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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워렌/엘리엇] Tuatha dé Danann or not

  워렌 루 프라이어가 퀴디치 출전 정지를 받았다. 후플푸프 휴게실엔 해일처럼 소란이 일었다. 전후 사정은 후플푸프의 자랑스런 추격꾼인 워렌의 의사와 무관하게 파도를 타고 번져나갔다. 소문엔 살이 붙기 일쑤였다. 그가 멱살을 잡고 협박한 슬리데린 추격꾼의 언행은 한층 험악해지는가 하면, 워렌이 그를 압도적인 실력으로 때려눕혔다는 얼토당토않은 영웅담으로 둔갑해 있을 적도 많았다. 타인이 발치에 가져다 바치는 찬사를 걷어차고 좌중에 찬물을 끼얹고 싶진 않았지만, 거짓을 옹호하고 싶진 않았다. 그는 휴게실 소파에 널브러져 누워 나뒹구는 소문을 일일이 수선했다. “그 자식이 라이더의 부모님을 욕한 건 맞지만, 수위가 그 정도는 아니었어.”, “아, 자기야. 내가 아무리 좋아도 그렇게 띄워주면 안 돼. 귀여운 워렌은 주먹다짐에 약해요….” 허공에 흩어지는 말. 오가는 선후배들은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겸손하다고.

 

  “그냥 포기하는 게 좋을걸요.” 엘리엇 라이더는 수업을 마치면 꼬박 기숙사 휴게실에 출석을 찍었다. 올해로 6학년인 워렌의 퀴디치 팀 후배는 키가 벌써 기숙사에 나열한 사주식 침대만 했고, 워렌은 덩치가 산만한 그가 아직까지도 조막만한 스니치를 쫓아 날아다닌다는 사실이 도저히 유쾌하단 생각을 했다.

 

  “선배, 당분간은 완전 영웅의 역할. 대중이 원하면 스포트라이트는 거둬지지 않아요.” 엘리엇은 교과서와 학용품을 담아 메고 다니던 가방을 소파 앞 낮은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벽난로는 타올랐고, 워렌은 소파에 누워 낮잠만 두 시간 자고 깨어난 참이었다.

 

  워렌은 무심코 기숙사를 청소하러 온 어느 집요정이 자신을 측은하게 여겨 덮어주고 간 깨끗한 담요를 들척였다.

 

  “스펜서 때문에 그래. 걔가 기숙사 앞까지 사과하러 온 바람에, 내가 무슨 대단히 정의로운 일을 한 것처럼 포장이 됐잖아.”

  “뭐, 그렇다고 선배가 악당이었던 것도 아니긴 하죠.” 워렌이 누워 있던 소파 앞에 털썩 앉은 엘리엇은 이제사 잠이 몰려오는지 느릿느릿 하품했다. “더러운 머글 부모님이라고, (엘리엇은 이 말을 태평하게 입에 올렸다. ‘더러운 머글’이란, 그의 세계에 실재하는 개념이 아닌 까닭에 슬리데린 학생의 발언을 출처 없이 인용한 것이다.) 트집 잡힌 건 저인데 선배가 날아가서 사람을 들이받았잖아요. 선배가 그다지도 유명한 미친개가 아니었으면 저희 무슨 사귄다는 소문도 났을 듯.”

 

  워렌은 도로 담요를 덮었고, 엘리엇에겐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교환되지 않았고 엉킬 기미가 없었다. 장작이 타는 소리에 섞여드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통해, 엘리엇은 그가 숨죽여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무겁게 소용돌이치는 정적. 엘리엇은 무릎에 팔을 대고 턱을 괸 채 벽난로 안을 환히 비추는 불길의 실존에 관하여 생각하다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그쯤 하지 그래요?” 불길을 등지고 소파 등받이를 눈앞에 둔 채 모로 누워 있던 워렌이 묻는다. “뭘?”, 그러면 엘리엇 라이더는, “무위.” 워렌 프라이어가 눈을 느릿느릿 깜빡이다 마지못해 상체를 일으켜 앉으면 엘리엇의 머리 위로 담요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이게 못 하는 말이 없어.” 소파 앞에 앉아 있던 덩치 큰 머리의 파란 머리를 누르면, 엘리엇은 무성의하게 ‘아야’ 하는 소리를 냈다.

 

  “네가 그런 식이니까 옆에서 듣는 내가 더 열받는다고, 멍청한 엘리엇 라이더. 너희 부모님이 욕을 먹으면 화를 좀 내란 말이야. 어? 듣고 있냐?”

  “무슨 타격감이 있는 비하를 들어야 화가 나죠. 머글이라는 단어를 비칭으로 받아들이는 쪽이 전략적으로 멍청하고, 더럽다는 말은 지나치게 유치해서 발화하고 듣는 순간 식어버려요.” 고개를 숙인 엘리엇은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 “저보다 멍청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불쌍할지언정 화가 나지 않는다고요. 그렇지만, 선배는 선배보다 멍청한 사람들한테 자꾸 화를 내니까. 정작 선배 본인한테 그러면 히죽 웃고 넘기시면서.”

 

  워렌 프라이어의 악력이 조금 더 꾹, 엘리엇의 머리를 눌렀다. 불길이 어린 자안은 자신보다 꼭 한 해 늦게 태어났을 뿐인 에든버러의 수색꾼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눈치가 없는 건지, 눈치가 없이 구는 건지 모르겠다. 파란 머리칼은 손끝에서 만져지는데, 가끔 그가 자신보다 한 세기 정도 더 나이가 많을 것만 같았다. “이봐요, 루. 영웅이 되고 싶은 거예요?” 엘리엇 라이더는 자신보다 딱 한 뼘 앞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 그의 질문은 가끔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내려친다. 더블린에 도사리고 대대로 영웅적으로 살았다는 당신의 영문 모를 순수혈통 친족들처럼, 그러니까, 만인을 구원하는 루 라바다가 되고 싶은 건 아닐 거잖아요….

 

  “네가 좋은 거야.” 워렌은 손을 허공으로 거두었다. “엘리엇 라이더 너를 좋아하고, 새뮤얼을 동경하는 거고, 마리포사를 귀여워하는 거고, 사일러스를 사랑하는 거지.” 짧게 잘랐던 짙은 금발 아래, 보랏빛 눈동자로 워렌은 엘리엇을 응시한다. “그 감정은 내 거야. 나의 부모가 어디서 왔고 나의 뿌리가 어디에 있었건, 남들이 나를 두고 누굴 보고 뭘 원하든 무관하게 내 거야. 나는 다정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모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행할 거라는 것.”

 

  그러니 네가 나를 루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거야. 워렌 프라이어가 짚으면, 엘리엇은 그가 눌렀던 만큼 내려가 있던 고개를 그제야 들고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네, 저도 당신이 사라지길 원하지 않아요.” 무기력하고 맥없는 목소리로, “당신은 제게 ‘긍지’라는 관념이거든요. 그러니까, 저도 당신을 나름대로 아껴서….”

 

  한참의 침묵을 더듬었다. “화내지 않았으면 한다는 거죠. 반지성적이고 관성적인 비난에 근신 같은 걸 받진 말자고요. 불안에 떨지 않아도, 아무렴 저는 당신을 프라이어 선배라고 생각하니까요. 당신의 머리 위로 타인이 영웅의 서광을 내리더라도, 저는 당신을 제 무대 위의 햄릿으로 삼진 않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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