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각

[달바흐] 사도의 심장에 칼을 박아라

  모리안은 우산도 없이 흠뻑 젖어서 우리 집엘 왔다. “집에 가려는데 장대비가 내리잖아.” 그녀는 재워달라는 말을 그렇게 했다. 나는 현관에 우두커니 서서 한참 그녀를 쳐다보다가, “미쳤네.” 하곤 그 애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몇 달 전보다 손목을 붙든 손아귀에 공간이 남았다. 그 애가 그새 더 여위었다는 사실을 알 것 같았다. 그녀의 보호자인 우리 고모가 그녀를 학대하고 있는 건 아닐 터다. 녹턴은 원래 그렇다. “오늘 우리 집에 살아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는데.”, “알아. 너희 집에 유령이 들끓는 게 하루 이틀 일이니?” 백 년 넘게 그랬다. “내 눈엔 안 보이지만.”

 

  모리안이 씻고 나오면 아무 주파수에 맞추어 틀어둔 라디오에서 뉴스 따위가 흘러나왔다. 모리안은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나와선, 내 방 한구석에 쳐박혀 있던 오래된 라디오를 귀신처럼 쳐다보았다.

 

  “바오로 아저씨도 안 계셔?”

  “계시지.” 내가 침대에 널브러져서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이번엔 그녀의 금색 눈동자가 목소리를 내었던 나를 쳐다보았다.

 

  “인사 안 가도 돼. 우리 아버지 어차피 면회 금지야. 엊그제도 열이 40도까지 끓었대.”

  “그럼 또 며칠 전에 세상이 구원받았겠네.” 모리안은 내 옆에 침대 가장자리에 딱 한 뼘의 거리를 두고 앉았다. “안됐다, 킬리언, 넌 그날 세상이 멸망하길 바랐을 텐데.” 침대가 딱 그 애의 무게만큼 가라앉았다. 천장은 하얗고 말끔하다. 내가 기억하는 한 저 천장에 유아용 모빌이라거나 어두우면 빛이 나는 별 스티커 같은 건 나붙어본 일이 없다. 벽에 못 하나 박아본 일이 없었다. 나름대로 어리광이고 투정이었다. 알아주는 이는 하나 없었지만, 심지어 내가 이 방으로 며칠씩 돌아오지 않아도 이 저택의 복도를 걷는 모든 존재는 나의 부재를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모리안은 상체를 숙여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애의 빛 바란 머리칼이 어깨에 닿아 간지러웠다. 나는 그 애가 숨죽여 움직인다는 사실이 좋았다. 죽은 사람 같아서. “한 사람 대(對) 60억이야, 모리안.” 히죽 웃으면 모리안은 반대로 찡그렸다. 나는 그녀가 미간을 찡그릴 때를 좋아한다. 그럴 적이면 그녀는 표정에 색채가 스며 사람이 된다. “내가 세상 종말을 원해도 60억이 원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거지.”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앉으면 모리안은 가늘고 긴 목을 움직여 나의 움직임을 쫓았다.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인간,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모리안.

 

  “얼마 전에 말이야, 칼 들고 아버지 혼자 잠드신 방에 잠입한 거 알아?” 모리안은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다.

 

  “드디어 잠든 신에게 칼이라도 꽂을 용기가 생겼니?”

  “그럴 수 있을 줄 알았지.”

  “마난난이 사라져도 다른 신이 올걸. 루 라바다, 디안케트, 누가 될진 몰라도.”

  “아무래도 상관없어. 내 인생에서 그 작자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바랐거든. 지금도 원하고.” 장대비가 내리는 소리는 라디오 주파수에 끼어든 백색소음을 닮았다. “인간 바오로가 사라져야만 행복할 수가 있을 것 같았어. 엊그제 일이야. 자다가 시달리듯이 깨어나서 칼 들고 쳐들어간 거지. 그 사람이 아프단 소리도 지겹고 세상이 어쩌고 종말이 어쨌고, 그냥,” 웃음이 났다. 창백한 얼굴을 한 모리안이 나를 주시하고 있지 않나.

 

  나는 가끔 내가 사도 마난난의 삶에 끼어든 백색소음인지, 그 신이 나라는 인간에게 끼어든 불필요한 주파수인지를 골몰한다.

 

  “죽을 땐 좋으나 싫으나 나를 볼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지만 결국 못 죽였잖아.” 이번엔 모리안이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불쌍하게도.”

  “막상 그 사람을 침대 곁에 서서 내려다보면 숨이 막히거든.” 그녀가 웃으면 반동처럼 내가 표정을 찌푸릴 일이 생기고야 만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다가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인류의 무의식을 인지한다는 건 정말 성가신 일이야. 정말 칼 들고 찔렀으면 내가 호흡곤란으로 쓰러졌을지도 몰라. 그래서 그냥 나와버렸어. 그 순간만큼 인간 바오로가 또 지독하게 미운 순간이 없었지만.”

 

  “재미없는 이야기네.” 모리안은 흥미를 잃었는지 침대에서 일어나 드라이기가 있는 서랍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왜 재미가 없어? 내가 불행한 얘기잖아.” 그 애의 옹송그린 어깨 너머로 소리를 높여 물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애라서 좋아하잖아, 모리안.”

  “아니라고는 안 하겠지만.” 그녀는 드라이기를 꺼내 코드를 꽂았다. 낮은 의자에 앉아 머리를 말리면 비가 내리는 소음과 라디오 광고, 유령들의 웃음소리, 요란한 기계음이 뒤섞여 엉망이었고 무심코 정말 삶의 본질을 닮은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난 가끔 네가 차라리 바오로 씨 심장에 칼이라도 꽂으면 좋겠어.”

  “오, 그 말은 좋아하는 걸 넘어 사랑한다는 의미야?”

  “…얼굴은 마음에 든다고 생각해, 늘.”

  “그리고 늘 내 얼굴은 잘 보지도 않지.” 나는 소리까지 내어 웃었다.

 

  “내가 사도의 심장에 칼이라도 박으면 사랑해주는 거야? 그럼 다음엔 고민하지 않고 심장에 칼을 꽂을게.”

 

  모리안은 잿빛 머리칼을 따뜻한 바람으로 말리다가, “그게 너를 불행하게 한다면.” 언제나 그렇게 대꾸하는 여자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