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커미션 작업물

[듐님 지원 로그] 그대가 무엇을 상상하든, 오로지.

  백중이 지나고 한여름 추석을 지나 9월 초에 이르러서도 더위가 기승이었다. 창밖엔 아직 매미가 울었고, 바람이 불면 창가에 걸어둔 풍경이 간지러운 소리를 내었다. 선풍기가 돌았다. 짧게 자른 은빛 머리칼이 바람결에 흩날려 뺨을 간질였다.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하고도 며칠이 지났지만, 학교를 쉬는 주말이면 리에는 어쩐지 아직 여름방학의 연장선에 서 있는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아직 바깥엔 땡볕이 쏟아지고, 가격이 조금 올라가긴 했으나 간식으로 여름 과일을 살 수도 있었으니까.

 

  오늘은 가을에 접어들었음에도 기록적인 무더위가 예상된다는 뉴스가 아침부터 쏟아졌다. 바깥을 나다니기에 좋은 주말은 결코 아니었다. 사람 많은 번화가에서 부대끼며 쇼핑을 했다간 스트레스가 풀리기는커녕 더 쌓일 것이 빤했다. 이럴 땐 얌전히 집에 있는 편이 좋았다. 데스크톱 앞에 앉아 먹기 좋게 자른 수박을 물고, 선풍기 바람을 즐기며 인터넷의 바다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세계적인 동영상 사이트엔 유쾌하고 재밌는 콘텐츠가 많았다. 고전 발레를 촬영한 영상도 옛날보다 접근이 손쉬워졌다. 리에는 기분이 내키는 대로 무익하고 웃기는 영상 콘텐츠를 보다가, 조금 질렸다 싶으면 익히 알고 있는 아름답고 고지식한 발레 무대를 클릭해 틀었다. 널찍한 모니터 위로 리에가 잘 알고 있는 세계가 펼쳐졌다. 익숙한 음악이 흐르고, 잘 알고 있는 몸짓 언어가 나열되었다.

 

  발레에는 요구되는 감정이 있고 기호처럼 정해진 동작이 있었다. 모든 댄서의 표정과 춤은 약속된 언어였고, 오랜 문법이었다. 리에는 오래도록 발레의 언어를 익히기 위해 노력해왔는데, 덕분에 이제는 어떤 고전 발레 무대를 보아도 독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발레는 역사가 켜켜이 쌓아 올린 단단한 탑과 같은 예술이었고, 절제된 아름다움이 있다. 하나자와 리에는 이 고전적인 예술을 탐미했다, 물론. 그렇지 않고서야 적지 않은 시간 발레라는 언어를 제 몸에 스미게 하고자 노력하지 않았을 터다.

 

  어쩌면 더워서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다. 선풍기는 돌아가고 풍경이 울 만큼 바람은 불었지만, 이마에 땀이 살짝 묻어날 정도는 되었으니까. 그녀는 어쩐지 익히 알고 있던 세계가 조금 나른하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수박 껍질을 접시에 내려두고, 잘라두었던 수박을 한 조각 더 물었다. 마우스를 움직여 추천 알고리즘을 따라 영상을 바꾸어 틀었는데 뭐 하나 리에의 충동적 흥미를 사로잡지는 못했다.

 

  그녀는 심지어 전혀 알지도 못하는 무용수의 이름이 붙은 영상마저 생각 없이 클릭하기에 이르렀다. 철자를 보니 영미권 이름은 아닌 것 같았고, 아마도 독일이나 동유럽 어디쯤에서 태어난 무용수가 아닐까. 동영상에 붙은 짤막한 광고가 지나가는 동안, 리에는 무심한 표정을 하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두었다. 수박은 달았다. 리에가 모르는 이름인 것을 보아 아마도 발레리나는 아닐 것이 분명했다….

 

  광고가 끝나면 5분짜리 영상물이 펼쳐졌다. 리에는 눈을 크게 깜빡이곤, 상체를 당겨 세웠다. 낯선 언어다. 아니, 이것을 언어라고 말할 수는 있을까? 정갈한 문법을 통해 분명한 플롯과 이야기를 전달하던 발레와는 달랐다. 무대에 오른 무용단은 상상해본 적도 없는 각도로 관절을 굽히고 몸을 낮추어 움직였다. 거대한 무대 소품이 등장하고, 절벽 같은 무대 장치에 댄서는 돌연 거칠게 물을 쏟아내었다. 5분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일 텐데도, 한 무대 속에 담긴 인간의 몸짓이 무수히 많았다. 약속되지 않은 몸짓 언어였다. 문법이 있기는 한 걸까? 저 사람들에게 정해진 역할은 있고, 플롯은 있나?

 

  리에는 먹다 만 수박을 접시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고, 모니터에 시선을 똑바로 고정해두었다. 무대 위에 군림하는 규칙은 단 하나였다. 자유. 역사가 약속하지 않았고, 순간에 집중한 춤, 그 거칠고 전위적인 아름다움. 5분 가까운 무대가 관객에게 호령하는 말은 분명했다. 인간의 모든 몸짓이 예술이다.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면, 당신이 우리를 보고 느끼는 바로 그 감정, 그것이 어떠한 열망이든 당혹감이든 관계없이, 오로지 그것 하나!

 

  그녀는 피나 바우쉬라는 무용수의 이름이 달린 동영상을 해가 저물도록 찾아보았다. 저녁 먹을 시간이 지나간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오후 7시가 넘어서야 동영상을 멈추고 느릿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고전적인 발레를 사랑했다. 물론 그러했으나, 피나 바우쉬의 낯선 예술은 그녀에게 가슴 뜨거운 질문을 던진다. 너의 예술은 무엇을 원하고 추구하느냐고. 하나자와 리에라는 한 예술가는 무대 위에서 어떤 꿈을 꾸고 있느냐면서.

 

  점심을 먹은 이래 먹은 것이라곤 수박 두 조각밖에 없어 한차례 열기가 가라앉고 나니 허기가 졌다. 리에는 그제야 모니터에 고개를 가까이 디밀고 있었던 까닭에 등이 오래도록 굽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기지개를 통해 뻐근해진 어깨와 척추를 폈다.

 

  여름이 저물고 있었다. 내년이면 리에는 고등학생이 될 터였다. 더위와 열기가 완전히 가시기 전에, 골몰하여 분명한 형태로 발견하고 싶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무엇인지,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은 어떤 모양인지. 그리하여 무엇을 꿈꾸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