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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다이스케] 불가해 주제(主題, theme)

 

1.

  마야마 다이스케는 청룡에게 이토록 사적인 부탁을 해본 적이 없다. “주말에 말이죠, 뭐어, 이쪽은 찬이 형도 있으니까 하루쯤 혼자서 수선하는 게 어렵지는 않지만.” 수화기 너머 청룡의 목소리는 떨떠름했다. 다이스케는 그 남자가 알려진 바와 달리 바보가 아니며 간혹 성가시게 의심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1년에 두 번 혹은 그 이상 만날 적마다 멍청한 낯짝으로 웃고 떠들며 분위기를 가볍게 유도하지만, 하여간 하람은 (적어도 다이스케 입장에선,) 작정하고 믿게 만들기가 어려웠다.

 

  오래된 툇마루에 석양이 진다. 오래전 할머니께서 심으셨다는 매화나무 그림자가 담벼락을 타고 늘어졌다. 온 세상에 단풍색 햇살이 여울졌다. 다이스케는 곧은 자세로 앉아 하람의 다음 말을 기다리다가 끝까지 참지 못했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똑바로 하시죠.” 휴대전화 너머, 혹은 현해탄 너머의 사도는 표정이 머릿속으로 대뜸 그려지는 말투를 구사했다. “아니, 그렇잖아요. 다이스케가 저한테 빚을 만드는 경우는 여태껏 한 번도 없었으니까.”

 

  다이스케는 잎이 무성한 매화 가지를 멀거니 쳐다보다가 혀를 찼다. “멍청하면 어설프게 머리를 굴리지 마십시오. 딱히 꾸미는 게 있진 않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다. 굳이 따지자면, “여태까지 당신 숨 돌리라고 제가 봐드린 날짜 수만 모아도 1년은 거뜬히 나올 테니 이제 빚 좀 받겠다는 의미입니다.”

 

  “말을 좀 심하게 하시네. 25년 살면서 13년 수선하고 1년 논 거면 저 진짜 열심히 일한 거거든요?”

  “당신 노는 일에 어째서 제가 희생되어야 합니까? 제가 당신 부모입니까?”

  “다이스케만 봐준 거 아니에요! 찬이 형도 좀, 아니, 뭣보다 저 군대도 다녀와야 했고,”

  “그쪽의 미련한 백호가 저보다 더 뜯어먹혔다는 사실이 제게 무슨 위로가 되진 않습니다.”

  “아아, 알았어요, 알았다니까.” 청룡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며 다이스케의 말을 잘랐다. 다이스케는 그가 호흡하는 것처럼 조그마한 목소리로 ‘나이도 어린 게 한마디도 지지 않는다’며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지만, 주말에 오사카에 왜 못 가는지는 알려줘요. 뭐 하는데요?”

 

  다이스케는 잠시 침묵했다. 스마트폰 화면 위에 새겨진 이름 몇 자를 물끄러미 쳐다만 보다가, “아마도 데이트.”라는 살면서 가장 어리석은 대답만을 내놓을 수 있었다.

 

  “거짓말, 누가 다이스케랑 데이트 같은 걸 해준다는 거예요?!” 우렁찬 성량에 짜증이 치민 얼굴로 다이스케는 스마트폰을 멀찍이 떨어트려 놓았다.

 

  “네, 뭐, 세상은 넓고 미친 사람은 많습니다.” 성가신 청룡. “그보다 왜 놀랍니까? 여태까지 당신이 데이트한다고 제 앞에서 무릎 꿇고 빈 시간을 모아도 대충 한 달은 나올 겁니다….”

 

2.

  아게하는 1층 난간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고 했다. 주치의인 마야마 소지는 환장하겠다며 각얼음을 띄운 커피만 석 잔을 들이켰고, 다이스케는 마지못해 코이즈미 아게하의 병실을 찾았다. 그녀는 환자복 차림으로 아니나 다를까 침대를 가로질러 누워 고개를 뒤집은 채 세상을 도로 거꾸로 쳐다보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1인 병동의 미닫이문을 닫으며 한숨부터 내려놓았고, 아게하는 아니나 다를까 그날도 웃었다.

 

  “소지 선생님이 보냈죠?” 그녀가 몸을 똑바로 세워 앉으면 머리칼의 반을 집어 고정한 나비 모양 집게 머리핀이 비뚤어졌다. “아니면 제가 뭐 하러 옵니까?” 다이스케가 침대 곁에 앉으면 아게하는 다시, 그는 아게하의 웃음이 번지는 포인트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대체로 웃었다. 어떤 순간에든.

 

  “하여튼, 거꾸로 좀 매달렸다고 웬 잔소리를 그렇게 하시는지.”

  “시한부 환자가 1층 난간에 거꾸로 매달린 채 발견되면 누구라도 기절할 겁니다.”

  “다이스케 군도요?”

  “아뇨, 전 기절은 안 하겠지만.” 다이스케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뒤를 돌아보라고 손짓했다. 얼굴은 한껏 성가시다는 표정을 짓고. “귀신인 줄 알고 벨 수는 있었겠군요.”

 

  아게하는 침대 위에서 순순히 돌아앉았다. 다이스케가 머리핀을 풀어 도로 똑바로 고정하면, 가느다란 어깨가 웃음소리를 내며 떨렸다. “다이스케 군한테 안 들키길 잘했네.” 가엾게도 미친 여자. 다이스케는 속으로 그렇게나 생각했다.

 

  “그래서, 왜 거꾸로 매달려 계셨습니까? 저희 작은형님께서는 과장 보태 기절하신 것 같던데요.”

  “오늘 아침에 깨달았거든요.”

  “뭘요?”

  “제가 세상을 거꾸로 본 적이 없다는 걸!”

  “세상을 거꾸로 봐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다이스케가 기가 막히다는 것처럼 물으면, 아게하는 그를 돌아보더니 아주 중대한 비밀인 것처럼 속삭였다.

 

  “그렇지만, 살면서 단한번도 세상을 거꾸로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을걸요!”

  “저도 살면서 굳이 세상을 거꾸로 본 적은 없습니다.”

  “뭐?! 그렇지만, 다이스케 군도 먼 미래엔 거꾸로 보게 될 거예요! 다들 인생에 그런 순간이 한 번은 온다니까.” 이 여자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도통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저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서 남들보다 속성으로, 아주 빠르게 많은 걸 해봐야 한다고요.” 이 말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었다.

 

  다이스케는 아게하의 조바심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두 다리로 건강하게 병원 복도를 활보하던 마야마 소지가 당장 내일 사고를 당해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도 카마이타치가 모레 혹은 글피 어느 틈새 앞에서 소리 없이 괴물에게 사지를 뜯길 수도 있지 않나. 인간은 시한부로 나서, 평생을 시한부로 살다 죽는다. 아게하는 인간의 의학이 ‘시한부’라는 단어에 가두었으나, 사실을 따지자면 아게하가 언제 죽을지도 아는 인간이 없다.

 

  “낫게 될 수도 있잖습니까?” 다이스케는 스스로가 던진 질문이 자비롭지 않다는 사실까지는 몰랐다. “어차피 미래는 모르는 거니까.”

 

  “당장 내일 죽진 않겠거니 생각하지만요.” 어쨌건, 최근 아게하는 걸을 수도 있고 거꾸로 매달릴 수도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하나하나 해치워두는 거예요. 죽지 않을 수도 있지만, 죽을 수도 있으니까. 결국 확률은 반반이고, 50 대 50이라면, 최악의 50을 대비하는 편이 차라리 현명하지 않나요.”

 

  그녀는 노래하듯이 열거했다. “그래서 거꾸로 매달려봤고,” 다이스케는 고개를 들어 아게하를 응시했다. “카마이타치랑 친구도 해봤고,”,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입니까?”, “나름대로요.” 아게하는 시간이 아깝다는 것처럼 많이도 웃었다. “소지 선생님도 놀라게 해 봤고, 으음,” 아아, 그래. 그녀는 시간이 없다고 상정하는 까닭에 매사 웃는 낯이다. 화를 내고 우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기에는 제게 주어진 시간이 턱없이 짧다.

 

  줄줄이 늘어지던 이야기는 어느덧 아게하가 이루었던 것에서 바라지만 아직 이루지 못한 목록으로 넘어갔다. 그녀는 말했다. “디즈니랜드도 아직 못 가봤네요.” 다이스케는 관심 없다는 눈으로 불이 어둑하게 꺼진 천장이나 올려다 보았다. “멀잖습니까. 저도 안 가봤어요.”

 

  “다이스케 군은 왜 이렇게 해본 게 없어요?”

  “바빠서요. 세상이 요지경이잖습니까?”

  “하여간, 전 그놈의 사도라는 시스템이 문제라고 봐요!”

  “어떤 점에서?”

  “나이도 어린 다이스케 군이 디즈니랜드에서 불꽃놀이도 못 봤다는 점에서!”

  “아게하도 못 봤잖습니까.”

  “나이도 어린 게 정말 한 마디도 안 지네!”

  “네, 자주 듣는 말입니다. 특히 어디 사는 청룡한테.” 그는 그제야 느릿느릿 웃었다.

 

  “그래서, 불꽃놀이가 보고 싶은 겁니까?”

  “디즈니 성도 보고 싶고, 불꽃놀이도 물론 보고 싶죠.”

  “좋아하는 디즈니 영화 있어요?”

  “알라딘?” 아게하의 동그란 눈이 가늘게 접혔다. “사실 뭐든 좋아해요, 노래하는 걸 좋아하니까. 디즈니 영화는 음악이 좋잖아요.”

  “잘 모릅니다.” 아, 이 말은 조금 우습다. 다이스케마저 조금 소리를 내어 웃고야 말 정도로. “살면서 한 편도 본 적 없어서요.” 그럴 틈이 모자랐다는 것이 정확한 사실일 테지만.

 

  “하여튼 너무 낭만 없이 살아요, 다이스케 군.” 그 말이 슬펐다. 적어도 아게하는.

 

3.

  다이스케는 하람에게 그 이상 해명하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 이런 일이 두 번 있지는 않을 겁니다.”라고 당부한 것이 전부다. 하람은 어딘지 떨떠름한 반응이었지만, “인간하고 너무 깊이 엮이진 말고요. 그거 보통 끝이 안 좋으니까.”라는 연장자로서 마땅한 충고를 우물거렸다.

 

  “그렇다고 제가 연애를 하겠습니까, 결혼을 하겠습니까? 데이트란 말도 반쯤 농담입니다.”

  “아니, 일단 저는 당신이 하는 농담과 진담, 그런 거 구분 못 하고요.” 말투라도 좀 가볍게 해보든지, 하람은 잊지 않고 불만을 중간에 슬쩍 끼워 넣었다. “그냥, 뭐, 바오로 선생님 같은 경우는 정말 특이 케이스란 얘기예요. 보통 사도랑 엮이면 인간이 이상해진다니까. 아니면 팔자가 꼬이거나. 당신은 더군다나 입장이 특이하니 조심하라는 말이에요.”

 

  마야마 다이스케는 바다 건너 사도가 정말이지, 제법 성가셨다. “다 아는 이야기 하지 마십시오. 제가 당신만큼 바보인 줄 압니까?” 코이즈미 아게하는 처음부터 이상했다. 종말을 감지하는 인간이란, 남들이 보지 않기로 한 것을 보겠다고 결심하고야 마는 인간 집단이란 크고 작게 보편에서 벗어나 있게 마련이다.

 

4.

  예외는 덜 지겹다. 그것이 다이스케가 아게하를 사랑한 유일한 이유다. 더불어,

 

5.

  주말, 다이스케가 4층에 있는 아게하의 창가에 쳐들어간 하나뿐인 까닭이다. 밤이 깊었다. 다이스케는 조금 길렀던 머리칼을 묶지 않았고, 아게하는 마침 주사 하나를 다 맞은 참이었다. 환자복 차림으로 고개를 거꾸로 뒤집은 채 텔레비전을 쳐다보던 그녀는 피부를 파고드는 여름 바람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가 고스란히 자빠질 뻔했다. “어떻게 그런 데서 등장하는 거예요?” 아게하가 커튼을 열어젖히며 물으면, 다이스케는 무심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바람이 저를 총애합니다. 더 큰 설명이 필요합니까?”

 

  “당연하죠! 하늘을 날 수 있다곤 안 했잖아요! 나한테 엄청 중요한 걸 숨겼네, 이 사도가 정말!”

  “정확하게는 날 줄 아는 건 아닙니다. 좀 높이 뛰어오르거나 안전히 착지할 줄 아는 거지.”

  “비슷하다고요! 그야말로 ‘매지컬’한 일이잖아요?!”

  “저 그 단어 상당히 싫어합니다.” 다이스케는 잠시 탁한 눈빛이나 하다가, 창틀에 위태롭게 앉아 아게하에게 손을 뻗었다.

 

  “불꽃놀이 보고 싶다고 하셨잖습니까? 마침 인근에서 마츠리를 한다기에.”

 

  아게하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음력으로 보름이었고, 창 너머엔 감옥처럼 답답한 흰 병원 건물과 구름이 조금 낀 밤하늘, 거대한 보름달, (아게하는 문득 그를 바라보면 언제나 어깨 너머 거대한 달이 도사린다는 사실을 그때 알아차렸다. 그렇다는 사실이 매우 소설적이며 일어나기 힘든 우연이라는 사실마저. 그녀는 ‘영리한 엑스트라’다.) 그리고 사실은 아게하의 시야로는 도저히 전부를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카마이타치가 하나.

 

  이토록 아름다운 불가해, 불길하도록 거대하게 휘몰아치는 코이즈미 아게하의 주제(主題, theme)다. 우리가 영영 정복할 수 없는 죽음, 운명 그리고 이해할 수 없이 변덕스러운 신격.

 

  “알라딘 봤어요?” 다이스케의 손을 잡고 물으면, 그는 웃었다. “글쎄요, 무슨 얘기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운명이 아게하가 다이스케를 사랑한 유일한 이유다. 주사위는 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