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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하람] Farewell : 오류수정불가선언문

1.

  “그래, 일이 결국 그렇게 되었구나.” 노장은 15살 이후로 노화하지 않았지만, 내 앞에서 소년의 모습을 한 일은 없다. 바닷가였다. 태평양과 이어진 내 고향.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권능을 갖춘 디오니소스는 그날 딱 도환찬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모습을 하고 앉아 있었고, 이 소식을 맨정신에 들을 수는 없겠다며 기어이 고개를 한껏 기울여 술 한 잔을 들이켰다. 초겨울엔 바닷가에 사람이 잘 오가지 않았다. 우리는 머리칼에 사각사각 모래가 배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도 않고 앉거나 누워 있었다. 겨울 하늘은 물을 탄 것처럼 흐리고, 언제나 반쯤 술에 취해 있는 노장 디오니소스는 연신 포도주도 아닌 맥주를 종이컵에 따랐다.

 

  “해츨링 군도 한 잔?” 그가 불쑥 종이컵을 내밀면 웃어줄 기력도 나지 않았다.

  “저 이제 해츨링까진 아니에요, 어르신.”

  “으응? 우리 하람이가 올해로 몇 살이지?”

  “서른셋인데요.”

  “우리 해츨링은 또 언제 서른을 넘었지? 내가 좀 더 나이 든 모습을 하는 게 나았을까?”

  “아뇨, 딱 좋은데요. 또래가 대화하기 편하긴 해요. 이미 한 여든쯤 되신 거 머리로는 알아도 전 바보라서 겉모습에도 잘 휘둘리니까.” 마지못해 몸을 일으켜 앉아 잔을 받으면, 디오니소스는 히죽 속 모르게 웃더니 손을 뻗어 내 머리칼에 붙은 모래를 털어주었다. “그보다 해츨링이라고 생각하시면 저한테 술을 권하시면 안 되는 거 아니냐구요, 벌써 취하셨어요? 속상하신 건 이해하지만.”

 

  안주도 없이 맥주 한 잔을 기울이면, 디오니소스 혹은 인간 핀리 어빈 피셔가 웃었다. “바오로가 떠나니 우리 하람이가 바오로 같은 소릴 다 하는구나.” 바오로는 아일랜드에 현현한 바다의 신이다. 나를 가르친 선생님이었고, 이 체구가 가녀린 디오니소스의 오랜 친구였던 더블린의 명탐정. 비가시적 미스터리를 해결하던 바다 건너 어느 탐정 사무소의 주인. 나는 피셔 어르신이 왜 그를 하필 바오로라고 부르는지는 잘 모른다. 스무 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 그들이, 만나기만 하면 의견이 번번이 맞지 않아 고성이 오가기도 할 만큼 기질조차 맞지 않았던 그들이 또 어쩌다가 그다지도 애틋하게 친구 사이로 지냈는지 사연도 알 수 없다.

 

  “그 선생님 제자니까 별수 있나요, 닮았나 보지.”

  “바오로가 들으면 기절할 말이네. 걔는 네 얘기할 적마다 애가 누굴 닮았는지 천방지축이라 말을 안 듣는다고 했는데. 다음에 전투에서 마주치면 꼭 전달하마. 그 말 들었을 때의 바오로 낯짝은 좀 궁금하기도 하고.”

  “아, 젠장. 선생님 마주치면 제발 저 불러요. 제가 도환찬 그 새끼랑 한판 붙어봤는데, 형제끼리 권능까지 휘둘러가며 싸우는 거 너무 기분 별로더라.” 금방 비워버린 종이컵을 물고 있다가 피셔 어르신의 잔을 채워주면, 주도에 어긋나더라도 주신은 나의 버릇없음을 눈감아 주었다. “그랬니? 그럼, 그땐 너 대신 내가 갈 것을 그랬구나.” 파도 소리, 해변 너머 도로 위를 길게 지나가는 트럭 바퀴 소리 따위가 침묵과 엉킨다.

 

  “더블린 탐정 사무소, 이제 못 찾겠죠?”

  “으응, 바오로가 아주 감쪽같이 숨겨버린 것 같아.”

  “다른 네 명은요? 도환찬은 어차피 연락돼도 말 통할 새끼 아니니까 빼고.”

  “한 명도.” 해 저무는 바다를 바라보던 주신은 웃는 낯이지만, “참 섭섭한 일이지. 속상한 일이고.” 마음이 복잡하다는 사실을 알 것 같았다. 신기한 경험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피셔 어르신이 무슨 생각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만 생각했는데. 항상 속셈을 꾸미는 것처럼 웃고, 나사 빠진 것처럼 굴어도 70년 넘게 전투에서 생존한 사도의 정서가 상하지 않았을 리 없다고 짐작했다. 그는 나보다 완벽한 신이고, 어쩌면 이제는 자기가 인간으로 자랐다는 사실마저 조금씩 잊는 중일지도 모른다고 덮어놓고 믿었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울고 있을 수야 없잖아요. 탈주한 놈들 몫까지 하려면 앞으로는 잠을 더 줄여야 할 판국에, 우리도 머리란 걸 좀 써야지. 이대로 세상이 종말 하게 둘 수도 없으니까.”

  “바오로를 신으로 만든다는 계획인 것 같지? 바벨은.”

  “도환찬 말로는 그렇다고 하던데요. 누구 하나 신이 되어야 끝날 게 아니냐고. 아니, 시발, 그렇다고 틈새 수선을 놓으면 어쩌냐고요.”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씹는 정도는 아프단 생각도 들지 않았다. “우리가 이러는 동안에도 어디서인가 사람이 죽고 있는데, 지금 죽을 사람 살 사람 골라서 선별하자는 거야? 제정신이야?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염병할 새끼들이 진짜.”

  “하람아.” 그가 호명하면, 뜨겁게 올라갔던 숨을 내려놓았다. 웃음기 하나 없는 시선으로 쳐다볼 적에도, 디오니소스는, 그러니까,

  “슬프진 않니?” 웃고 있었는데. “청룡으로서 네가 화가 날 만한 일이 벌어진 것도 맞고 이해할 만한 분노지만, 으응, 그렇지, 너의 절반은 지배적인 신격이고 통제에서 벗어난 상황을 기뻐할 신이 아니니까. 드래곤이 좀 그런 존재지만.”

 

  나는 그때 내 곁에 앉아 벌써 수십 잔의 술을 비워낸 주신(酒神)이 몇이나 되는 사도를 잃었을지 가늠했다.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정말이지, 수도 없었을 거야.

 

  “형이라고 믿었던 환찬이가 널 배신했는데, 이런 순간까지 천재 사도거나 모범생 사도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냥 인간인 네가 슬픈지 아닌지 그걸 알고 싶어. 오늘은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너와 나는 앞으로도 인류를 위해 사람 아닌 것으로 살아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각오로 남았는데.”

 

2. 

  “오늘 이후로 다신 보지 말자, 세상이 멸망하는 그 날까지.” 서방 백호가 그렇게 선언하자 우리 사이에 앙금처럼 남았던 과거와 있다고 믿었던 관계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고작 두 달 전의 일이다. 가을과 겨울이 얼굴을 마주하던, 서울 인근에 붙은 작은 도시의 옥탑방 앞에서 있던 일이다. 나는 그 말에 한마디 대답을 못 했다. 울면서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돌이킬 수가 있었을까, 나는 이제 유리잔을 깨면 감쪽같이 시간을 돌릴 수가 있고 금이 간 접시를 붙일 수도 있게 되었는데 보이지 않는 인간관계는 애써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실이 더없이 서러웠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했고, 12명 모두 제각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랑했지만, 인류는 우리에게 사랑을 보상하지 않았다. 그것이 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그러니 울면서도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었을까, 무슨 변명과 거짓말을 해서 매달릴 수가 있었을까.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당신은 틈새를 수선하다가 인간 부모를 잃었고, 앞으로 더 많이 잃을 테지만 그래도 나를 배신하지는 말라고, 염치가 있으면 해서는 안 될 말투성이로 이루어진 해명을 나는 도저히 꺼낼 수가 없었다.

 

  도환찬이 바벨에 합류했다. 아니길 바랐지만 그날부로 그것은 한층 더 명백한 사실로 변했고, 의형제였던 나와 그는 형제로 살았던 십수 년이 무색하게 단 한 마디 휘둘러 남이 되었다. 나는 그 말을 핀리 어빈 피셔,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오래된 옛날에 현현하여 21세기가 되도록 생존한 바쿠스, 혹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로 부를 수 있을 노장에게 보고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이건 청룡과 백호가 타자로 유리된 이후의 기억이다.

 

3.

  “나는 아무래도 너무, 너무 오래 살아서 인간적인 면이 많이 망가졌다는 데도,” 그는 모래사장 위에 잔을 내려두었다. 점차 작아지는 등과 어깨가 보였다. 허리까지 닿도록 기른 갈색 머리칼 아래, 조그마한 두 손에 반쯤 얼굴을 묻는 인간 핀리 피셔.

 

  “바오로가 떠난 일이 죽을 만큼 슬퍼서 오늘만큼은 울고 싶은데,”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쳐 지금까지 대책 없이 살아 남아버린 신격 혹은 인격, 그리고, 나와 같이 형제처럼 사랑한 사도와 이제는 생사를 걸고 대적해야 하는 사람. 이별에는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 때가 되면 새로 사람이 들고, 또 때 되면 빠지는 게 사람이라지만, 그 누구도 지구가 자전하고 달이 공전하고 그리하여 작용하는 밀물과 썰물 거대한 섭리에 대고 지겹다고, 그만하자고, 울고 떼를 쓸 권리가 있는 건 아니겠지만,

 

  “…세상을 구하는 건 내일 생각할까요.” 그래도 지구는 돌지만, 나와 그의 인간성이 도저히 작별이라는 섭리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파도 소리가 거슬렸다. 세상이 지겨워 울었다. 인간성이 지겹고 신성이 버거웠다. 떠난 이들을 책망하고 인류를 저주했고, 새벽 늦도록 마시고 떠들었다. 그러다가도 잠들 무렵엔 나를 배신한 인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가득,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앞으로도 영원히,

 

4.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아무래도 짝사랑이 체질인 거 같아서요.” 기관실 너머 차장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동승객 중 누군가가 듣고 있었다면, 또 지겹다는 얼굴을 했을까? 넌 정말 답도 없고 구제할 길이 없다고 말한다면, 사실이니 부정할 수도 없다. “열차에서 아무리 골몰해봐도 그래요. 물론 내 가치가 종말 상황에서나 발생한다는 것도 제법 내겐 중요하지만, 그걸 차치하더라도요. 그런 국지적이고 사적인 자아 정체성 문제는 미뤄두더라도,”

 

  이렇게 고해하면서도 스스로가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느끼지만.

 

  “제가 그 땅의 인간들을 사랑해요. 인간이든 사도든 다 떠나서, 그냥 너무 좋아요. 그 사람들을 위해 뭐든 다 해주고 싶고 얼마든지 미쳐도 좋을 만큼. 그러니 그냥 그 자리 그대로, 그 무대로 돌아갈게요. 전 아무래도 사랑하다 죽을 팔자 같으니까, 그렇게 살다 죽어야겠어요. 그게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은 하람이거든요. 저는 역시, 그냥, 그런 하람이에요. 모두가 너무 좋은 하람이. 인간으로서도 신으로서도.“

 

  사랑에 이유가 어디 있겠나. (그렇기에 인류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멍에로 골라 사도에게 묶었다.) 나는 합리로 움직이지 않는다. 설명할 수가 없다. 해명할 수도 없다. 사람이라는 게 그렇다. 슬픈 만큼 당신들사랑해, (저주 같은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