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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라이언] Parable of the Prodigal Son

  공방의 문이 닫혀 있었다. 수요일이었다. 라이언 가드너는 전쟁이 끝나고 2주 휴가를 얻었고, 내일모레면 오러 사무국으로 복귀해야 했다. 돌아온 다이애건 앨리는 여전했다. 기사단이 저지른 테러에 벽이 허물어지고 지붕이 주저앉은 가게들도 보였지만, 플루가루 네트워크를 봉쇄하고 리키 콜드런을 폐쇄하기만 하면 전쟁의 화마가 침입할 입구가 없는 까닭에 상가 가게들은 대부분 아직도 간판을 걸었다. 골목마다 나와 있는 이웃들의 얼굴은 밝지 않았지만-가게는 무사해도 손님은 끊겼다. 그들은 전쟁보다도 오늘의 적자를 걱정한다.-전쟁은 석양처럼 저물었다. 마법사 사회는 이제부터 긴 겨울잠을 자야 했다. 눈이 올 것 같은 하늘을 이고, 밤이 깊어 마왕의 시대가 열린다. 그것이 전시(戰時) 오러였던 라이언의 전공(戰功)이었다.

 

  예비 열쇠는 라이언이 알고 있는 창문 틈새 끼워져 있었다. 라이언이 가드너 공방으로 돌아오지 않은 지 2년은 되었다. 크리스마스에도 좀처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줄을 모르는 배은망덕한 아들을 위해 가드너 가족은 여전히 그곳에 약속처럼 열쇠를 두는 것이다. 라이언은 잠시 녹 하나 슬지 않은 예비 열쇠를 손에 쥐고 바라보았다. 검은 가죽 장갑을 끼고 온 바람에 감촉이나 온기가 느껴지진 않았지만, 돌아오지 않을 이를 위해 열쇠를 두고 자리를 비운 가족의 행위가 쇠처럼 차가울 수는 없었다. 하얗게 얼어붙은 숨을 오래도록 내쉬며 머뭇거렸다. 라이언 가드너의 지독한 습관이다. 무감한 눈으로 가족의 온정 앞에 오래도록 골몰하는 것. 이 따뜻하고 미적지근한 일상에 끼어들기에 이제는 자신이 너무 차가운 인간이 되지 않았나. 그보다, 내가 가족에게 전쟁에 차출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던가? 잊어버렸더라도 다이애건 앨리조차 전쟁에서 아주 자유롭진 않았던 것 같은데, 오러인 아들이 그 난리에 죽었으면 어떡하려고 열쇠를 두었지? 오러 사무국에 고스란히 두고 온 산더미 같은 편지를 떠올렸다. 복귀하면 하나하나 열어볼 작정이었지만, 아직은 하나도 열어보지 않았다. 그는 2주 휴가를 받고, 사흘을 잤다. 더블린엘 다녀오고, 바다를 보았다. 그리고 지독하게 곱씹다가 간신히 이 서글프도록 따뜻한 열쇠 앞에 섰다….

 

  유리문 위에 난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문을 열면 겨울의 냉기에 얼었던 뺨을 충분히 녹이고도 남을 온기가 끼쳤다. 라이언은 자신의 기억과 똑같은 구조를 한 공방을 문지방을 넘지도 못한 채 10분이나 쳐다보았고, 간신히 문턱을 넘으며 추리했다.-서글픈 직업병- 존 오스카 가드너는 돌아오겠고, 그웬 가드너는 오늘 돌아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모든 물건을 칼 같이 정리하던 존 가드너의 책상 의자는 반쯤 책상에서 나와 있었고, 그웬의 책상은 아버지가 보다 못해 대신 정리하신 모양 그대로 모든 물건에 각이 살아 있는 까닭이다. 여행을 갔나, 그웬은 학창 시절부터 어울리는 친구가 많았지. 코트와 목도리를 벗어 걸어두었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아버지와 그웬이 목을 매던 세공 예술이 도처에 전시되어 있고, 빛을 받으면 찬란하기까지 한 맑고 온정 넘치는 예술에 압사할 것 같단 감상이 턱까지 차올랐다. 어디에 앉아 기다리면 좋을지 모르겠다. 그가 원래 공방에 오면 어디에 앉아 아버지의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는지, 그리 먼 과거도 아닌데 가물가물했다. 백 년은 지나간 일처럼.

 

  손님용 소파에 앉아 30분가량을 기다렸다. 뭔가 읽을거리를 가져오면 좋았겠단 후회가 들었다. 2층에 올라가면 자신이 학창 시절에 탐독했던 문고본이 아직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니, 터무니없는 바람이로군. 라이언은 몸을 낮추고 턱을 괸 채 골몰한다. 그웬 가드너가 제 방을 멀쩡히 놔뒀을 리가 없지. 보나 마나 책은 그가 독립하던 해에 신나서 헌책방에 내다 팔았겠고, 라이언이 지내던 방은 그웬의 창고가 되었을 터다. 공방도 작고, 2층으로 올라가면 있는 생활 공간도 네 식구가 살기엔 넓지 않았다. 그게 별로 유감스러웠던 적은 없었지만, 아니, 이럴 땐 조금 유감스럽다. 가족이 아니라 어설프게 손님이 되어 돌아온 이는 자고 갈 방조차 없지 않나, 물론 런던에 이만한 공간을 차지하고 사는 일마저 쉽지 않은 요즘이라지만….

 

  현실은 때로 파도처럼 밀려들어 우리가 애써 새겼던 과거를 없던 것으로 밀어버린다. 유년시절을 다 바친 공방에 라이언의 공간이 금방 사라져버린 것처럼. 흔적은 힘이 없고, 기억은 물리적인 흔적보다 연약한 구석이 있어서….

 

  시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성냥갑처럼 작은 공간에 흔적 하나 남지 않은 라이언 크레드네 가드너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사유의 연쇄가 다였다.

 

* * *

 

  눈을 뜨면 조명이 밝았다. 그새 밤이 깊었고, 공방의 불을 밝힌 것이다. 라이언은 그새 자신이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오랜만에 꿈을 꾸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다이애건 앨리까지 오느라 피곤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기이한 일이다. 사흘을 자고, 또 휴가가 이어지는 동안 끼니는 몰라도 수면만큼은 어디서건 악착같이 챙겼는데도 좀처럼 풀리지 않는 정신적 피로가 있다. 전쟁은 모든 이의 심신에 어떤 의미로든 상흔을 남긴다. 부상을 입어도 뛰어난 치료사만 있다면 흉터 하나 없이 말끔히 낫는 것이 마법사 사회라지만, 커다란 상처를 입었을 때 입은 심리적 충격까지 덮어주는 치료 마법은 없는 까닭이다. 승전한 오러나 패전한 기사단이나 모두가 지쳐 쓰러진 시대다. 라이언은 1주하고도 며칠 폐허의 꿈을 꾸었고, 그건 사실 안 자느니만 못했다. 그래, 결국 전쟁으로 인한 만성 피로와 수면 부족이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신경 예민했던 자신이 아버지가 돌아와 공방에 불을 밝히는 인기척마저 눈치를 못 챘지.

 

  존 오스카 가드너는 라이언의 머리맡에서 아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발이 섞인 머리칼 아래로 도사린 무감한 청록빛 눈을 라이언은 말없이 쳐다보았다. “오셨으면 깨우시지 그러셨습니까?”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그게 다였다. 노년에 가까운 그의 아버지는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는 특유의 톤을 구사했다. “곤히 자길래 안 깨웠다. 잘 수 있을 때 자둬야지. 바빴을 게 아니냐?” 라이언은 그제야 제 몸 위로 타탄체크를 넣은 담요가 덮여 있다는 사실과, 아버지의 발언을 미루어-정말 서글픈 수사관의 직감-아버지가 마법 정부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어머니는요?”

  “네가 온 줄 모르고 더블린에 갔지. 킬리언이 네 소재를 알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거든.”

  “킬리언 아저씨한테도 편지 안 했던 것 같은데.” 그마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녹턴 가문에 오러가 너 하나는 아니니까.” 존 가드너는 호흡처럼 말했다. “전쟁이 났다는데 오러로 재직하는 아들이 연락이 안 되면, 어떤 부모라도 쓸 수 있는 연줄은 다 쓰고 싶을 거라는 말을 해둬야겠구나.”

 

  편지 정도는 하지 그랬냐는 탓은 나오지 않았다. 존 오스카 가드너는 아들과 달리 좀처럼 태도를 감추거나 말을 에둘러 하지 않았다. 괴팍한 세공 장인. 공방에서 태어나 공방에 뼈를 묻을 지독한, 예술만 알고 윤리와 상도덕은 몰랐던 ‘그 어머니’에 ‘그 아들’, 라이언은 자신의 아버지를 두고 주변 이웃들이 떠드는 예리한 수사를 떠올렸다. 그게 얼마나 맞는 말이고 또 어느 정도로 틀렸는지는 잘 몰랐다. 자다 깬 바람에 그럴까, 아니면 전장에서 돌아온 바람에 스스로가 달라졌나. 라이언은 아직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수마에 잠긴 정신으로 여태껏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후회를 한다. 아버지의 인생사를 좀 물어봤어야 했는데. 어째서 타인 집단과 내놓고 불화하기로 했는지, 어떻게 미움받을 용기란 걸 갖출 비장한 각오를 하셨는지. 당신에게 이 조그마한 공방은 뭐였고, 당신을 키운, 그러나 나는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당신의 어머니이자 나의 조모는 뭐 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당신에게 누구였고, 그리고 어째서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지…. 숨기는 것 하나 없이 투명한 태도를 일관하는 대쪽 같은 사람이니만큼, 물어봤으면 당신이 누구인지 일러주셨을 텐데.

 

  왜 10대 시절엔 그 한마디가 어려웠을까. 사람은 왜 스스로 추락해보지 않고선 자신의 품에 뭐가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할까. 태어날 적부터 완전히 성숙한 인간이었더라면, 인간사는 지루하고 덜 아프고 사랑스럽지 않았겠지. 라이언 크레드네 가드너는 가끔 스스로가 울고 싶을 만큼이나 예술가라는 사실을, 슬프다는 단어로 규정한다.

 

  “에포나에게 네가 왔으니 더블린에서 돌아오라고 편지를 써야겠구나. 플루가루를 이용해도 올 때까지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존 가드너가 침묵을 깬다. 라이언은 그 말을 듣고도 몇 분이나 말이 없었다.

 

  “저녁 먹고 갈까 하는데요. 많이 늦으실까요?”

  “에포나까지 오려면 9시는 되어야겠는데.” 존은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확인했다.

 

  “별일 없으면 그냥 자고 가렴. 안 그래도 네가 전시에 차출되었다는 소식 듣고 잠 못 잤을까봐 걱정 많이 했다.” 라이언이 몸을 일으켜 앉을 적에, 존은 여전히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평이한 투로 말했다. “넌 어릴 적부터 낯선 곳에선 좀처럼 못 잤으니까. 네가 두 살 적에 처음으로 더블린 저택에 데려갔을 때도 결국 낯선 잠자리가 싫었는지 좀처럼 못 자고 울길래, 재우느라 애를 많이 먹었지.”

 

  “별걸 다 기억하시네요.”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다가도, 라이언은 결국 맥 빠지게 웃는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아들 때문에 예비 열쇠까지 두고 가시는 분답긴 한데.”

  “네가 죽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던 거지. 널 사랑하니까.” 같은 색채로 존 가드너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보고 있자면, 라이언 가드너는 결국 패배를 직감한다.

 

  “아직도?” 철없는 아들이 그렇게 물으면, 약속처럼 “언제나, 영원히 그렇지.” 대답하는 사람.

 

  다른 과정을 통해,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 그러나 그는 결국 아버지와 비슷한 모습으로 늙어갈 것이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또, 언제나 영원히 그러할 사랑을 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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