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메이트.” 백색 나이트가 산산조각이 났다. 마리포사의 퀸은 고개를 도도하게 쳐들고선 체스판을 행진했다. 엘리엇은 궁지에 몰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자신의 체스 말을 무심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마리포사 키쿠노와 체스를 두면 늘 비슷하게 말려들었다. 겉보기엔 체구가 가녀린 그녀는 후플푸프 퀴디치 팀의 돌격형 전차(戰車)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을 몰고 다녔지만, 별명만큼 무작정 돌진하는 스타일의 플레이어는 아니었다. 퀴디치에서도, 체스에서도, 곱스톤에서도 영리한 마리포사를 한 수라도 이겨보려면 엘리엇 라이더는 체스판 앞에서 오래 골몰하고 판의 형세를 세밀하게 읽어야만 했다. “…졌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리 궁리해도 타파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승복할 줄 알아야 하는 법. 그가 패배를 인정하면, 망가졌던 체스 말은 도로 원래의 형체를 갖추었다. 마리포사는 마법으로 말짱해진 체스 말을 수습하며 웃었다. “그래도 제법 늘었어요, 선배. 체스로 스펜서 선배를 이기려면 한참 더 공부하셔야겠지만.” 아무렴, 엘리엇은 유명 체스 기사를 아버지로 두었다는 슬리데린의 스펜서를 오늘 당장 체스로 이길 수 있으리라고 짐작하진 않았다.
“크리스마스 내내 연습을 좀 해야겠어요.” 휴게실은 사람이 적었다. 크리스마스가 목전이었다. 타오르는 벽난로는 따뜻하고, 누군가가 키우던 영문 모를 화분은 벽난로 위에서 어느덧 이파리가 높게 자라 있었다. “저번에 스펜서 선배한테 체스로 져서 버터맥주 샀거든요. 퀴디치로도 자꾸 지는데, 게임까지 지려니 짜증이 나서….”
엘리엇은 마리포사를 도와 체스판을 정리하며 체스 연습을 도와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고, 마리포사는 엘리엇에게 조금 더 연습하면 한 번 정도는 슬리데린의 그 선배를 이겨볼 수도 있을 거라며 격려했다. 기숙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학생 한 무리가 왁자지껄 떠들며 기숙사에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고, 엘리엇이 얼음처럼 얌전해진 체스 말을 상자에 난 홈에 하나하나 끼우고 있을 무렵 그가 앉아 있던 소파 뒤에서 불쑥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누가 이겼냐?” 기숙사에 막 들어선 새뮤얼 버틀러의 뺨은 빨갛게 얼어 있었고, 그의 몸 주변에는 호그와트의 돌로 만든 복도에 가득 도사리던 냉기가 부유했다. “마리마리.” 엘리엇은 놀란 기색 없이 솔직하게 답변하고, 투박한 손길로 하얀 체스 말 정리를 이어나갔다.
마리포사는 정리가 끝난 체스 말 상자와 체스판을 옆구리에 끼고 여학생 기숙사로 돌아갔다. 이제 곧 변환 마법 연강이 있다고 했다. 엘리엇은 공강 한 시간이 남아 있었고, 어느덧 그녀가 앉아 있던 벽난로 앞자리엔 빨강 머리가 도드라지는 새뮤얼 버틀러가 앉아 몸을 녹였다. 그의 안경에 낀 서리와 앞머리 끝이 조금 얼어붙은 것을 보아 바깥엔 눈이 내리는 모양새였다.
“그나저나 라이더.” 웬일로 그가 자신과 마주 앉기에 엘리엇은 그렇지 않아도 새뮤얼 버틀러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는 것 모양이라고 짐작하던 차였다. “네, 말씀하세요,” 엘리엇은 짧게 하품하며 소파 앞 낮은 탁자 위에 비치된 박하사탕에 손을 뻗었다. 어느덧 기숙사 휴게실의 소파는 그에게 한껏 낮아져 있었고, 사탕바구니까지 손을 뻗으려면 허리를 한참 숙여야만 했다.
막상 엘리엇을 호명한 새뮤얼은 한참 말도 없이 그가 박하사탕의 비닐을 벗기는 느릿한 몸짓을 멀거니 지켜보기나 했다.
“너 성탄절에 집에 안 가냐?” 엘리엇은 까끌까끌한 박하사탕을 입에 넣고 굴려보다가, 눈을 한 번 크게 끔뻑였다. 벽난로를 등지고 앉은 까닭에 새뮤얼의 무뚝뚝한 얼굴에 어스름한 그늘이 졌다.
“네, 올해는요.” 엘리엇의 맥없는 목소리가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보는 사람 답답할 만큼 느리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고, 장송곡처럼 늘어지고 나른하기까지 한 음색으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요, 막내 이모가 캐나다 사람하고 결혼하게 됐는데, 결혼식을 거기서 하게 돼서요. 연휴 동안 캐나다까지 다녀오려면 준비도 많이 필요하고, 저 여권도 없고 그래서.” 그는 부모님은 방법을 찾아주시겠다고 했으나 자신이 거절했노라고 밝혔다. 멀미가 있고, 비행기를 오래 타고 싶지 않았으며, 그 시간 동안 체스나 퀴디치를 연습한다면 올해가 가기 전에 에이더스 스펜서를 이겨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고, 그 사람은 매해 성탄절마다 귀향하지 않느냐는 말, 그렇지만 캐나다에 있다는 자연사 박물관을 관람하러 갈 수 없는 건 아쉽다는 이야기가 엘리엇 라이더의 의식을 타고 고장난 라디오처럼 흘러나왔다. 새뮤얼 버틀러는 심지어 성탄절과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는 스테고사우루스 이야기까지 인내하다가 결국 “일단 거기까지 해봐.” 하고, 그의 두서없는 사고를 끊어냈다.
“올해는 학교에 남는 애들 많지도 않던데.” 새뮤얼은 화제를 도로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크리스마스 연휴로 끌고 왔다. 엘리엇 라이더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새뮤얼을 직시했는데, 새뮤얼 버틀러는 이제 독특한 사고와 몸짓으로 구성된 한 살 어린 팀메이트의 시선에는 익숙해진 참이었다. 그의 생각을 읽고 영혼이라도 꿰뚫을 것 같던 샛노란 눈의 소년은, 불시에 짧고 간결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선배네 부모님한텐 물어봤어요?” 엘리엇은 그것만 물었다. 얇게 녹은 사탕을 깨무는 소리가 났다.
“너 진짜 레질리먼시 같은 거 쓸 줄 모르는 거 맞지?” 새뮤얼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참 멍청한 질문이라고는 생각했다. 올해 O.W.L을 치게 될 후배가 그만치 고등 마법을 구사할 줄 알 리 없었으니까.
“선배 생각 같은 건 안 봐도 뻔해요. 저 점술 수업의 루키라니까요.” 실없는 농담이었다. “성탄절에 런던에 오라는 거죠? 선배네 집에서 재워줄 테니까 오라고.”
“아니, 나도 그렇게까지 너한테 마음 쓸 생각이 아니었는데.” 새뮤얼 버틀러는 다리를 꼬고 천장을 쳐다보며 한탄했다. “내 여동생들이 네 팬이란 말이지. 어쩌겠냐, 올해 남는 사람 명단에 네 이름 있는 걸 보더니 얼른 납치해오라잖아.”
엘리엇은 새뮤얼 버틀러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이샤와 펠리샤 버틀러 자매와 엘리엇의 사이가 나빴던 적은 결단코 없지만, 또 그녀들이 큰오빠 앞에서 보란 듯이 소란을 떨며 엘리엇을 귀여워했던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나 그녀들 마음속 퀴디치 베스트 플레이어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그녀들을 업어 키운 눈앞의 이 남학생일 터다. 버틀러 가족의 가장 같은 장남. 평생을 그렇게 살아와서, 자신도 고작 열여섯 살이라는 사실을 좀처럼 ‘인지’하지 못하는 가엾은 소년. 혹은 태어나 소년이었던 시절이 채 5년도 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러니까, ‘헌신’의 화신 같은 사람.
엘리엇은 새뮤얼 버틀러의 헌신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진 않은지 염려했다. 세상에는 무한히 샘솟는 다정이 없다. 새뮤얼 버틀러라고 친절과 헌신의 화수분일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꾸 자신의 어깨 위로 무언가를 위태롭게 얹어 탑을 쌓는 것이다. 피를 나눈 동생들. 혹은 호그와트 급행열차에서 우연히 만나 정을 나눈 친구들. 퀴디치 팀 후배. 그리고, ‘그저 우연히 성탄절에 호그와트에 혼자 남을 예정’인 엘리엇 라이더….
신께서는 이 헌신적 바벨 탑을 용납하신단 말인가? 멀린, 멀린 맙소사….
“그래서, 올 거야, 안 올 거야?” 그가 물으면, 엘리엇은 미적거렸다. “선배는 어떤데요?” 장작이 타 들어가는 소리가 앙금처럼 가라앉았다. 새뮤얼은 잠시 말이 없었다.
“무슨 징그러운 질문이냐, 그건.”
“전 올해 그냥 우연히 호그와트에 남는 거예요.”
“그걸 누가 몰라?”
“그러니까, 연민해서,” 엘리엇은 느긋한 몸짓으로 큼직한 몸을 일으켰다.
“…혹은 의무감에,” 엘리엇의 언어는 자주 덜그럭거렸다. “아니면 책임감.” 단어를 더듬었다. 시선은 새뮤얼 버틀러의 새빨간 머리카락, 혹은 어쩐지 아연한 기색을 한 그의 녹색 눈동자에 두고.
“알량한 헌신은 거절한다는 거죠, 새뮤얼.” 엘리엇의 얼굴 만면에 무의미한 미소가 번졌다. “선배가 저랑 성탄절에 공놀이라도 하고 싶어서 제안하시는 게 아니라면 사양. 그런 의미.”
장작은 타닥거렸다. 엘리엇은 올 핼러윈 무렵, 새뮤얼 버틀러의 키를 가뿐히 넘어섰고, 덕택에 교복의 기장이 깡충 모자라졌다. 등받이 없는 소파에 앉은 새뮤얼은 엘리엇을 한참 올려다봐야 했고, 이윽고 짧게 웃었다. 기가 찬다는 것처럼.
“…새끼가 빠져가지고.” 그렇지만, 그는 호칭을 선배로 고치진 않았다. 엘리엇은 멀거니 서서 고개를 조금 숙이고 히죽 웃었다.
“오거나 말거나 네 마음대로 해라.” 새뮤얼의 답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구겨진 교복 로브를 투박한 손길로 털어내며 엘리엇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는 엘리엇 라이더가 자신의 손길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좋았다. 때로 유령 같고, 걸어다니는 미스테리, 실체 없는 그림자처럼 유영하고, 허공을 답보하고, 눈앞에 실존하지조차 않는 환상처럼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엘리엇 라이더가 타고난 모든 불쾌한 인상을 상쇄할 만큼이나.
엘리엇 라이더는 새뮤얼 버틀러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지기만 하는 어깨 위 탑에 벽돌로 얹히지 않을 것이다. 심판의 나팔이 울리고, 종말이 오고, 인류가 공룡처럼 멸망하는 날이 오지 않는 한은.
“그렇지만 네가 와주면 좋긴 할 거야.” 새뮤얼은 목도리를 고쳐매며 말했다. “솔직히 성탄절에조차 동생들 돌보면서 집안일만 하면 아무리 나라도 삶이 지겨워지거든. 난 고작 열여섯이잖냐. 남들이 날 몇 살로 보든, 우리 엄마가 날 대체 뭘로 보고 있든, 내 동생들이 나를 누구라고 인지하든. 그런다고 내가 누린 세월이 16년보다 길어지는 건 아니란 말이지. 요컨대 와서 퀴디치나 좀 해줘.”
엘리엇 라이더는 자신보다 조금 작아진 새뮤얼의 엉성한 목도리 매듭을 쳐다보다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바닥없이 샘솟는 우물은 없다. 그토록 축복받은 영혼은 없다. 신은 우리에게 행복 아닌 슬픔만을 저울로 달아주었다. 우리는 질식할 것처럼 목을 꺾고 숨을 조르는 슬픔을 감당하라는 소명만을 타고났다. 멀린, 멀린, 멀린, 맙소사, 새뮤얼 버틀러가 나에게 제발 살려달라는 말을 하러 왔다, 신은 부재한단 말이다….
엘리엇은 “그럼 갈래요.” 구조신호에 답신했다. “제가 베푸는 거라면 좋아요. 선배가 베풀어야 하는 사람은 세상에 60억 명 더 있으니까. 전 남들 다 하는 건 하기 싫어하거든요.”
일주일 후면 세상에서 가장 헌신적인 인간이 죽고 싶어진다는 날이다. 이토록이나 무가치하고 불공정한 성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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