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루는 높고 도시 틈새로 여름꽃은 만발했다. 리케이온이 있는 섬으로 돌아가려면 2주가 남았다. 해변엔 사람이 많고, 테라스가 있는 카페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사람 구경하기가 좋았다. 방학엔 남다 못해 헛돌기까지 하는 게 시간이다. 붓을 들었다가, 조각칼로 깎아내다가, 나도 사람일진대 그렇게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름 휴가철을 맞아 부산스러운 식당을 빠져나왔다. 충동적으로 바닷가엘 왔다. 우연히 한 자리가 남은 카페에 냅다 자리를 잡고 앉아 선데 아이스크림 하나를 시켰고, 가게가 드리운 차양 아래에서 후덥지근한 무더위를 헤치고 씩씩하게 공을 던지며 노는 사람들을 두 눈에 담았다. 날씨가 좋았다. 내 고향은 늘 그렇다.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고 누가 물으면 태양은 타오르고 바다가 있는 도시에서 왔노라고, 불길은 나를 키우고 파도가 나를 벼렸노라고,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을 만큼이나.
프로메테우스는 올해도 나를 보러 오지 않을 것이 빤했다. 언제 어디서 먹어도 아이스크림은 달고 시원한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그 작자는 전승만 미루어 보자면, 에피메테우스가 아닌 혈육에게 정을 보인 흔적이 없다. 가족을 배신하여 위로 형이라는 아틀라스를 벌 받게 했고, 아버지 이아페토스가 티탄 형제들과 함께 타르타로스에 갇히는 꼴을 쳐다만 본 작자다. 아들이라고 다를까. 관심이 있는 존재에겐 헌신적인 애정을 내리나, 그렇다고 모든 이를 품에 안는 박애주의자는 아니다. 데우칼리온에게 산에다 배를 건조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만약 대홍수에서 인류가 멸종할 운명이 아니었다면, 그는 데우칼리온에게 무엇 하나 일러주지 않았을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만에 하나 그렇게 가족에게 살가운 사람이었다면, 내 머나먼 이복형제라는 아버지 없는 삶을 살아야 할지도 모를 아들 데우칼리온을 봐서라도 제우스 앞에서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렸어야 맞았다. 그런 작자가 무언가를 예감하고 세상에 내렸다는 나의 존재는, 그 점에서 기묘해진다.
프로메테우스는 인류를 사랑하여 나를 내렸다. 그 일은 나를 사랑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그리고 그 작자가 인류를 구하기 위해 내려보낸 아들이라는 나는, 한 발 먼저 알게 된 가장 중요한 미래를 끝까지 함구할 테다. 그자는 ‘먼저 알게 된’ 사실을 인간 사회에 널리 알리고 대비하길 원해서 나를 내렸겠으나 알게 뭐란 말이냐, 나는 주어진 레일을 달리는 4량짜리 열차가 아니다. 지독하게도 인간이지.
두 눈에 담기는 풍경이 아름답다. 여름 태양은 찬란한 빛을 내리고, 사람들이 행복하게 웃는다. 바다가 하얗게 반짝거렸다. 파도 소리가 듣기 좋았다. 아이스크림은 맛이 묵직하고 좋았다. 무더웠지만 견디지 못할 만큼은 아니었다. 카페에서 잘 아는 록 음악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모래를 자박자박 밟는다. 나는 행복을 그려둔 바닷가 풍경 한 귀퉁이에 앉아 플라스틱 스푼을 물고 느릿느릿 웃었다.
테티스의 결혼으로 인한 재앙을 예감했을 적에 아버지가 느꼈을 기분 하나만큼은 알겠다. 모두가 행복한 풍경을 쳐다보다가 한 번 히죽 웃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금을 낼 수 있는 것. 그게 우리의 권능이다.
모두가 영원토록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나 혼자 알고 있다. 바다가 아름답고 태양이 찬란하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재앙을 그리거나 조각하고 싶었다.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균열이란 말이냐. 저 아득한 산맥에 매달린 프로메테우스가 나를 굽어보며 얼마나 초조하든, 나는 인류를 구하지 않을 테다. 공정하게 전부 망해버리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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