남고, 그대의 옷깃이 스치는 곳마다 꽃망울이 지고 또 피어나리라는 것까지도.

 

  겨울인 내가 그대의 앞을 바짝 붙어 걷고 있는 것은 숙명과 같은 일이고, 혹자는 선두에 선 이가 어떻게 뒤따라오는 봄을 아느냐 호기심을 느끼는 모양입니다. 그러한 호기심은 때로 엉뚱한 이야기를 지어내지요. 이를테면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석류로 갈라진 겨울과 봄의 이야기 따위. 그렇지만 그대와 나는 그러한 종속적 관계가 아니지요. 그대는 내게 사로잡힌 봄이 아니고, 내가 모든 이에게 필연적으로 남겨야 했던 서릿발 같은 상처를 보듬어 만지며 나아가는 독립적 존재입니다. 그대가 나를 따라잡을 일이 없듯이, 내가 그대를 돌아보는 일 또한 영영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의무를 다하고, 제 앞에 가로놓인 길을 걸을 따름입니다. 그 길은 교차하지 않는 평행이니, 우리는 영영 모르는 사이이겠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그대가 옴을 아는 것은, 나는 천진한 그대에게 영원히 쫓기는 삶을 사는 처지인 까닭이고, 겨울이 저물면 봄이 오는 것이 만고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땅에 내린 차가운 숨과 함박눈, 얼어붙은 흙과 동면하는 동식물을 그대가 차근차근 녹여가며 내게 뚜벅뚜벅 다가오는 까닭입니다. 나는 가끔 그대를 영문 모르도록 그리워합니다. 나의 살과 같은 눈이 녹고 개구리가 우는 데도, 그것이 내게 유쾌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질척질척 녹아 살갗에 달라붙기까지 하는 지저분한 눈 속에 누워 그대가 내 뒤에 바짝 쫓아왔음을 느끼고, 더는 얼지 않는 따뜻한 숨을 내쉬며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춤을 추면, 기뻐서 약동하는 동식물. 함께 새로운 씨앗을 뿌리고 땅을 일구는 사람들. 새파란 하늘에 드높게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 사실은 내가 단 한 번도 보고 겪지 못했던 것들. 그대와 그대 앞에 놓인 축제. 찬란한 봄. 놀랍게도 겨울은 때로 봄을 추론합니다.

 

  그대를 한번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길이 교차하여 충돌하는 것이 세상에 몰고 올 해악을 나는 알고 있는 까닭입니다.

 

  해는 저물고, 밤하늘이 둥글게 주행합니다. 별자리마저 그대의 것으로 바뀌면, 바람이 한결 따스합니다. 나는 당신을 오래도록 추론하고 나서야 나를 파묻던 눈이 깨끗하게 녹았음을 깨닫습니다. 하늘은 그대의 명성에 걸맞도록 파랗고, 가지마다 흰 목련이 피어납니다. 어느덧 녹아버린 눈송이가 아닌 향마저 어지러운 꽃잎이 나를 파묻습니다. 그대가 도래하면, 어지러울 만큼 쏟아지는 졸음에 차라리 취할 것 같기도 합니다. 깨어나면 그대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겠지요, 그렇지만 나는 언제나 다음에 올 그대의 평화와 안녕을 바라는 이입니다.

 

  더는 수마를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부디 신년도 그대가 모든 이에게 축복이길 바라며, 이만 줄여 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