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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카를로스] 남십자행 열차

  (차내 방송이다.) “우리 열차는 곧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잊으신 물건 및 ……이 없는지 확인하시고….” (어조가 없고 단조롭다. 내 몸을 누인 장소는 비좁은 좌석이다. 열차 주제에 덜컹거리는 소리 한번 내지 않아 지겹다. 차창 너머로 은하는 흐른다. 어느덧 이목구비를 잃고 희멀건 얼굴을 한 아이가 불쑥 얼굴을 디밀었다.) “있지, 하차할 때도 표를 보여줘야 해?” (하고 묻는다. 나는 아이 얼굴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혼백의 동그란 두부(頭部)를 쳐다보았다. 탈 땐 14명 다 구분할 수 있었는데, 그가 누구였는지 어디서 탑승했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리를 땋은 아이였을까? 아니, 아니, 어쩌면 다리 한 짝이 너덜거리던 아이일지도 모르겠다. 그마저도 아니라면, 아니, 누구라도 상관은 없지만.)

 

  “안 보여줘도 돼.” 우리 열차는 곧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지긋지긋한 방송을 되뇌었다.) “다행이다. 표를 잃어버렸거든.” (혼백은 어느덧 사지마저 흐리멍덩했다. 다섯 손가락이 없는 뭉뚝한 팔을 들어 뺨이었는지 턱이었는지 모를 부위를 만지작거렸다. 무슨 함의가 있는 행동은 아닐 터다. 죽은 것들의 행동엔 모두 의미가 깊고, 의도는 없다.)

 

  “검표를 카를로스가 하면 좋을 텐데, 오스카르는 왠지 표가 없다고 하면 화를 낼 것 같아.”

  “오스카르가?” 우리 열차는 곧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설마. 오스카르 라르손은 열차 내 프로그램 같은 거야. 원래 죽으면 다 그렇게 된다고.” 우리 열차는 곧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이 열차는 너희를 위한 거지. 오스카르가 너희에게 그다지도 불친절할 수는 없어. 생긴 게 좀 곰 같긴 해도.”

  “차장님도?” 우리 열차는 곧 목적지에,

  “물론이지. 그게 살아 있는 것 같아?” 우리 열차는,

  “그럼 카를로스는?” (나는 이때 몸을 번쩍 일으켜 앉았다. 혼백은 나의 뒤통수를 주시한다.) “카-를로스.” (혼백의 사지가 어깨에 닿았다. 당신은 알고 있나? 혼백은 무겁다. 상상을 초월하는 무게. 나는 그 까닭이) 우리 열차는 곧 목적지에, (죽음보다 더 무거운 슬픔이 없어서라고만 받아들였다.)

 

  “왜 혼자 아직도 카를로스야?”

 

  우리 남십자(CRUX)호 열차는 곧 목적지 3079801번 레테에 도착합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잊으신 물건 및 아직 가지고 계신 이름이 없는지 확인하시옵고 안전한 하차를 위하여 대기해주십시오. 본 열차 내에서 식별 코드를 가지고 있는 존재는 다음과 같습니다.

 

  (열차가 멈추면 신경질적으로 혼백을 돌아본다. 내 어깨를 짓누르던 천진한 것은 일직선 궤도를 그리며 멀찍이 물러난다. 꽃향기가 어지럽다. 열넷이나 되는 멀건 혼백은 차내 복도에 깔린 메리골드 꽃잎 위를 열 지어 간다.) 차장, ‘B’. (소리가 난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통곡에 가깝다.) 승무원, ‘오스카르 라르손’.

 

  (나를 멍청하게 마주 보던 혼백은 대열의 끝에서 연신 나를 돌아보았다. 눈도 코도 입도 없는 희멀건 덩어리가 나를 책망하는 것처럼.)

 

  불청객, 카를로스 그레코.

 

  (호명에 숨이 막힌다. 반쯤은 정신이 나가서 차량 복도를 달려도 열차의 끝에 이를 수 없고, 열차의 문을 열면 까마득한 은하수만이 발밑에 깔렸다. 빌어먹을 귀신 오스카르는 방송을 끝마치면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것처럼 뻔뻔한 무표정을 하고 내 뒤에 두 발짝 물려 서 있다.) “오스카르, 그거 알아?” (아연한 얼굴로 발밑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면, 가스등 불빛 아래 서서 혼백들의 하차를 안내하는 오스카르 라르손이 하나 더 있다.) “원래 우주에선 숨을 못 쉬어.” (열차는 이런 식이다. 열차 내에 차장은 몇 명이고, 오스카르 라르손은 몇 명이나 돌아다니고 있는지 모르겠다.) 열차와 승강장 사이가 넓습니다. (내 뒤에 서 있는 몇억 명째인지 모를 귀신 오스카르의 고개가 기계처럼 기울어진다.) “진짜 우주가 아니잖아.” 내리실 때 발밑을 주의해주십시오, (하는 목소리와 같은 음색.)

 

  “네 절반이 저승의 왕인데, 저승에서도 호흡 못 할 까닭이 있나?”

 

  우리 열차는 하차 시 검표를 진행하지 않습니다. 하차하실 역을 착각하지 마시옵고,

 

  “이 빌어먹을 열차를 언젠가 반드시 탈취해주겠어.”

  “그래도 빌어먹을 믹틀란테쿠틀리라고는 안 하는군. 네 절반이 저승의 신이라서 억류당했는데도.”

  “당연하지,” 덜 잊으신 이름이 없는지, “내가 죽어서 여기 눌러앉는 꼬라지를 차장과 그 위에 도사리는 신이 원하는 모양인데 난 원래도 반골이거든.”

 

  덜 잊으신 인류와 세상은 없는지,

 

  “살아서 하차할 거야. 망할 놈의 저승행 열차.”

 

  혹은 사랑은 없는지,

 

  “건투를 빌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가망은 없지만 말이야. 어차피 넌 여기로 돌아올 테니까.” (유령은 무감하다. 오스카르는 더는 무겁지 않은 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