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은 세상은 중심이 없이 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달은 지구를 중심으로 돌았다. 지구는 태양을 한가운데에 두고 공전했다. 태양은 또 은하를, 은하는 거대한 은하단, 우주의 개념에서 내려다보자면 에든버러 교외에 있던 공원이 불탄 일 같은 것은 어떤 의미로도 중심일 수가 없는 일이다. 이름 없는 오러가 사람을 죽여도 해는 저문다. 무명의 기사단원이 오러 사무국에서 7년을 버틴 오러에게 지팡이를 겨누고 냅다 “인센디오,” 그렇게 소리를 질러도 달은 하늘을 주행한다. R은 무사했다. 그를 책임져야 했던 넉 살 연상의 오러는 등에 커다란 화상을 입었지만, R은 어깨를 깊이 패고 들어간 자상(刺傷) 하나가 다였다.
숙소에 돌아와 천장을 바라보았다. 연쇄살인범을 잡으러 일주일을 뛰어다녀도 지치는 체력은 아니라고 자부했건만, 정신 위로 내려앉는 묵직한 피로감이 있다. R은-그의 이름은 기나긴 길이를 가지지만, 동시에 무명이다.-, 간신히 조그마한 침대에 몸을 내맡긴 채 뒤척였다. 코트를 벗는 것이 좋을 거란 걸 알았다. 대동한 치료사는 아직 그의 선배를 봐주고 있으니까, 자신은 먼저 치료를 받고 온 참이니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잘 준비나 미리 해두면 좋을 거라는 것, 카라가 말라붙은 핏자국으로 얼룩진 흰 셔츠를 벗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동시에 지팡이를 쥔 손 하나 까딱이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죽었다. 에든버러 시내에 신년을 축하하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가득했다. 폭죽이 터졌다. 교외에선 기사단 혹은 오러의 살이 터지지만, 에든버러를 장악한 머글 사회와 무관한 까닭이다. 선배가 돌아올 때까지만 조금만 누워 있자. R은 그렇게 게으름을 부리기로 마음먹었다. 어젯밤에 눈이 내렸다. 그 바람에 난방을 올려두어도 어딘지 추웠다. 마른세수했다가, 머리칼이 무작위로 잘려 나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프론트에서 마주친 호텔의 머글 직원의 안색이 창백했군. 이제 곧 그녀는 자신이 목격한 두 피투성이 오러를 깨끗이 잊어버릴 예정이다.
숙소의 불이 밝았다. “해피 뉴 이어, 라이언.” 호텔의 불을 켜고 돌아온 O는 무표정이었다. R은 고개만 조금 움직여 현관을 닫고 들어오는 그녀를 보자마자 맥 빠지는 소릴 냈다. “그러고 호텔 복도를 걸어왔어요?” O는 핏물에 얼룩진 망토를 가까운 의자 등받이에 내던지듯 걸었다.
“벗고 걸어온 것도 아닌데 왜. 망토 둘렀잖아.”
“머글들은 망토를 두른 여자를 보면 기절한다니까. 왜 제 말을 안 믿어주시지….”
“너처럼 입으나 나처럼 입으나 호텔 프론트 직원은 기절하기 직전이던데.” O가 걸터앉은 무게만큼 침대의 끄트머리가 삐걱거렸다. R은 그녀의 동선을 시선으로 쫓았다. 호텔의 밝은 조명 불빛은 얇은 블라우스 아래 살을 비춘다. 흰 천 아래로 붉은 화상 자국이 조금 남아 도드라졌다. “그건 안 낫는대요?” 물으면, “꾸준히 병원 다니면 낫겠지.” O는 대답했다.
“담배 피울 거면 피워도 되는데.” O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R은 도로 몸을 뒤척여 천장을 바라보았다. 바닥은 밝지만, 조명 기구 근처는 늘 어둡다. “아직은 환자 옆에 두고 담배 피울 만큼 미치진 않았지, 내가.”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매트리스에 무게가 실린다. O가 한팔로 제 몸의 무게를 지탱하고 R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R은 오래도록 말없이 그녀의 눈을 살폈다. 가끔 그녀를 볼 적이면, 조부모가 영불 해협을 넘기로 작정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생이 꼬여버린 프랑스계 영국인 ‘오필리어 위페르’가 도저히 가여웠다. 프랑스는 지척이고, 전쟁은 아직 바다를 건너지 않았다. 그녀가 그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뜻하던 어른으로 자랐을 텐데. 전쟁을 모르는 오러란 얼마나 근사한가 말이다.
동시에 질린다. 이마저도 지독한 자기연민, 그의 고조모는 아일랜드 대기근을 피해 영국엘 왔고 그 선택이 ‘라이언 가드너’를 영국에서 벌어진 2차 마법사 전쟁의 전시 오러로 만들었다.
“울었어?” 오필리어가 물었다. 신년이었다. 어제는 눈이 내렸고, 오늘은 영하다. 골목 곳곳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눈은 얼어붙을 것이다. “…아뇨.” 그건 사실이었다.
“근데 왜 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신경 쓰이게.”
“누구라도 모가지가 날아갈 뻔하면 우울해집니다.”
“살인을 저지르면 죽고 싶어지고.”
“선배는 안 그런가요?”
“난 점점 그렇지 않은 괴물이 되어가고 있지.” 오필리어의 말은, 신년보다 차갑다. “당장 너 안 죽고 내가 살았다는 게 기쁘기나 한.”
오필리어는 라이언 가드너가 말수가 적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그럴 적이면 호텔의 조명 불빛 속에 온전히 녹아나는 따뜻한 색감의 머리칼 아래로, 놀란 것처럼 크게 눈을 떴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그런 말을 한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리고선, 원래 말하고 떠드는 일을 즐기는 사람인 척을 하면서, 오필리어의 기분을 띄워주기 위해 무던한 애를 쓰는 것이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혹은 의무에 겨워서. 사실은 할 말을 못 찾고 오래도록 침묵한 주제에.
“오필리어.” 그런데도 오늘은 그렇게만 부른다. 차갑게 얼어붙은 손이 오필리어의 목덜미를 스쳤다. 최근에 단발로 자른 흰 머리칼이 손등에 닿는다. “왜, 갑자기.” 그녀가 느릿하게 웃었다. “잠깐만.” 몸을 일으켜 앉아, 그녀보다 넉 살이 어린 라이언이 호흡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을 맞추었다.
“무슨 생각합니까? 지금.”
“별 생각 안 했어. …왜, 내가 자살이라도 할 것 같아서?”
“네, 죽기로 결심한 것 같은 눈이라서.”
“죽음을 꿈꾼 건 너구나.” 인간은 상상한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을 상정하지 못한다. 라이언 가드너는 오필리어 위페르가 돌아오기 전까지, 벌써 열 번도 넘게 죽기로 했다. 혹은 이곳이 에든버러인지, 사실은 사후가 아닐지 골몰했다. 사람이 사는 곳이 질식할 것처럼 추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러 명이 죽고 불에 타고 다친 날에 온 거리가 행복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이다지도 무정한 세계라니. 유령 같은 전쟁이 에든버러를 배회하고 있다….
입술이 맞닿는다. 누가 먼저였는가, 계산기를 두드리는 일엔 의미가 없었다. 살아 있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스스로가 아직 따뜻한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때마침 눈앞에 똑같이 자신이 산 자인지 죽은 자인지 분간을 못 하는 괴물이 하나 더 있으니까. 그러니까, 살아 있는 한 섞여드는 호흡이나 맞닿는 살은 정신과 달리 따뜻할 수밖에 없어서….
“라이언.” 떨어지면 그런 말이나 한다. “셔츠 엉망이네, 너.”
“…흰 셔츠는 관두는 게 좋겠어요. 선배나 저나.” 라이언 크레드네 가드너-R의 기나긴 이름-는 오필리어의 화상을 블라우스 위로 더듬어 만졌다. 한 번 더 입을 맞추고, 생각한다. 참, 빌어먹게 행복한 신년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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