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얼 바솔로뮤 버틀러는 지구로 복귀한 후 스무 시간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기절인지 수마가 몰려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는 쿠션에 모가지를 푹 기대고 누워 어느 소설에서 읽은 진부한 첫 문장을 실없이 떠올렸다. 낯선 천장이다. 아니, 실은 낯설지 않은 천장이다. 목 끝까지 담요를 덮었다. 몸을 뒤척이면 소파 등받이가 우뚝 서 있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새끼, 재워줄 거면 어디 손님 방에라도 넣어주지.” 부질없는 투정이다. 우리의 프로메테우스에게 그만한 눈치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손님 방? 얼어 죽을, 그런 건 전부 창고로 전락했어.” 보아라, 그는 무대에 등장하는 타이밍조차 이다지도 눈치가 없는 신이다.
미헤일 체레텔리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숙여 기댔다. 새뮤얼은 몸을 몇 번 더 뒤척이다가 시야에 그의 얼굴이 걸리면 대놓고 혀를 찼다. “조명 등지고 나타나지 마, 열받네, 진짜.” 미헤일, 그러니까, 우리의 프로메테우스, 모두가 주로 ‘미샤’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로 약속한 남자는 한껏 얄밉게 웃었다. “왜? 이제는 사도가 반신이란 게 와닿냐?” 새뮤얼은 지긋지긋하단 얼굴이었다. “후광이 없어도 알아, 새끼야.” 그렇게 말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뒤집혔다.
무대는 미샤의 화실이다. 새뮤얼은 자신이 몇 번 프로메테우스 앞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안 났다. 마지못해 몸을 일으키면 머리가 깨질 것 같기나 했다. 흘러내리는 담요야 바닥에 나뒹굴건 말건 관자놀이에 절로 손이 갔다. 열이 없어도 두통은 지끈거리고 토할 것 같았다. “뭐라도 좀 마시겠어?” 마지못해 미샤가 물으면, 새뮤얼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만에 답한다. “물만 마셔도 토할 거 같으니까 됐어.” 미샤는 그를 턱을 괴고 내려다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럴수록 물이라도 마셔야지. 좀 기다려 봐.” 새뮤얼은 마지못한 얼굴로 등받이 너머 프로메테우스의 동선을 쳐다보았다. 여전한 얼굴이지만 그의 도드라지는 백발의 길이가 달라졌다. 날개뼈에 닿던 끝이 허리까지. 그렇다는 말은 또 그만한 시간이 들었다는 의미겠다.
미샤가 얼음물 한 잔을 건네면, 새뮤얼은 안경을 찾아 쓴 후 마지못해 유리잔을 건네받았다. “너 지금 몇 살이지?”라는 멍청한 질문에, 미샤는 더 멍청한 대답을 내놓았다. “아직 27살. 네가 떠나고 한 넉 달 흐른 거 같은데.” 계절이 바뀌었군, 새뮤얼 버틀러는 유리잔의 가장자리를 물고 말이 없었다.
프로메테우스가 그리던 그림은 그새 몇 번 바뀌었을까? 일단 새뮤얼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화폭은 사라졌다. 고개를 들면 벽면 한가득 무엇을 그렸는지조차 알 수 없는 미완성 작품이 있다. 미샤의 화실은 그런 식이다. 뭐가 붙어 있건, 새뮤얼의 깜냥으로는 가늠할 길이 없다.
“다행히 세상이 아직 안녕하군.”
“어, 아직 종말이 안 왔어.”
“라이더도 무사하겠고.”
“걔야 종말 안 오면 죽을 까닭이 없지.” 미샤는 기가 막힌다는 투였다. “세상엔 그만한 덩치를 한 반신을 해코지하고 살해할 수 있는 존재가 귀해요, 네 눈에나 아기 사도지, 걔가.”
“우리가 아직 27살이면 걔는 25살 아냐? 아직 아기네.” 새뮤얼의 유머는 미샤에게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그저 “어이구, 미친놈.” 소리나 절로 나올 따름이지.
“그래서, 신은 좀 찾았냐?” 미헤일 체레텔리가 옆에 앉으면 딱 그의 무게만큼 소파가 가라앉았다. 새뮤얼은 유리컵 가장자리를 물고 미헤일이 그리다 만 화폭에 시선을 고정해두었다가 그의 질문을 듣고서야 자신이 걸친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너덜거리는 수첩을 펼쳤다. 낱장을 파헤치듯이 넘긴다. 종이 위로 흰빛이 미끄러졌다. 어지러운 메모가 줄지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는 문장부터 그곳의 기후, 만난 사람들, 역사와 신화, 나누었던 대화와 수많은 좌절과 체념, 그래, 새뮤얼 버틀러의 절망적인 기록. 이 가엾도록 소득 없는 탐험가!
새뮤얼 바솔로뮤 버틀러는 틈새에 직접 뛰어드는 인간이다. 그는 나를 찾고 있고, (놀랍진 않다. 나를 찾는 인간은 사실 무대 밖에도 득시글거린다.) 미헤일 체레텔리가 그의 완벽한 공범이자 배후로 도사린다. 사도는 무대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것은 틈새 너머로 실종된 카를로스 그레코가 목숨을 걸고 증명했다. 사도는 대체되는 부품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재밌는 발상이다.) 인간은 너무나 많고 까닭에 1대1로 대체되지 않는다. 그들은 ‘나의 사각’이다. (정말 흥미로운 추정이다.) 나는 인간을 하나하나 돌보지 않는 신이므로, 인간이 이 체스판에서 ‘완벽히 사라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 인간이 틈새 너머에서 죽지 않고 프로메테우스의 화실로 돌아올 방법만 있다면….
“밥이 맛있었다고 적어놨네, 내가.” 새뮤얼이 한탄하면, 미샤는 더욱 황당하다는 낯이다.
“그런 건 대체 왜 적어두는 거야?”
“밥 맛있는 거 말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세계였나 보지.” 수첩을 덮었다. 속 시끄럽기는 새뮤얼도 마찬가지다.
“살아 돌아왔다 싶으면 꼭 멍청한 것만 적어와요.”
“틈새 너머로 나가면 여기서 있었던 일은 기억이 흐려진다고, 네가 그 답답함을 알아, 새끼야?” 새뮤얼 버틀러는 불경하게도 신에게 수첩을 내던졌다. “기억도 가물거리는 목표를 더듬어서 창조신 수소문하기, 이게 지금 쉬운 일 같냐? 네 그 열받는 낯짝을 기억해서 내가 여기로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적이다.”
자, 그럼 새뮤얼 버틀러는 무슨 수로 프로메테우스의 화실로 돌아오고 있나, 미헤일 체레텔리는 우리에게 일언반구 해명도 없다. 뺨을 얻어맞은 수첩을 주워 펼쳤다. 새뮤얼이 그린 그림은 일반인치고 봐줄 만했는데 악필은 여전했다. 도대체 뭐라고 쓴 건지 모를 구부러진 글자가 연결된다. 안개가 낀 호수다. 배를 저어가는 사람 아닌 것들과 사철의 꽃이 핀 정원, “이놈들이 우리 세계로 넘어와 말썽을 부렸군.” 미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화가 통하진 않았던 것 같다. 새뮤얼의 악필을 눈살을 찌푸려가며 더듬자면, 이 고요한 호수를 다스리는 신을 만났으나 그녀는 우리 세계와 무관하다. 호수를 둘러싸고 도시가 발달했다. 수상한 마법사를 만났다. 그들은 새뮤얼에게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고 새뮤얼은 대답하지 않았다….
“용케도 나를 기억해서 돌아왔네.” 그것이 프로메테우스의 두 번째 권능이자 마지막 권능이다. 그는 공물을 대가로 인간에게 합당한 권능을 내린다. 이를테면, 자신의 공범 새뮤얼 바솔로뮤 버틀러에게 딱 하나 프로메테우스의 화실로 돌아올 수 있는 어설픈 권능을 내렸다. “네 생각 안 하면 평생 집에 못 오지, 그게 얼마나 염병하게 짜증 나는 일인지. 21세기에 프로메테우스한테 식전 기도 올리는 미친 새끼는 세상천지 나밖에 없을 거다.” 언제 어디서나, 잊지 않고 기도하고 신탁을 구가할 것. 그만한 제물을 올리고 치성을 드리고 가끔은 온종일 자신의 시간을 살해할 것. 그리하여 얻는 것이 고작, 그래, 고작 신의 앞으로 돌아오는 조그마한 힘이다.
새뮤얼 바솔로뮤 버틀러는 틈새 너머로 떠나 천도경을 닷새 탐험하였고 이틀 꼬박 제단 앞에서 허비했다. 그리하여 간신히 화실로 돌아와 보고하기를, 신은 거기에 없었나이다.
이는, 새뮤얼이 신앙이 소홀하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도박임을 의미한다. 미헤일 체레텔리는 프로메테우스로 난 까닭에, “당분간은 그냥 여기 있어.”라고 인간을 만류한다.
“왜, 그 아즈텍의 신이 더는 움직이지 않나?”
“아니, 오히려 활발하게 기어 다녀서 문제야. 염병할 빌런 새끼들이 왜 그렇게 부지런한지 모르겠어.”
“그들이 움직이면 창조신이 있는 곳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는 틈새가 적지 않다는 의미일 텐데. 내가 탐사해야 하는 틈새는 한 수 백 개 남아 있지 않나?”
“수백 개씩은 안 남았어.” 미샤는 시큰둥하게 벽면을 가득 차지한 화폭을 쳐다보았다. “곧 종말할 거거든. 돌이킬 수 없는 틈새가 벌어질 거야. 아마도 올해 안에, 장소도 명확해.” 새뮤얼은 말이 없다. “뭐, 요컨대 너 떠난 사이에 좆됐단 뜻이야.” 체통 없는 프로메테우스.
“이봐요, 신이시여.” 새뮤얼 또한 부루퉁한 얼굴로 화폭을 주시했다. 아하, 그렇다는 말은, “한 몇 달 대기만 시킬 요량은 아니시잖습니까.” 미헤일 체레텔리가 이제는 정말 종말을 그리고 있다는 말이겠다.
“세상에 저만큼 신실한 신자가 없지요?” 새뮤얼은 화폭을 가리킨다. “이번에도 대홍수가 옵니까, 빙하기가 옵니까, 지구가 사막이 됩니까, 북극이 녹습니까, 괴물이 인간을 다 뜯어먹습니까?” 미헤일을 올려다본다. “당신의 아들이 어떻게 해야 저 종말을 막겠습니까?”
“열받게 신실해서 네놈 때문에 내가 신이 되는 건 아닐까 두려울 정도지. 뭔 제사를 이틀씩이나.” 토로하자면, 미샤는 사도가 싫다. 그들의 운명은 대체로 이렇다. 엘리엇 라이더가 사도인 까닭에 가엾은 인간 새뮤얼 버틀러의 인생 전반이 망가진다. 종말이 오면 반드시 죽는다는 신탁을 받은 어린 사도를 위하여 제 삶 하나 간단히 내던지는 멍청하고 가엾은 카나리아. 막상 이 무대의 주인공 열둘은 대체되는 것이고, 이 모든 판이 그대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마련되었음에도 이용할 줄도 모르고 불필요한 정을 내리지.
엘리엇 라이더는 종말의 날에 죽기 위해 태어났을 뿐인데, 그 사도가 죽는 게 인간의 삶 하나를 바칠 만큼의 가치가 있단 말이냐.
“창조신이 직접 오진 않을 거야. 문제는 그 새끼가 조만간 무대를 완전히 떠날 거라는 거다.” 대종말이 올 것이다. “케찰코아틀이 바벨로 절반 떼어간 거, 인간을 살해하는 거, 열 받고 미친 소리지만 그나마 바벨이 그만큼 쇼를 하니까 신이 아직 여길 보고 있는 거지. 하지만 문제는, 이 희곡이 벌써 몇백 만장 왔다는 거야. 신이 우리에게 질리면 끝인데 이미 그 작자는 똑같은 판을 수백만 번 봤다는 거지.” (영리한 프로메테우스.) “그가 완전히 떠나기 전에 끌어내야 하는데, 내 생각에 사도는 틈새에 뛰어드는 순간 게임 오버거든. 하지만 넌 몇 번이고 화실로 돌아오잖아. 네 자리는 대체가 되지 않아. 너는 사도가 아니라 일개 엑스트라니까.”
산에다 방주를 지어 올려라, 데우칼리온.
“네가 뛰어들어야 하는 마지막 틈새는 하나야. 대종말의 순간에 벌어지는 그 틈새. 그 너머는 반드시 창조신이 있는 곳으로 연결이 되어 있을 테니까, 객석으로 난입해. 무대의 커튼콜을 외치는 신을 끌어와. 내 앞으로.”
새뮤얼은 그럴 적이면, “의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고,
“…젠장, 라이더 그 새끼랑 공놀이 한 번 하기 더럽게 어렵네.” 험악하게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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