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주 오랜만에 원고지를 펼쳐 펜을 들었습니다. 어쩌면 원고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얀 8절 도화지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전지, 또 어쩌면 타자기, 반들반들 빛이 흐르는 액정 화면, 어떤 문명이 도래해도 관용적으로 우리는 펜을 들었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관용적 어구로 그래요, 펜을 들었단 이야기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쓰려고 했느냐면, 글쎄요? 주어진 백일장 주제가 무의미하여 이것저것 의식이 닿는 대로 적어보고자 합니다. 훌륭한 젤리를 만든 아후에게 박수를. 지면이지만 기꺼이 소리를 첨부합니다. ̄그리하여 허공에서 쏟아지는 박수갈채. 노골적으로 녹음한 것. 방송에서 사용하는 효과음 따위의. ̄
나는 당신의 초대에 언제나 스스로 응했습니다. 모두가 그러하지 않았을는지, 아무도 내게 초대장에 응하라 강요하지 않았고 그저 거기에 도사리는 이유라고는 그대도 알고 나도 아는 무료함, 그리고 쓸쓸함입니다. 관객이 없으면 무대는 존속하지 않습니다. 객관적 이치입니다. 관측하지 않으면 고양이는 존재하지 않는 법. 우리는 사랑하는 고양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때로 초대장을 나누고 널리 사람을 불러 모아 염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가장 뛰어난 피조물이고, 또 가장 창피한 졸작이죠. 어느 한구석 신을 닮았고, 또 8할에 가깝도록 신의 이상을 담았습니다. 지성을 가진 모든 생명체는 엇비슷합니다. 수많은 생명을 카테고리로 묶어 분류하면 우주는 비좁아지기만 합니다. 그래요, 신은 많은데 피조물은 적습니다! 그로 인해 모든 신은 도탄에 빠지고 번민하며 초대에 응하는 것입니다. 무대에 오롯이 혼자 있는 햄릿은 비존재(非存在)이니까. 연극 무대에 선 위대한 신께서 부르짖기를,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To be or not to be)! 그것이 (우리에게 떨어진 유일한) 질문이로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에만 존재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존재하기 위하여 여기에 모였습니다. 제드 폴 그레이엄의 비극은 상연되지 않았습니다. 낙원이 문을 닫고 돌아오면, 그의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모형 낙원에 도착한 순간 그 모든 비극을 겪었습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법. 희곡은 무대가 있고 배우가 있고 관객이 있어야 있던 일이 되는 법. 무대는 있었고, 배우는 섰으니 당신들이 비극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퍼즐이었습니다. 그대들이 무대에 앉은 희극적 곰 인형을 바라보는 순간, 모든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대들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 또한 내가 여기서 그대들을 바라봄으로써 이룩했습니다.
상자 속 고양이는 뚜껑을 열어야 존재합니다. 카오스는 비극을 완성하러 초대장을 따라서 왔고, 이야기는 그대들의 시선 끝에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하니 사랑하는 그대여, 만수무강하시기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그대들, 나의 신들께 비루한 찬사를 적기 위해 나는 펜을 들었습니다. 어쩌면 원고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얀 8절 도화지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전지, 또 어쩌면 타자기, 반들반들 빛이 흐르는 액정 화면, 어떤 문명이 도래해도 관용적으로 우리는 펜을 들었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관용적 어구로 그래요, 펜을 들었단 이야기입니다….
빛이 있으라, 그리하여 빛은 있었습니다. 그것이 창조신의 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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