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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년/누아다] 그리하여…그는 말했다.

  “누아다 아르게틀람, 나는 네가 불안할 적마다 내가 있는 2층 복도를 찾는 이유를 알고 있지.” 초상화가 말했다. “모두가 널 대단한 미스터리로 여기지만, 사실은 네가 무척 투명하고 뻔한 꼬마란 사실에 이르기까지 말이야.”

 

  더블린 저택의 복도가 어둡고, 창밖으론 주택가 풍경이 보이지 않았다. 폭풍이 몰아치는지 창마다 끼운 오래된 유리가 사납게 울었다. 내 키보다도 큰 커다란 초상화에 앉아 검붉은 드레스를 입고 나를 내려다보는 초대 가주인 <다누 녹턴>은 안경 너머로 금빛 눈동자를 깜빡이고. 오늘은 어쩐지 좀 더 살아 있는 사람처럼 음률을 붙여 나의 이름을 불렀다.

 

  액자 속에 바람이 일 리는 없건만, 불 밝힌 백향목 지팡이 끝으로 어둠을 걷어내면 그녀의 잿빛 머리칼은 캔버스 위로 무게감 있게 짓눌러 바른 물감이 아닌 것처럼 흩날렸다.

 

  나는 내 손에 들린 지팡이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친한 친구가 선물했던 리본 끝은 장갑을 낀 손목을 간질였고, 내가 묶었던 모양 그대로 거기에 있었다. 안감이 초록빛인 망토가 미끄러져 내려 손목이 드러났다. 추리할 것도 없이 투명해서, 미스터리라고 할 만한 광경이 못되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고개를 들어 사람보다 커다랗게 그려진 그녀를 바라보면, 그녀는 내 어머니를 닮은 얼굴로 짓궂고 얄밉기 짝이 없는 표정을 올렸다.

 

  “보가트를 물리치는 수업을 받았다고 들었단다.”

  “아직 아버지께도 편지 안 했습니다.”

  “할 예정은 있니?”

  “환자가 알아 좋을 이야기는 아니죠.”

  “보란 듯이 성공했는데도?”

  “…….”

 

  초상화 <다누 녹턴>은 그런 말투를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집요정 베티가 있는 한, 더블린 저택의 복도가 어둡게 방치되었을 리도 없었고. 무엇보다, 베티는 너무나도 커다란 나머지 모든 이들을 굽어보도록 제작된 초대 가주의 초상화를 애지중지 숭배했다. 그런 데엔 이유가 있었다. <다누 녹턴>을 기록하기로 한 이들이, 그녀의 인간다움을 배제했으니까.

 

  “제가 호그와트에서 무슨 소릴 듣고 다니는지 아버지께서 아시길 원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건 너무나도 투명하게 꿈이다. 나의 무의식이 엉망으로 뒤엉켜서 만들어낸 공간이니 어설프고, 초상화는 한층 인간다워진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학기 중에 더블린 저택으로 돌아왔을 리도 없지. 집에서 교복을 입고 다닐 만큼 애교심(愛校心)이 깊은 모범생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 짚자면, 이것은 허상에 대고 고해하는 무의미한 일인데.

 

  “…제가 무슨 소릴 하고 다니는지 아시길 원하지도 않고요.”

  “네가 그러니까 달바흐가 널 잘 모르는 거야.”

  “…그렇지만.”

  “그 애는 노력하지만 널 모르지. 네가 왜 하필이면 나를 이상 삼는지 이해하겠다고 날 얼마나 찾아왔는지 넌 모를 거다.”

 

  초상화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칼이 성가시다는 것처럼 쓸어넘기고, 챙 넓은 모자를 벗었다.

 

  “무슨 복잡하고 대단한 이유가 있는 줄 아는데, 아서라. 무슨 착각인지. 넌 그냥 내 얼굴이 네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에 불안할 적마다 나를 찾지.”

  “…당신의 이상을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렇다고 믿는 거겠지.” 초상화는 단정했다. “날 어머니 대신 삼았으니, 나의 이상이 네 어머니의 것이라고 믿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만 단언컨대 나는 모리안 녹턴이 아니란다.”

 

  백향목 지팡이로 밝힌 어스름한 불빛으로 윤곽을 간신히 드러낸 초상화를 주시하다가 깨달았다. 그렇구나. <다누 녹턴>의 초상화는 원래 드레스를 입고 있지 않았던가.

 

  뭐 하나 제대로 된 것 없고, 똑바로 재구성된 게 없었다. 미성년자 법령을 어리고 호그와트 바깥에서 루모스 주문을 쓰고 있는 상황부터, 나와 당신, 그리고 초상화 모습, 성가시도록 울어대는 유리창이며 사실은 이렇게 초상이라도 난 것처럼 고요할 리가 없는 저택에 이르기까지.

 

  “5살 애가 어머니 돌아가셨을 적에 울지를 않았는데, 누구 하나쯤은 물어봤어야 했던 거지.” 이제는 어머니인지, 초대 가주인지도 모를 초상화의 형상이 혀를 찼다. “너 아버지 쓰러졌을 적엔 울었던가? 호그와트 입학하기 전에, 그 천둥 치던 날은 어때? 소리가 무섭다면서도 엘라하를 안고 있을지언정 울던 애는 아니었지.”

 

  모든 일에는 마땅한 변명을 붙일 수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적엔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가 힘들어하셨던 모습이 충격이었어. 천둥 치던 밤엔, 동생이 훨씬 겁을 먹고 울었다. 아버지가 쓰러졌을 적엔, 저택에 돌아가 보니 베티는 거의 혼절 직전이었고. 그러니까, 나마저 무너지거나 실패하면 내가 지키려는 그 모래성 같고 연약한 사람들이 쓰러질 것 같았단 말이야….

 

  “때로는 두려운 것을 두렵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용기란다.” 초상화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넌 운이 좋아 마법에 재능이 있었던 것뿐이지, 딱히 네 두려움을 넘어선 것 같진 않구나. 그렇지만 어설프다고 책망은 하지 않으마. 그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넌 고작 14살이잖니.”

 

  고개를 들면, 거센 바람 속에서 마치 모든 풍파를 이겨내며 앉아 있는 듯한 석상 같고 박제 같은 그녀가 있다.

 

  “…제가 의무를 다하기를 바라시진 않으세요?” 물으면, 초상화는 답한다. “네가 스스로 파멸하지 않기를 훨씬 더 바라지.”

 

  왜냐하면, 네가 우리를 사랑하듯이 우리도 너를 애틋하리만치 사랑하기 때문이야.

 

* * *

 

  잠에서 깨어나면, 어느덧 연회장의 천장엔 수많은 별이 내려앉았다. 누아다 아르게틀람 녹턴은 이틀간 바쁘게 학교를 누벼야 했고, 덕분에 잠을 조금 줄이기까지 했다. 어쩐지 피곤하더라니. 애써 상체를 당겨 앉아 주변을 둘러보면, 어스름한 불빛 속에서 알고 있는 얼굴 몇이 부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통금은 먼 것 같았다.

 

  보가트 수업에 관한 감상을 쓰라는 말에, 원래는 쓰려던 정답 같은 말이 몇 개 있었다. 그는 이러한 레포트에 진심을 쓰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이 없다고 믿었다. 그야, 모든 시험엔 정답이 있다. 교수가 원하는 답을 쓰는 게 전략적으로 옳고, 성적과 성과를 유지하기에 좋은 법이다.

 

  그러나 피로 속에 잡아먹혔던 수마(睡魔) 속에서 사실은 다누 녹턴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었던, 그의 무의식일 뿐 그 어떤 누군가는 아니었던 기괴한 초상화가 했던 말은 오래도록 잔상처럼 남아 쓰려고 했던 정답 같던 문장들을 갉아먹고 지워냈다.

 

  …그러하니 때로는 두렵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용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턱을 괴고 앉아 자신의 필체로 적힌 어색한 문장을 무심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그냥 순순히 교수님께 도와달라고 하는 편이 좋은 경험이었을지도 몰라. 난 도무지 사람에게 기대는 방법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