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 위태로워 보였다. 오스카르는 조명을 한참 쳐다보았다. 총을 쏘아서 조명을 매단 줄을 떨어트리는 건 어떨까. 무대는 비었고 관객은 없다. 구조물은 위험하게 흔들리는데.
1.
자기소개란 건 참으로 어렵다. 오스카르는 건축사무소에 처음 면접 보러 갔던 순간을 떠올렸다. 토로하자면 취직은 손쉬웠다. 그는 숙부의 권유를 받아들여 건축을 전공했고, 그의 인간 숙부는 업계에 얼굴 아는 사람이 많았으니까. 이번 삶에서(그는 이 삶을 자주 이렇게 표현했다.) 그의 절반은 살아본 적 없는 시스젠더 남성의 삶을 골라서 현현했고, 20세기의 여명이 밝아도 인류는 차별과 불공정을 ‘수선’하지 않았다. 인간으로 사는 삶은 내던진 실뭉치처럼 술술 풀려나갔다. 어쨌건, 오스카르가 면접에서 자기소개를 말아먹었더라도 일자리를 얻는 데엔 문제가 없었으니까.
깡마르고 창백한 안색이던 면접관은 숙부와 하나 닮지 않은 젊은 청년을 마주하고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첫인상의 당황스러움은 “자기소개를 해보세요.”라는 요구에 5분이나 이어진 정적만큼은 아니었다. 오스카르는 그러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스웨덴 베스테로스 출신입니다.” 면접관은 마지못해 말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라르손 군.” 오스카르는 면접을 보러 나온 중년 남자가 성가시단 생각을 했다. 그게 제법 얼굴에 티가 났다는 사실은 몰랐지만.
면접관이 쥐고 있는 서면엔 오스카르의 인적 사항이 적혀 있다. 태어난 해, 생일(혹은 현현한 날), 가족 정보, 이름, 출신 학교, 그밖에 몇 가지 수상 이력과 병역 정보. 이 멍청하고 어리석은 인간은 제 손에 정답을 쥐고 정답에서 벗어난 어떤 심연을 원하는 것처럼 군다. 사도 스쿨드입니다, 당신들이 원해서 현현했습니다, 그렇게 소개했다간 취업이 엎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예민한 숙부가 뒷덜미를 잡고 쓰러질 것이 분명하다. 인간의 감정은 층위가 많다.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너무 많은 종이다.
“죄송합니다만,” 그는 사색이 귀찮아졌다. “그 종이에 적힌 것 말고 제가 당신께 무슨 정보를 더 드려야 하는지 차라리 명시해주시겠습니까? 이런 면접 자리는 처음이라서요.”
“좋아하는 거라거나, 뭐, 취미라거나,” 면접관의 떨떠름한 반응을 보고 오스카르는 숙부가 이 작자에게 적지 않은 돈이라도 빌려준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특기라거나.”
“호불호가 분명한 편은 아닙니다. 업무 외의 특기라면 글쎄요,” 그는 무심코 이렇게 대답할 뻔했다. 종말을 막는 일. 그렇지만 면접관 뒤에 벌겋게 벌어진 틈새가 그의 시야에선 실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스카르는 안다.
“사격 잘합니다.”
“아.” 면접관은 침울한 표정이었다. “세상이 어수선해서 원.”
남자는 그래도 세계적인 전쟁이 끝나 다행이라고나 했다. 오스카르는 자신이 어째서 사격을 익혔는지, 누가 자신을 가르쳤는지 따위는 일언반구 떠들지 않았다. 그저 면접관이 오스카르에게도 있으리라 추측하는 공통된 비극을 상상하고 날조하도록 두었다. 해명은 귀찮다. 설명해야 할 까닭도 없었다. 그는 건축 도면을 그리러 왔지, 무엇인지도 모를 이데올로기에 몸을 내맡겨 서로 곡해하고 증오하는 인간의 머리통에 총을 쏘러 온 스파이는 아니었으니까.
0.
가느다란 사지는 객석에 널브러졌다. 무대 아래로 잘린 머리가 나뒹굴고 있다. 그 남자는 제법 괜찮은 주연이었다. 조금 조잡한 연극 의상을 걸친 시신이 도처에 널렸다. 오스카르는 무대 한복판 혹은 인간의 토막 난 부품 위에 몸을 누인 채로 위태롭게 흔들리는 조명 시설에나 집중했다. 어느 과학자는 성당의 흔들리는 조명을 보며 진자의 운동 법칙을 발견했단다. 그리고 우습게도 오늘 어느 사도는 그럼에도 지구는 돈다던 그 과학자가 발견한 진자 운동을 통하여 다른 법칙에 관하여 사색한다. 혹은 시계추처럼 돌아오는 과거를 돌이킨다. 조명이 떨어질 것만 같다.
2.
오스카르 라르손은 스스로가 열 줄의 문장이면 충분한 인간이며 사도라고 여긴다. 따라서 그에게 이런 질문은 무의미했다. “어째서 괴물에게 방아쇠를 당기고 세상을 구하고 있지?” 그는 삶에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다. 태어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법 부유하고 부패한 정치가 집안의 막내아들이었다. 그 일엔 까닭이 없다. 자라고 보니 미래의 가능성을 읽을 수 있었고, 그의 절반이 어느 천방지축 여신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알았다. 그 일에도 까닭이 없다. 철학적 사색을 그만둔 인간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고 탱크를 몰 때 사색에 재주가 없는 어느 사도는 모두가 잊어버린 틈새를 수선하여 대뜸 모두가 죽는 일이 없도록 세상을 돌봤다. 그 일에도 까닭이 없다.
사도로 나서 세상을 구하는 일에도 까닭이 필요하지 않았다. 인류의 호흡에 윤리와 도덕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이것이 오스카르 라르손의 신념이다. 혹은 무능이거나.
0.
틈새는 불현듯 벌어졌다. 원래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랬더라면 어떤 둔감한 인간일지라도 그 위에 극장을 짓진 않았을 테니까. 미래는 그렇다. 축복도 예고가 없고, 저주 또한 사이렌을 울리며 오지 않는다. 피 냄새가 기분 나빴다. 혹은 제 커다란 몸에 깔려 짓이겨진 시체의 감각. 제 머리칼은 시뻘건 색으로 물들었을 것이며 끝은 조금 그을렸겠다. 지저분한 몰골이겠지. 엉망진창, 천방지축, 불길을 토하고 관객과 배우를 배부르게 뜯어먹은 괴물은 무대 아래 납작 엎드려 있다. 오스카르는 그것들의 이름 및 정체를 모른다. 한번 알았던 적이 없다. “자기소개를 한 번 해보지 그래?”라고 갈라지는 목소리를 내어 물어도 돌아오는 것은 무대 천장에 부딪혀 돌아오는 메아리다.
3.
무사 파하드는 두 번째 전쟁이 시작될 무렵 훗날 그의 아내가 되는 로레나를 데리고 북아메리카까지 밀항했다. 유라시아는 한동안 전쟁과 광기로 들썩였다. 사람이 사람을 무더기로 죽였고, 한 줄 기록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영혼이 많았다. 오스카르는 그런 시절에도 괴물을 쫓았고, 그때마다 아직 연락이 닿고 있던 파하드 부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들은 이국땅에서 녹록잖은 전쟁 난민의 삶을 살았지만, 사도 오시리스의 해사한 낯짝만을 두고 보자면 세상이 평화로운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주 선생하곤 역시 연락 안 되나?” 무사는 오스카르를 저녁 식사에 초대할 적이면 빠지지 않고 그걸 물었다. “내가 주 선생 행방을 알아야만 하나?” 오스카르 또한 매번 같은 대답을 내놓기나 했다. 그 사도는 저 먼 동부에서 났고, 지금 그녀의 조국은 냉전으로 분단되었다. 그 이후 소식을 아는 사도가 없었다. 세상에 고작 열두 명이 났는데도, 서로를 연결하기 위해 다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알 수 있는 건 부고뿐이다.
“좋아했잖아?” 무사가 짓궂게 웃으면 오스카르는 지겹다며 켁, 소릴 냈다. “내가 네놈인 줄 알아?”
“아니, 왜. 자네도 좋아하는 거, 마음에 드는 사람 하나쯤 있을 수 있지. 사격도 주 선생한테 배웠잖아, 안 그래?”
“그게 벌써 몇 년 전인지 햇수 좀 세면서 살지 그래.”
“영영 안 만나려고? 정 없기는. 제자가 몰래 만나러 가면 주 선생도 기쁘기나 할 텐데.”
“남의 기쁨 같은 건 관심 없어.” 오스카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무사의 새까만 눈동자는 자연스럽게 오스카르의 큼직한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인간들이 살아서 기쁘건 죽어서 기쁘건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듯이.”
“인간들이 종말을 원한다고 해도?”
“우리가 언제부터 인류의 행복을 기원하는 존재였다고.” 오스카르가 고개를 기울이면 그의 새하얀 머리칼이 눈가를 스쳤다. “불행하거나 울거나 괴롭거나 말거나, 사도는 틈새 수선이나 잘하면 돼. 그러라고 세상에 난 게 우리다. 목적에 충실하면 그만이지.”
0.
부연하자면, 오스카르는 그날 극장에 초대받았다. 초연이 올라온다고 했다. 도착했을 적에 이미 장내는 엉망이었고, 사도의 오판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불길이 치솟았다. 단언컨대 오스카르 라르손은 괴물이 아니라 그 괴물을 그만한 몸집으로 불린 인간을 사격해야 했다.
그가 이미 괴물의 미끼로 전락한 쉐리 크리시를 사격하지 못한 데에는 까닭이 있다. 그녀의 정신이 숙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하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실패에 관한 주마등이다.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더듬어 보자. 우리의 완벽한 사도 스쿨드는 어디서부터 오작동을 일으켰을까. 무엇이 그의 커다란 오류였나.
타는 냄새가 지독하다. 기침 한 번이면 폐부가 찢어질 것만 같다.
4.
무사가 호명했다. “오스카르,” 석양이 다 저문 저녁이다.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는 얼굴을 볼 적마다 꼭 이런 질문을 던졌다. 면접관보다도 성가셨다.
“그럼 네놈은 우리가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있나?”
“오, 잘 모르겠는데.” 또 짓궂은 낯짝. “그렇지만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설계된 기계는 아니라고 생각하긴 해. 난 아픈 게 싫고, 로레나가 슬픈 건 더 싫거든. 그러니 내 생각에 틈새 수선을 잘하는 게 능사는 아닌 것 같아.”
오스카르는 미간을 좁혔다.
“네가 그러니까 인생을 어렵게 사는 거다. 뭐, 그래, 취직할 때 자기소개하기는 편하겠군.” 그는 이때, 몇 해 전 건축사무소에서 일자리를 얻던 날을 ‘한 번 더’ 반추했다.
“칭찬 고마워.”
“칭찬 아니야. 네놈이 미쳤단 소리다.”
“아무렴 내가 미쳐봐야 자네가 가르치는 꼬마보다 더 미쳤겠어?” 사도 디오니소스, 그래, 오스카르는 이제 ‘핀리’에 관하여 들여다봐야만 한다.
“자네는 제자가 스승한테 정 주는 거 미쳤다는 식으로 떠들었지만, 지금 현생 사도 중에 자기 스승한테 제일 진심인 게 우리 핀리 꼬마일 텐데.”
“골머리 아픈 지점을 지적하지 마.” 갈라진 입술을 깨물고 마지못해 투덜거렸다. “걔는 광기의 신이라 그런가 모양이지. 빌어먹을, 내가 왜 좋다는 건지 살면서 마주친 가장 큰 불가해다.”
이것이 오스카르 라르손의 커다란 오류다. 오류는 핀리 크리시라는 이름을 했고, 최근엔 피셔라는 성을 쓰기로 했다며 철없이 웃던 어린 소년. 총애하는 인간과 이름을 나누고 동경하는 스승에게 가족애를 갈구하는 사도라기엔 너무나도 인간적인 어린애. 그건 오스카르에게 희소식이었다. 그는 핀리가 원하는 만큼의 무게를 감정에 달아줄 수 없었다. 그는 너무 어렸다. 올해로 고작 18살이었고, 그를 기른 쉐리 크리시가 믿음직한 보호자였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진 않았을 것이다.
오스카르는 가끔 아리아드네에 관하여 골몰했다. 핀리 어빈 크리시는 20세기가 선택한 디오니소스다. 그러나 오스카르 라르손은 영리한 아리아드네가 아니다. 그 어떤 인간도 그러할 터다. 사실, 우리네 삶엔 보통 아리아드네가 없다. 명쾌한 실타래 하나 없이 미궁을 헤매는 것, 불현듯 초라한 죽음을 조우하는 것, 그것이 인간과 사도가 공유하는 유일한 궤도고 삶의 진리이며 평등이다.
0.
“정말 지겨운 게 뭔 줄 알아?” 억지로 몸을 일으키면 멍이 든 것처럼 아프고 쑤신 육신의 통각보다도 정신적 피로감에 현기증이 일었다. 듣는 사람 하나 없다. 살아 있는 사람이 없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그는 널브러져 있던 총기를 들고 무대 아래 괴물을 응시했다. 형체가 잘 보이지 않았다. 출혈이 컸던 까닭이다. 기침이 몇 번 더 터져 나왔다. 호흡이 쓰다.
“뭘 해도 아무 보람이 없다는 거야.” 인간 오스카르의 첫 번째 고해다. “너 같은 걸 만나고 처치하고 다치고 낫고 틈새를 메우고 세상을 구해도 신문을 파는 가판대 앞에 서서 나이를 먹을대로 먹은 인간들이 알아서 종말을 자처하는 꼴을 보는 거지.” 탄환을 장전하며 사납게 웅얼거린다. 빌어먹을 세계대전, 망할 놈의 냉전, 수렁 같은 빈곤과 버려지는 아이들, 망령처럼 연명하는 제국주의, 만연한 불평등, 그가 세상을 수선해도 인류는 스스로의 목을 조른다. “반복하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만이 들어. 사실 말이야,”
밝히자면, 오스카르 라르손은 세상에 적지 않은 아동 시설을 건축해 올렸다. 그런 순간에 그는 적어도 슬펐다. 왜냐하면,
“사명이란 건 존재하지 않잖아.” 인간도 아닌 사도마저 죄 없는 영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미는데, “슬픔만이 존재하지.” 선량한 인간은 어떠하겠나. 망가지고 금이 가는 20세기 그 너머 21세기를 목도해야 하는 아이들은 얼마나 막막하겠나.
5.
핀리 크리시는 극장으로 오고 있을까? 오스카르 라르손은 그 애는 연극이 무너져서가 아니라 사람이 죽어서 울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의미로든 최초의 기록이 될 거다. 그 애는 보나 마나 인간이 죽어서 마음을 다치고야 마는 최초의 사도일 테니까.
그 애는 자신을 우상처럼 떠받드는 어머니가 지겹다고 했다. 자신의 절반이 신이라면, 남은 절반은 인간이지 않나. “넌 따지고 보면 신화 속에서도 반신으로 출발하니까 그런 걸지도 모르지.” 오스카르의 냉철한 분석을 듣고 나면 꼭 입을 삐죽였다. “그게 아니야, 그냥 핀리라는 인간이 절반쯤은 인간으로 난 것뿐이라고. 내 생각에 디오니소스는 아리아드네가 죽어도 지금만큼 슬프지 않았을 거야.”
“그러는 너는 뭐가 얼마나 슬프지?”
“대책 없이 울고 싶을 만큼 슬퍼.”
“어째서?”
“쉐리가 세멜레를 자처하니까.” 핀리는 웃지 않았다. “그럴수록 불행해질 거야. 난 쉐리를 별로 사랑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파멸하길 원하진 않아. 세멜레가 될 필요는 없잖아. 단지 나를 거두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신이란 걸 증명하려다가 죽을 까닭은 없어. 그건 너무 슬픈 일이야.”
그는 핀리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었다. 그가 설계한 커리큘럼은 아니었다. 집채만 한 괴물을 상대하려면 혼자보단 둘이 나았다. 기억하기로는 프라하였다. 아니, 어쩌면 부다페스트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사도가 아니었더라면 발도 들이기 어려워진 철의 장벽 너머에서 벌어진 틈새를 수선한 직후에 나누었던 시답잖은 얘기였다. “너는 무엇이 슬프지?”, 그리고 “그러는 오스카르는 무엇을 사랑해?”라는,
그때 오스카르 라르손은 멀거니 사라지는 틈새를 쳐다보다가 “아무것도.”라고 거짓말했다.
0.
오스카르 라르손이 괴물의 숙주가 되어 언어조차 통하지 않게 된 쉐리 크리시를 조준한다. 고개를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겹다. 그는 이제야 골몰한다. 그는 면접관에게 무엇을 좋아한다고 말해야 했을까? 핀리에게는 무엇을 사랑한다고 답해야 했지? 오스카르에게 사랑은 여전히 몽롱하고 모호한 개념이다.
다만, 명백하게 원하는 바는 있다. 미래. 모두가 쥐고 있는 실타래를 엉망으로 던져대고 있지만, 기적적으로 종말하지 않고 불멸토록 존속하는 인류 사회. 아이들의 안녕과 평화. 그래, 종말이 도사리는 미궁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말이다. 엉키지 않는 실. 세상에서 가장 찬란하고 멍청한 이상 사회.
세상을 왜 구하느냐고, 성가신 질문은 하지 마라. 오스카르가 방아쇠를 당긴다. 퇴거 명령이다. 그의 미래에 재앙의 자리는 없다.
꿈을 꾸니까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어린 사도를 희생제물로 삼지 않고도 존속할 수 있는 미래를 원해. 이 모든 부질없는 사회 현상, 어리석음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핀리 어빈 크리시가 오래도록 살아남기를 원한다.
그러니까, 오스카르의 결론은 이러하다. 핀리 크리시를 사랑한다는 것. 그가 드디어 불가해 하나를 정복했다는 사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누군가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이다. 타인으로 인하여 심장이 저미고 슬픔을 느끼는 일이다. 오스카르의 세계에 명백히 드러난 사랑의 형태는 그게 전부였다.
총성이 울렸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조명이 오스카르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쉐리 크리시의 몸에서 피가 솟구치고 괴물이 살도 함께 터져 그 존재가 모래처럼 부스러졌다. 불길은 휘몰아치고, 오스카르는 무대에 고스란히 널브러져 이러한 깨달음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내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도 좋았다. 엉망으로 엉켜 있던 실을 마침내 풀어냈다. 이 어찌 아니 행복한 삶이냐.
그러나 잠들기 전에 다만, 그의 가족 같은 제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집어삼킨 화마와 잿더미 앞에서 많이 울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만이 미어져서, (거대한 실패로 막을 퇴장하는 사도, 처음부터 끝까지 실패로 점철된 엉터리 플롯, 신격에 의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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