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너머로 낙조가 졌다. 시침은 시계를 한 바퀴 돌았고, 거실 가득 석양이 밀려들고서야 라스카는 하루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소파에 널브러져 고개를 늘어뜨렸다. 거꾸로 뒤집힌 세상을 보았다. 노을로 얼룩진 겨울 하늘은 붉은 바다와 같고, 구름은 파도처럼 흘렀다. 숨이 차가웠다. 이 계절에 러시아에서 얼어 죽지 않으려면 얌전히 난방 기구를 트는 편이 좋았다. 냉골 같은 방에서 하얗게 얼어붙은 숨을 토하던 라스카는 어리석은 계산을 두드렸다. 난로에 들어가는 기름과 편의점에서 값싸게 구매할 수 있는 술 중에 무엇이 더 ‘합리적인’ 가격일까? 고인은 그가 매일매일 유산을 조각낸 다음, 기름보다도 술을 사는 일에 비용을 더 들이고 있음을 알면 화를 내고 속상해할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리고, 살아 있는 라스카 또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으면 시야가 도로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를 찾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1년이다. 그 사이에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라스카는 마른세수하던 손가락 틈 사이로 소파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류 회사의 상표를 달고 나뒹구는 투명한 병들. 하얀 뺨이 홧홧했다. 머리칼이 엉망으로 자라났다. 정리할 정신마저 없었다. 술에 취하면 기분이 조금 나았으니까, 물론 가끔은 술김에 울기도 했지만, 한순간 고양되는 감정에 취해 하루를 구겨 쓰레기통에 처박고, 또 하루를 엉망으로 흘려보냈다. 졸리면 까무룩 잠이 들고, 해가 들면 억지로 깨어났다. 커튼을 치면 햇살이 들지 않을 거라는 생각마저 떠오르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이 엉망으로 엉키고 꼬인 삶이다. 차라리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그가 수업에 나타나지 않으면 꾸준히 찾아다니는 교직원이며 학우들이 있었다지만….
그는 한참을 소파에 걸터앉아 몸을 옹송그렸다. 무의미한 몸짓에, 가치 없는 시간을 할당한다. 그러다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난로에 불을 피우는 게 좋겠다. 정말 죽을 작정은 아니지 않나, 아니, 30분 전까지만 해도 이대로 얼어 죽자고 결심했던가? 반 시간 전에 스스로가 무슨 생각에 잠겨 술을 마셨는지 따위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실 5분 전엔 무슨 생각으로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있었는지조차. 시간이 라스카의 삶에서 실낱처럼 풀어헤쳐졌다. 물에 담긴 솜사탕처럼 사라져간다. 시간이, 혹은 라스카 페루노브나 바르수코바의 자아 혹은 영혼이. 삶을 버티고 서 있어도 아무도 훈장을 달아주지 않는다. 그러니 술을 마실 수밖에. 그리고 잊어버리는 수밖에. 시간을 허비하며 영혼마저 닳고 사라져가는 수밖에.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기로 다짐하면, 삶을 이루던 모든 요소의 무게가 가볍고 우스워진다.
발끝으로 병을 밀어 치우고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그래도 동사(凍死)는 근사한 사인이 아닌 것 같아 난로에 불을 올렸다. 석유 타는 냄새가 거실에 진동한다. 라스카의 뺨이 난롯불에 붉게 상기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라스카를 제 자식처럼 키워주었던 어머니의 연인 또한. 원인은 누전이고, 프로메테우스의 아들은 라스카에게 이것을 미리 경고했다. “네 주변을 잘 돌봐. 안 그러면 큰일이 날 거야. 조짐이 좋지 않아….” 산에다가 배를 건조하라. 라스카는 3년 전, 그 애의 말을 똑바로 들었어야 했다는 후회마저 오래 곱씹었다. 그 애는 프로메테우스의 혈육이었다. 온갖 신의 자녀를 모아 교육했던 학교에서도 보기 드문 예언가. 절벽 위에 매달린 그 신은 신 중에서도 가장 정확한 예언가였고, 그의 예언 권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을 것이 분명한 이의 경고는 모호할지언정 흘려들을 일이 아니었다.
한편, 불현듯 스치는 의심이 있다. ‘내가 그 전부터 그 애의 예언을 하찮게 생각했던가’, 분명 그건 아니었을 터다. 그가 조금 괴팍한 예술가였을지언정 라스카는 그 애를 친구로서 충분히 존중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조금 더 귀를 기울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가 자신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일러줄 만큼 불길한 예감이라면, 평소처럼 사소한 불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 것이 분명하니까.
라스카 페루노브나 바르수코바는 페룬의 반신이다. 그는 리케이온에서 교직원이 찾아왔던 수년 전을 기억했다. “영웅이 될 반신,”, “너의 부친은 슬라브의 주신이며,” 라스카는 영웅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떠올린다. 그 낱말은 문화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면이 있었지만, 신의 혈통이라는 뜻과 세상을 구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의미를 내포했다. 영웅이라는 어휘에 달라붙어 세간에 떠도는 말이 있다. 영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각종 시련이 필요하다. 저 유명한 헤라클레스를 보라. 그는 헤라의 농간으로 처자식을 죽이고, 12가지나 되는 과업과 시련을 넘어 영웅으로서 명성을 떨치고 신이 되었느니라….
그리고, 다름 아닌 누전 사고로 사망한 라스카의 가족들.
라스카의 정신을 좀먹는 가정이 하나 있다. 만일 라스카가 페룬을 부친으로 두지 않았더라면, 어머니와 블라디미르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만일 이것이 운명을 조율하는 수많은 신격과 페룬이 마련한 소극(笑劇)이라면. 신(神)이란 인간과 근본적으로 다른 감성과 개념, 사고 체계를 가진 이들이라서 그들끼리 체스판 위의 라스카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수군거렸다면 어떻게 할까. “라스카 페루노브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이쪽에 서 있는 ‘쓸모없는 말’들을 치우는 게 좋겠습니다.”, “한낱 인간 두어 명쯤 사라진다고 세상에 문제가 생길 것은 없지요.”, “그래요, 근래엔 안 그래도 인간이 너무 바글바글 늘어났잖습니까? 70억 인구 중에서 둘입니다. 남은 인류를 지키기 위해 고작 두 명을 체스판 위에서 치우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지요….”
무기력이 페룬의 말로서 체스판에 오른 라스카의 사지를 묶었다. 무엇을 해도 신이 정한 운명이라면 행위에 의미가 있나. 무엇이 그가 라스카 바르수코바임을 증명할 수가 있을까? 신의 혈통 절반을 도려내어도 그는 성립하며, 스스로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고 판단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무엇을 어떻게 해야 약속받을 수가 있나.
내가 당신들을 죽게 하지 않았다는 증명은 어떻게 밝혀낼 수가 있지?
사고하지 않음으로써 획득하는 자유가 있다. 행하지 않음으로써 간신히 호흡한다. 이제 와 ‘페루노브나’가 아닐 수 없다면, 길이 어둡다면 오늘 하루도 구겨버리자. 남은 유산마저도 술을 사고, 그리고, 신의 뜻을 과감히 저버리자.
그러함으로써 무죄를, 스스로가 인간 라스카라는 사실을 주장하자. 하늘에 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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