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랑은 얕게 흘렀다. 과거 어느 왕이 인력을 동원해 팠고, 한때 나라에서 복개했다가 21세기 들어 다시 숨통이 트인 길이라고 했다. 구시가지의 해는 저물고, 물길과 산책로에 가로등 불빛이 들었다. 축대 위에 늘어선 조명가게는 유리창마다 금빛으로 아른거렸다. 검은 머리를 한 수많은 시민이 소냐 크라이튼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혹은 바람이. 가까이에 마천루가 높이 솟은 번화가가 있다던가, 그래서 마천루 사이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바람이 부는가, 잘 모르겠다. 이 도시는 소냐의 고향보다 훨씬 동쪽에 솟아 있었다. 한때 극동이라는 단어로 수식되었다는데, 근래에는 사어가 되어가고 있다. 어딜 가나 답답하리만치 새하얀 콘크리트 아파트가 서 있고, 번화가로 오면 눈길 닿는 곳마다 마천루다. 어딜 가나 사람이 많았고, 소냐의 눈에는 개개인이 식별되진 않았다. 그녀는 시력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시력이 뛰어났더라도 인류를 하나하나 식별할 능력을 갖추진 못했을 터다.
물보다 느리게 걸었다. 낯선 국가에 도착해 머무를 숙소를 구시가지에 잡은 건 소냐가 아니었다. 그녀가 오래된 왕국의 수도에 서서 오래된 물길을 따라 걸으며 시간을 죽이게 된 것이 누가 그린 그림인지, 그녀는 잘 몰랐다. 누군가를 붙들고 물어야겠다는 의지조차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았으므로. 소냐 크라이튼은 아주 중대한 결심을 했고, 매사에 매달려 울던 시간과 운명에 종지부를 찍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 멀리, 멀리까지 날아온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서.
바람에 나부끼는 검은 머리칼이 성가셨다. 허리까지 기를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그녀를 기른 어머니는 그녀에게 머리라도 기르는 편이 좋을 거라고 그랬다. 소냐는 그 말을 30년 평생 받들어 모셨다. 머리칼을 기른다고 어머니가 원하셨던 아름다운 딸은 될 수가 없고, 못난 마음이 고쳐지는 건 아닐 테지만, 그런다고 소냐가 남들처럼 번듯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소냐는 어머니를 닮지 않았다. 미인은 아니었고, 뛰어나게 머리가 좋지도 않았다. 안쓰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큼 깡마른 체구에 키만 멀대처럼 크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여자애가 싹싹하지 못하고, 말수가 적으며, 애교가 없다는 평가는 눈 감고 외울 정도였다. 인간으로 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한참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아무튼, 그래,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모든 인류는 소냐 크라이튼을 인간 대우하지 않아도 좋다고 판단했다. 미적으로 아름답지 않은 여성, 혹은 사교성이 뛰어나지 못한 인간, 만사에 서툴고 허둥지둥하기 바쁜 바보, 부족한 배짱과 떨어지는 매력, 볼품없는 차림새와 빈곤했던 가정환경, 이민자 가정, 그리하여 그녀는 ‘괴롭힘을 받아도 그녀의 죄가 되는’ 존재의 자리에 섰다.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저런 인간이니까 무시당하며 사는 거야.’, 소냐가 목소리를 쥐어짜면 그렇게도 말했다. ‘인생 패배자 같은 소리’, ‘헛소리’, 우린 너 같은 천한 인간과 어울리고 싶지 않아. 너는 세상 모든 이와 격이 맞지 않아, 소냐….
여기서 하나 밝히자. 소냐 크라이튼은 그녀의 어머니 되는 사람이 거두어 키웠다. 원했던 바는 아니고, 그녀 어머니 나름의 사정이란 게 있었다. 소냐는 자신이 어디서 발생한 실수인지 몰랐는데, 나이 스무 살 되던 해에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깨달았다. 그녀는 세상을 구하기로 약속한 신의 마지막 아바타라다. 백마를 타지 않았고, 칼을 쥐진 않았지만, 원래 신의 복음이란 외삽된 이미지가 많은 법이지.
어머니의 착한 딸, 인류의 선량한 이웃이고자 10년을 노력했다. 세상을 구하고 싶었느냐고 물으면 정녕 그랬던 순간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할 수 있는 일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인류가 그것을 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절대다수가 천대하는 이들이 자신들을 미워하지 않기를. 누군가의 삶을 짓밟고 조롱하여 화를 풀어온 일을 ‘눈 감고’ 죄를 용서하기를. 우리는 네 머리채를 잡고 흔들고 고개를 땅에 쳐박겠지만, 너는 우리를 사랑하기를.
그녀는 죽기로 했다. 혹은 살해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저울에서 뛰어내렸다. 누군가는 실망을 무릅쓰고 태어나 처음으로 용기를 냈다. 창조신을 대리하여 세상을 지탱하는 사도로 태어난 그녀는 더는 세상에 암약하는 괴물들을 쫓아 허둥지둥 살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괴물과 재난이 닥치는 틈새를 수선하고 틀어막지 않는다면,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른다고 프로메테우스가 경고했다. 그렇지만, 글쎄, 소냐 크라이튼은 신데렐라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더군다나 아니고, 그녀가 인류에게 약속한 것은 단 하나, 세상의 모든 악을 멸하겠다는 것이었으며….
“소냐.”
발목을 스치는 새까만 주름치마 끝단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고개를 들면 돌다리 위로 커다란 보름달이 걸려 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새까만 머리칼 사이로 역광을 등진 거대한 남자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소냐는 그를 한참 쳐다보고 나서야 시야를 방해하는 곱슬머리를 가볍게 쓸어넘겼다. 목에 걸린 커다란 장식을 내건 목걸이가 흔들렸다. 입을 열었다. “안녕.” 이름이 뭐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일전에 만났을 적엔 열다섯 살 소년이었다는 사실만이 떠올랐다.
“네, 오랜만이네요. 소냐도 작아졌군요.” 그는 다리 난간에 몸을 기울이고 턱을 괴고 있었다. “네가 자란 게 아닐까?” 소냐의 안경은 알이 두꺼워 자꾸 콧잔등 위를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안경을 추슬러 올리면, 조금 선명해진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무심한 노란 눈이 10년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가 올해로 스물다섯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자랐니? 많이 커 보이네.”
“모르겠는데, 전에 소냐를 만났을 때 제가 몇 살이었죠?”
“열다섯 살.”
“그럼 한 30cm쯤.” 그는 놀랄 만큼 껑충 키가 자란 사실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였다. “그리고 전 엘리엇이에요, 엘리엇 라이더. 소냐가 잊어버린 것 같길래.”
“그래, 엘리엇.” 소냐보다 다섯 살은 어린 남자는 투덜거렸다. “전 소냐 이름을 전부 기억했는데, 조금 억울해지는데요.” 소냐는 이 상황이 무척 별나다고 생각했다. 보통은 소냐가 기억하고 타인이 소냐를 잊어버렸다. 그럴 가치조차 없다는 것처럼.
“여기까진 뭐하러 왔니?” 소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덧붙였다. “서울에 온 것 말고, 여기 말이야. 그러니까, 이 근방을 뭐라고 부른다고 했더라….”
“데리러 왔어요. 밤늦었으니까.” 엘리엇은 당연한 걸 묻는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얼굴이 한껏 앳된 인상처럼 느껴졌다. “벌써 자정 가까운 시간이에요. 몰랐어요? 전화도 안 받고, 머문다는 호텔에도 없고, 그래서 다들 걱정 중. 말도 안 통하는 나라인데.”
소냐는 산책하는 동안 벌써 세 시간이 훌쩍 흘렀고, 자신이 저녁 식사조차 걸렀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너 오늘 입국한 거 아냐?”
“네, 뭐, 그렇죠. 틈새가 벌어지면 어디든 가니까. 아마 일 끝나면 도로 영국으로 돌아가겠지만.”
“오자마자 나한테 전화를 했니? 왜?”
“소냐한테만 한 건 아니고, 으음,” 엘리엇은 느릿하게 호흡하며 말을 이어갔다. “마야마 씨한테도 했는데요, 오셨을 거 같아서, 일본 여기서 가깝고, 음, 그리고 또….”
“미안해.” 그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이탈하려는 건 아니었어….”
“그걸 문책하려고 온 건 아니고요. 어차피 틈새가 어디서 벌어질지는 대체로 모르고, 서울이란 것만 미리 알게 된 거니까. 친절한 프로메테우스 덕분에.” 대화가 끊어졌다. 엘리엇 라이더는 스물다섯이 되고도 여전히 예측할 수 없는 군데에서 문장을 분질렀고, 꿰뚫어 볼 것처럼 소냐를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실체가 없음에도 소냐는 그 애가 늘 직선처럼 쳐다본다고 느꼈다. 타인은 대체로 소냐를 다 안다는 것처럼 쳐다보기 일쑤였으나.
엘리엇은 몸을 좀 더 기울여 소냐에게 물었다. “소냐가 슬프다면 좀 더 같이 걸을까요?” 소냐는 고개를 한껏 들고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물으니, 북유럽의 신격에 토대를 둔 엘리엇은 눈을 끔뻑였다. “걸어서 소냐가 행복해진다면, 동이 트도록 걷고 싶으니까요. 저는 소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바라거든요. 해가 뜰 때까지 걸으면, 어디까지 걷게 되는 건지, 우리가 어디에 닿게 되는지,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소냐는 말을 잃었다. 그녀는 인류에게 끊임없는 천대와 냉대를 받아왔다. 그러한 자신이 인류를 배반한다. 저울에서 뛰어내려 종말을 무릅쓰고 세상을 고치기로 마음먹었다. 죽고 싶은 건지, 전부 죽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건지도 모르겠으면서, 그녀는 스스로가 인류를 저버리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20세기 말, 인류는 스스로 자본에 의한 신분제의 멍에를 썼고 피라미드 밑바닥에서 사회의 모든 하중을 견디고 있는 소냐 크라이튼과 같은 사람들의 집단 무의식은 종말을 꿈꾼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슬픔에 종지부를 찍고, 태어나기가 공정하지 않았으니 죽음은 공평하길 원한다.
그렇다면 엘리엇 라이더는 어째서 저울에서 뛰어내렸을까? 어쩌다 인류는 판도라의 상자 밑바닥에 눌어 붙어 있던 희망마저 상자를 빠져나가도록 종용했을까?
현생 인류는 죽기로 한 걸까, 살기로 한 걸까? 사실 소냐 크라이튼을 천대받아 마땅한 인간으로 낮추고 목을 조르던 인간들마저 소냐 크라이튼과 마찬가지로 지독한 우울증과 자기 파괴적 망상이라는 병에 걸려 있기라도 한 걸까?
그래, 그토록 잘난 척 소냐의 모든 것을 부정하던 인간들마저 사실은 전부 벌거벗겨 보면 똑같이 생겨 먹은 비(非)인간들이 아니었느냐는 말이다.
“호텔까지 걸을까.” 소냐는 모든 것이 지겨웠다. “시차 적응도 안 됐을 텐데 데리러 오게 한 건 미안하니까, 간식 사줄게.” 무엇보다 소냐 크라이튼이 지긋지긋했다.
“정말? 저 저녁 아직 안 먹었어요.”
“잘됐네, 나도 안 먹었어.”
“소냐가 좋아하는 걸로 먹어요, 저 편식 안 하는 편.”
“나도 여기 음식 잘 모르는데….”
다리로 올라가는 돌계단을 딛고 결심한다. 내일 아침에 동이 트면 이 끔찍한 머리칼부터 잘라버려야지.
그러나 한편, 내일 저녁에도 긴 머리칼을 풀어헤치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청계천을 걷게 되리라고 서글프게 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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