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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헤일/0차 과제] 사랑하는 혁명가여, 만수무강하소서.

 눈을 뜨니 저물녘이었다. 마구잡이로 펼쳐놓은 책장 위로 붉은 석양이 비쳤다. 고개를 드니 종이 낱장이 뺨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비가 그친 것 같았다. 창 너머로 먹구름 군데군데 하루의 마지막 햇살이 들었다. 미헤일 체레텔리-통칭 ‘미샤’-는 잠에서 덜 깬 눈을 하고 한참을 물기 어린 창 너머 낙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숙제하다 도서관에서 엎어져 잠이 들다니, 어른스러운 11살다운 일이 아니다.-그는 스스로가 11살치고 어른이라고 믿었다.- 뭐가 됐든 오늘 안에는 한 바닥 정도 요약해 써내고 싶었다. 프로메테우스에 관하여.

 

  근데 이거 나한테만 너무 불리한 숙제가 아닌가? 손을 뻗어 아무 책이나 앞으로 끌어왔다. 미샤는 도서검색대에서 프로메테우스라는 키워드를 넣어 검색했고, 화면에는 영문 모를 책 제목이 한가득 떠올랐다. 어린이용 그리스 로마 신화 판본 여러 권. 신화학자가 쓴 각종 견해. 혹은 프로메테우스를 인용한 소설과 시, 그 문학 작품을 비평한 것. 압사할 만한 정보의 양이다. 그는 흔들리는 눈을 감추지 못하고 한참 도서검색대를 쳐다보다가 숙제에 도움이 될 만한 책 제목만 추려냈는데, 그렇게만 해도 도서관 책상 가득 미샤가 골라온 책더미가 차지할 만큼이 되었다. 이쯤하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류는 프로메테우스를 사랑한다. 자신들을 위해 거룩한 희생을 짊어지고 있는 절벽 위의 혁명가를 경애한다. 그의 아들 미헤일이 헤아릴 길이 없을 만큼 깊이, 수 천 년에 걸쳐.

 

  인간 문명은 그에게 각종 문학적 수사를 바침으로써 불씨에 관한 은혜를 갚고 있다. 미헤일은 간신히 그 정보의 바다를 헤쳐가며 숙제로 적어낼 만한 가장 건조한 정보를 골라내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이아페토스의 아들이다. 제우스의 사촌이며, 아틀라스와 에피메테우스의 형제…. 사람들이 그를 저항의 메타포로 삼는다는 사실은 걸러내고, 다음 문장을 간신히 적었다. 예언가이며, 비록 아무것도 바꾼 건 없고 가장 중요한 예언은 끝까지 함구했지만. 절벽에 매달려 간을 쪼이고 있고…, 이 문장을 쓸 때 미헤일은 맥 빠지게 웃었다.

 

  인간을 포기했으면 되는 일이다. 그랬더라면 프로메테우스는 절벽에 매달리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이 기막힌 예술가는 영원한 평온과 예술을 택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결연히 예술이라는 탈을 쓴 영겁의 고통을 선택한다. 나의 창조물이 망가지느니 죽겠다고 선언하는 고집스런 장인, 나의 세계를 파괴한다면 최고신조차 용서하지 않겠다며 이를 가는 괴팍한 예술지상주의자, 미헤일의 아버지인 프로메테우스….

 

  왜 그렇게 살지? 미헤일은 간신히 문장에 마침표를 찍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나 고통을 싫어하지 않나? 신이라고 다를까?

 

  그렇지만, 제우스의 요구에 무릎 꿇을 자라면 애초에 만들겠다는 열망을 품지 않았겠지. 예술가의 비극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어느 시대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