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냐로부터 걸려온 전화다. 그 남자는 그제야 자신이 전파가 통하는 산 아래 큰 마을을 목전에 두었겠다는 사실을 알았다. 21세기 고산(高山)에도 사람은 살았다. 산이 키운 청년들을 도시는 염치없이 잡아먹었다. 그럼에도 구석구석 ‘인간’ 문명의 숨은 붙어 있었다. 이제는 허리가 굽고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들만 가득 남은 마을에도 틈새는 벌어졌다. 몇 달째 전파가 닿지 않는 산등성이를 다녔다. 까닭에 가방에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스마트폰이 울리면 남자는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사람 하나 간신히 다닐 법한 가느다란 흙길에서 커다란 가방을 내려놓고 온갖 옷가지를 꺼냈다.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21세기 문명의 상징을 꺼내면 죽기 일보 직전이던 불씨가 바람을 만나 타오르는 것처럼,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었다. 그는 허둥지둥 전화를 받았다. “네, 자, 장웨이입니다.” 그러면 저 너머에서 “어떻게 전화를 넉 달 만에 받니?” 하는, 맥없는 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소냐 크라이튼이다.
“저, 전파가 안 통해서요.”
“거기가 어딘데?”
“아마도 히말라야 근처.”
“안 통할 만하네.” 시큰둥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몇 년 전만 해도 그가 고산이며 밀림 혹은 사막, 인류가 이제는 있었던 것도 잊어버리기 시작한 공간을 골라가며 누비고 있다는 사실에 매번 아연실색했다. 그녀는 장웨이에게 그렇게 말했다. 너는 왜 자진해서 준다는 보상도 안 받니, 미련하기는…. 그는 매번 보이지도 않을 전파 너머 그녀를 상상하며 멋쩍은 표정만을 지었다.
“누나는 어디에요?” 물으면 소냐는 답을 내려주곤 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미적지근했다. “알려주기 조금 어렵게 됐어.” 어딘지 모른다는 말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소냐는 발길이 닿는 대로 다녔다. 그녀의 어머니가 계신 런던만 아니라면 어디든. 그녀는 유럽이 지겹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아마 당분간은,” 소냐의 말이 가느다랗게 이어졌다. “아니, 어쩌면 영영 다시 전화하지 못할 것 같아서 걸었어. 그래도 너 무사한지는 알고 싶어서. 너는, 먼저 전화 걸지 않으면 생사를 알기도 어려우니까….”
웨이는 고개로 스마트폰을 불편하게 고정하고 흙바닥에 마구잡이로 늘어놓았던 옷가지를 도로 가방에 눌러 담았다. 지퍼를 잠그고, 그 무거운 것을 짊어지는 동안 5분 이상의 공백이 난다. 그러나 소냐는 그를 채근하지 않았고, 웨이는 소냐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그것이 공교롭게도 히말라야를 사이에 두고 대립해온 두 거대한 문화권이 잉태한 사도 두 사람의 약속된 정이었다. 눈이 돌아갈 만큼 휘몰아치는 사회에서 암초처럼 박혀 서 있는 것. 인격의 기질이 가까웠고 신격의 기질은 멀었으며 조금 더 젊어서는 풀어야 할 오해도 많았지만, 때로는 시간이 약이다. (사실은 유일한 약이다.)
우리가 장웨이라고 이름 붙인 신농은 걸음을 뗄 즈음 이렇게 묻는다. “제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요?” 사실, 이 질문은 우습다. 남은 11명의 사도에게 장웨이는 늘 자리에 없는 사도였다. 모여도 잘 참석하지 않았고, 연락할 사람도 없었다. 그는 때로 인간(人間)으로 나서,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린 비가시적 신농과 인간 장웨이에 관하여 골몰했다. 그는 유독 잘 사라졌다. 유일한 특기였다.
“별일 없어.” 웨이는 그것이 거짓말이구나, 슬프게 직감한다. “그냥 으음, 그래. 하람이랑 아직 연락하는지, 아니, 할 생각이 있는지 궁금했어. 아니면, 그래, 피셔 씨라든지….”
웨이는 수십 걸음을 걸었다. 그녀가 청룡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을 그는 살면서 몇 번 들어본 일이 없다. “갑자기?” 제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고를 수 있는 말도 없었고.
“설명이 필요해요.” 잔가지에 걸린 머리칼을 손으로 끊어내며 염치없는 말을 한다. “혹시 모르니까 부재중 기록이라도 잘 살펴봐.” 소냐는 그에게 늘 좀 더 말을 하는 게 좋겠다고 당부했지만, 그녀도 못지않게 말수가 적었다.
“지금 어디예요?”
“…모르겠어. 여기가 어디지?”
“누나.”
“정말 모르겠어.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어.”
“…소냐,”
“그렇지만 괜찮아. 아마도 엘리엇이 데리러 올 테니까.”
“설명이 하나도 안 돼요. 엘리엇이 누군데요?” 걸으면 길이 끝난다. 언덕 아래로 넓게 뻗은 이름 모를 마을. 인가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고, 사원에 세운 목탑이 높았다. 집마다 골목마다 나다니는 수레며 까만 머리칼의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누군가는 목에 카메라를 걸었고, 꽃을 파는 아이며 신문을 가득 싣고 지나가는 자전거, 그래, 장웨이는 말없이 눅눅한 공기를 호흡하다가 불현듯 깨닫는다. 뭔가가 어그러졌다. ‘엘리엇’이라는 사람은 장웨이가 만나본 적도 없고 있는 줄도 몰랐던 마지막 사도의 이름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그가 떠나 있는 동안, 혹은 숨어 있는 동안,
“하람이가 왜 저한테 전화하죠? 제 목숨을 노리러 온다면 몰라도.”
“…해명하고 싶지 않아.”
“무슨 해명을요?”
“설명해도 그만두지 않을 거잖아.”
세상은 종말을 목전에 두었다. 햇살은 쏟아지고, 오늘도 저만큼의 삶이 찬란함에도.
“넌 그런 점에서 하람이와 통한다고 생각했던 것뿐이야. 그 애도 바보는 아니니까, 너는 ‘그만두지’ 않을 거란 걸 알 것 같았거든. 그러니까, 전화 받으란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제 너도 내가 망쳐버린 관계가 되어버렸지만, 그래, 나는 모든 게 지긋지긋해서 이제 내 손으로 전부 망치기로 작정한 여자지만,” 미쳤다고 해도 돼, 소냐는 울적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정이라고 생각해주겠니? 아니면, 자기만족이라도 괜찮아. 왠지 나마저 너를 모르는 척하면 네가 그대로 사라져서 죽어버릴 것만 같았어.”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목소리가 말라붙은 것만 같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것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해야 할 말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순간, 10년 넘게 도망쳐 온 조명 아래로 멱살 잡혀 끌려왔음을 직감했다. (이 가엾은 신농의 목을 움켜쥐고 무대 위로 내던진 것은 인류일까?) 간신히 무대 배경 뒤에 파묻히듯이 숨었다고 믿었는데, 어둑한 객석에서 시선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내가?) 아니, 읽고 있다. (그대가?) 그래, 읽지 않으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장웨이’는 80억 중 12명으로 선정된 인물이다. 조명은 나약할지언정 주연의 머리 위를 쫓는다. 빛을 내린다. 그림자가 늘어진다. 그는 제 이름 옆에 나란히 적혔을 역할을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언제 소냐 크라이튼이 그가 무심코 입에 올리는 호칭을 달갑게 여겨주었단 말이냐. 갑자기 쏟아지는 시선. 가시적으로 실체를 갖추고야 마는 것. 물론 장웨이(절반의 신농, 어느 한학자의 손녀(과연 그러했는가?), 혹은 청룡의 언어를 빌려 ‘사도로 나서 사명을 두려워하는 정신 나간 인간’, 그러나 태어나 한순간도 여자였던 적은 없었고 신이었던 적은 더군다나 없었던,)는 늘 거기에 있었으나, 언제나 무대 한 구석 혹은 사회의 비가시적 영역 속에 도사리는 눈이었으나,
“소냐 누나.” 통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사도 신농은 언덕 위에 우두커니 서서 시선에 짓눌려 질식할 것 같은 호흡만을 내려놓았다.
해명을 듣고 싶다. 설명을 들어야 하겠다. 그러나 누구로부터? 그와 문명사회를 연결하던 유일한 실은 방금 힘없이 끊어졌다.
무대의 막이 올랐다. 이제, 첫 문장을 다시 써야 하겠다. 장웨이는 전화를 걸었다. 걸어야만 했다. 걸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그것을 신농에게 갈구하므로, 거역할 수 없는 지문을 연기하여, “정말 미안한데, 하람아.” 그 남자의 역할은 이렇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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