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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성 리뉴얼/누아다] Dianchcht?

  1984년 봄, 새벽까지 내리던 비가 그쳐 아침 햇살이 맑았다. 4월이었다. 추위는 물러가고 눈이 녹았다. 거리마다 가로수가 푸르고 봄꽃이 피었다. 탐정 사무소를 쉬는 날이었다. 누아다 녹턴은 휴일이면 오전에 일어나는 일이 드물었는데, 오늘은 손님이 오기로 한 탓에 오전 10시에는 일어나 간단한 채비를 해야 했다. 어느덧 허리 가깝게 길러둔 머리칼을 가느다란 리본으로 느슨히 묶어내고, 차림새는 가볍게 했다. 품이 낙낙히 남는 린넨 셔츠 정도면 저택 어디서든 춥진 않을 계절이었다. 차를 준비하고, 노곤하게 밀려드는 잠을 깨우려 라디오 방송을 틀어두었더니 방송에선 누아다가 알고 있는 밴드의 곡이 흘러나왔다. 참, 별난 우연이로구나. 이 머글 밴드의 노래를, 오늘 녹턴 저택을 방문하겠다던 이가 어릴 적에 골라준 일이 있었는데.

 

  니콜라스 블랙우드는 누아다가 짐작했던 시간에 녹턴 저택을 방문했다. 니콜라스가 미리 통보했던 더블린 도착 예정 시간에서 약 30분가량 지났을 적이었다. 학창 시절에도 어디서나 소란을 몰고 다녔던 그는 여전히 시원시원하고 숨기는 것 없이 솔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더블린에 발을 들이자마자 샛길로 새지 않고 곧장 더블린 저택으로 직행해 온 모양새였다.

 

  “오, 뭐야. 니키잖아. 안녕, 오랜만이구나.” 누아다가 응접실에서 차를 우려내고 있노라면, 가까운 복도에서 소란스런 대화가 들렸다. 누아다는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과 가장 가까운 복도에 아버지의 초상화를 걸었다. 비록 초상화라는 것이 진짜 고인이 아닌 무의미한 데이터베이스에 불과할지라도, 사람을 좋아했던 부친께서는 많은 이들이 오가는 그 자릴 가장 좋아하시리라 여겼던 까닭이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니콜라스의 목소리였다.

 

  “그새 키가 더 컸니? 놀라워라.”

  “덕분에 아저씨랑 눈높이가 비슷해서 좋은데요.”

  “내가 액자 바깥에 살아 있었더라면 네가 훨씬 컸겠는데. 액자를 좀 높이 걸었으니까 말이야.”

  “하하, 그래도 아저씨나 아메도 작은 편은 아니죠.” 니콜라스는 응접실 앞에서 멈추었던 걸음을 성큼 내디뎠다. “이따 아메랑 대화 끝나고 더 떠들러 올게요. 엘 소식도 잔뜩 들고 왔거든요. 아마 들으시면 기쁘실 거예요.”

 

  저택의 오래된 응접실엔 유리창이 높게 났다. 열어둔 창틈으로 진한 라일락 향이 들었고, 라디오에선 오래된 밴드 음악이 흘렀다. “아메, 웬일로 라디오 방송을 틀어놨네.”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나누고, 소파에 앉을 적에 니콜라스가 눈을 크게 깜빡이며 짚자 누아다 녹턴은 별일은 아니라는 듯이 나른한 목소리로 답했다. “잠이 안 깨서.” 음악이라도 틀어놓으면 잠이 깨지 않을까 생각했다는 상투적인 대답이었다.

 

  “어제 못 잤어?”

  “원래 쉬는 날엔 오전에 안 일어나. 아침엔 좀 자고 싶거든.”

  “오…. 의외네, 쉬는 날에도 새벽 5시엔 일어날 것 같았는데. 오전 수업에 지각한 적 없었잖아.”

  “학창 시절에 지각 결석을 면하려고 무던히 애를 쓰긴 했지.” 누아다는 짧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오늘도 애 좀 썼고. 레프, 너라면 더블린에 도착하자마자 여기로 달려올 것 같았거든.”

 

  음악이 끝나면 라디오에선 평화로운 대화가 흘러나왔다. 차를 마시고, 짧은 근황을 나누면서도 기이한 괴리감이 부유했다. 니콜라스 블랙우드는 영국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를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내려놓는데, 머글 라디오 방송의 DJ는 여상한 목소리로 평화로운 사연을 읽어내는 것이다. 누아다는 성물을 둘러싸고 격렬해지는 전운에 관한 소식을 들었고, 한편으로는 그런데도 아일랜드의 봄은 평화롭고 라일락은 피었다는 사실이 기묘하다 느꼈다. 결국, 가까운 듯 멀었다. 아일랜드 마법사 사회는 영국의 내전을 주시했지만, 영국 마법사 사회의 내전이 결국 아일랜드가 직면한 일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뭐, 아무튼 영국 근황은 그쯤하고.” 니콜라스는 빈 찻잔을 내려두며 고개를 한 번 저었다. “그보단 너한테 전해줘야 할 말이 있어서 왔어. 보나 마나 엘이 너한테 편지했을 것 같진 않아서…. 아저씨께도 소식 전해드리고, 겸사겸사.”

 

  누아다는 조금 식은 찻물로 마른 입천장을 적셔내며 니콜라스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아까 복도에서도 그 소리 했지. 왜, 너희 위원회 일 하다가 그 애가 다치기라도 했나?” 옷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니콜라스는 소리 내어 웃었다. “무심한 척하기는, 얼른 화해 좀 해. 너희 형제 사이에서 너희 화해시키려고 애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서 그래.”

 

  오, 여기 있다. 니콜라스는 주머니에서 빳빳한 종이봉투를 하나 꺼내 누아다에게 내밀었다. 보랏빛 눈동자는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니콜라스의 손이 붙들고 있는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클로에 레브로를 통해 엘라하 녹턴이 기어이 리즈번의 머글 여자와 결혼식을 올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나 남은 가족에겐 청첩장이 가지 않았고 클로에를 비롯하여 동생과 암암리에 연락을 주고받았던 이들에게 청첩장이 갔다고 들었다. 후에 엘라하는 그에게 결혼 사실을 통보했고, 그걸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대가 머글 여자라서 자신이 끝까지 결혼 반대를 할 거라고 짐작했던 것일까? 왜 대화조차 시도하지 않고 일을 이런 식으로 만들었지? 설명하면 이해했을 수도 있는데,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고 혼자 미리 결론 내리고 도망쳐버린 이유가 뭐야.

 

  도무지 괘씸하고, 이마저 형이랍시고 숙이고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누아다는 엘라하를 몰랐다. 그러나 분명히, 엘라하 또한 누아다를 몰랐다.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누군들 누아다 녹턴이 누구인지 관심이 있겠느냐마는.

 

  “편지할 게 있으면 탐정 사무소든 저택이든 부엉이를 보내면 그만일걸, 널 부려 먹었나? 어지간히 더블린 저택하고 연루되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 참 여전하군.” 봉투로부터 시선을 노골적으로 거두며, 누아다 녹턴은 말했다. “할말 있으면 직접 오라고 전해. 생판 타인을 대해도 보통 그 정도 예의는…”.

 

  “어? 엘은 당분간 병원에서 못 움직일걸.” 니콜라스는 얼른 받아 가라며 봉투를 몇 번 까딱까딱 흔들거리다 누아다의 손에 직접 봉투를 쥐여주기에 이르렀다.

 

  “…병원? 안 다쳤다면서.”

  “아무래도 아내가 병원에 있으면 남편이 움직이긴 어렵지.”

  “…잠깐, 레프. 이야기의 궤가 안 잡힌다만.”

  “얼른 봉투 열어봐. 직접 보면 너도 분명 마음이 사르르 녹을 거다. 장담해.”

 

  얼굴 만면에 수상하기 짝이 없는 함박웃음을 가득 그린 니콜라스를 누아다는 한참이나 떨떠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그 머글 여자가 죽기라도 했나? 남들이 뭐라고 떠들든, 또 언론과 소문이 자신을 어떻게 조명하든 마음에 안 드는 머글 여자가 죽었다고 마음이 녹을 만큼 되먹지 못한 순수혈통 우월주의자는 아니라고 하는데도….

 

  마지못해 종이봉투를 열면, 사진이 몇 장 봉투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봄 햇살 아래 사진을 꺼내 비추어보았다. 갓난아이의 사진이다. 얼마 안 지난 날짜가 적혀 있고, 익숙한 필체가 적어낸 이름이 있다. Adus Diancecht Spencer, 그러니까, 분명 엘라하와 결혼한 여자의 이름이 스펜서였을 것인데….

 

  “참고로 대부의 자리는 내가 먼저 차지했다.” 니콜라스 블랙우드의 농담 섞인 말을 듣고서야, 제대로 사고가 돌아왔다. “돌아버리겠군. 늘 생각하는데, 걘 대체 왜 이런 중요한 소식을 매번 나한테 똑바로 전하질 않는 거야?”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 정돈 직접 편지로 전해도 되잖아. 이러니 사람 환장하겠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