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성탄절이 아니었다. 텔레비전에 출연한 기상 캐스터는 기록적인 폭염을 예고했고, 일기예보가 끝나면 수요일 아침부터 시작한 교통체증에 관한 지루한 소식이 흘러나왔다. 아일라 헤이스팅스는 구운 식빵에 땅콩버터를 바르며 조그마한 앞마당에 심은 붓꽃이 여름 햇살에 말라 죽게 생겼다며 걱정했고, 제임스는 제 앞으로 도착한 편지를 읽으며 하품했다. “다른 도시에는 비가 온다는데요. 제 친구가 편지에 그렇게 적었어요.” 아일라는 잼을 잘 바른 식빵을 어린 제임스에게 건네며 말했다. “넌 여름마다 온갖 도시에서 편지가 오는구나, 제이미.” 이제 노부부는 그에게 양피지로 된 편지가 오는 일에 익숙해졌고, 부엉이에 놀라지 않게 되었다.
평온한 8월 1일이 될 예정이었다. 달리아 윈프리드는 간밤에 집에 들어오지 않았으나 그런 건 제임스에게 일상이었고, 보나 마나 오늘 저녁쯤이면 저번 주 주급을 잃어버렸다며 얼토당토않은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집에 들어올 거였다. 모아둔 돈은 좀 없느냐고 묻겠고, 그런 돈을 제임스가 어디서 났는지는 일언반구 묻지 않겠지. 그는 일부러 건넛집 노부부의 집에서 아침을 먹고 저녁까지 있기로 마음먹었다. 집에 자신이 없다는 걸 알면 차가 오는지 오지 않는지 그런 건 살피지도 않고 차도를 건너 이 집 문을 두드리러 오겠지만, 단 30분 아니 10분이라도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않는 시간을 좀 더 벌고 싶었다. 얼굴 봐야 언성을 높이거나 쳐다도 보지 않고 돈만 오가거나, 그게 전부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래, 달리아 윈프리드가 투전판에 기웃거리기 시작한 이래 그들의 관계는 이미 남보다 더 못한 사이로 끝장났다고 말할 수 있겠다.
늘 그렇듯이 비참하고 아무렇지도 않도록 남루한 8월 1일이 특별해진 것은, 다름 아닌 아침 식사를 해치우고 아일라 할머니를 도와 식탁을 치우던 오전 10시 30분 뜻밖의 손님이 노부부의 작은 집 문을 두드렸던 까닭이다. 허버트 할아버지는 마을 주민센터에서 무료로 가르쳐주는 체스 교실에 나간 참이었고, 아일라 할머니는 설거지에 매진하고 있었으므로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하러 갈 수 있는 사람은 제임스 윈프리드, 놀랍게도 이 가문과 피 한 방울 통한 적 없는 이웃집 그 아이 하나였다. 그는 식탁 위에 어지럽혀 두었던 편지를 대충 모아 치우며 손님이 오기로 했느냐고 물었지만, 아일라 할머니의 귓가에 닿진 않은 것 같았다. 물소리가 거셌던 탓이다.
터무니없는 방문 판매라면 험악한 말을 쏟아 돌려보내자, 제임스는 그렇게만 생각하며 현관을 열었다. 그 남자는 거기에 서 있었다. 찌는 것 같은 태양 빛을 등지고 현관문을 한가득 채워내면서. 보랏빛 머리칼 아래로 알이 작고 동그란 색안경을 걸쳤다. 제임스는 한참 할말을 잃고 낯선 남자의 분홍색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누구세요?” 그 말밖엔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런 동네에 불쑥 등장하기에 남자는 너무 눈에 띄는 생김새를 했다. 염색인지 뭔지 모를 이상한 머리칼부터, 계절에도 사회상에도 맞지 않는 시꺼먼 로브를 입은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 남자 또한 제임스를 불쾌한 시선으로 마주 쳐다보고 있었다. 미간 사이를 좁히고 눈살을 찌푸리고는, 제임스도 알 것 같았다. 그 남자 또한 왜 이곳에 낯선 청소년이 우두커니 서 있는지 몰라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엄마.” 그 남자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제임스의 어깨너머로 정말 놀랍기 짝이 없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안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멎었고, 어느덧 아일라 헤이스팅스는 앞치마에 물 묻은 손을 닦아내며 잰걸음으로 현관으로 내달려오고 있었다.
“어머나, 니키! 온다면 온다고 전화 좀 하지, 엄마 깜짝 놀라게….”
“설리번이 가게를 확장한다면서 갑자기 여름 내내 휴가나 다녀오라잖아. 자기도 한 2주 아일랜드에 놀러 갈 거라나. 더블린에서 멀린이 쓰던 물건이 발견됐다는데 진짜인지는 모르겠어. 아무튼, 그래서 왔어. 엄마랑 아빠도 보고 싶었으니까 잘됐지.”
“그 양반은 여전하구나. 세상에 멀린이 어디 있다니?”
“괴짜라서 전설 같은 거 쫓아다닌다고 했잖아. 뭐, 스토리 있는 물건은 거짓말이건 뭐건 살 사람은 사니까.” 남자는 무심히 말했다.
아일라 헤이스팅스는 그의 이름을 니키라고 했고, 니키라 불린 이 남자는 그녀를 어머니라 호칭했다. 제임스는 그 순간 숨이 턱 막히게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그러니까, 그들은 모자(母子) 간인 것이다. 남자의 이름은 ‘니키 헤이스팅스’일 게 뻔했다. 장성한 아들은 독립했고, 성탄절이나 부활절 같은 날에만 집에 왔던 거겠지. 그리고 제임스만 몰랐을 것이다. 군식구일망정 가족은 아니니까.
그해 8월 1일이 정녕 평범한 날이 될 예정이었다면, 제임스는 그 길로 헤이스팅스 집안을 나섰을 것이다. “안녕히 계세요.” 그렇게 말했겠지. 그러고선 공립 도서관엘 가서 에어컨이나 쐬고, 해 저물도록 시간을 허비했을 것이다. 가족끼리 눈물 어린 재회를 하는 자리에 제임스처럼 혈연 아닌 불청객이 앉아 있을 필요는 없을 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관문에 반쯤 몸을 숨기고 서서 남자를 한참 쳐다보았는데, 그가 멀린을 입에 올렸던 까닭이다.
“…근데 얜 또 누구야?”
“제이미란다. 저 건넛집 윈프리드 부인 댁 아이야. 어머, 너희 처음 만나던가?”
아일라 할머니는 동그란 얼굴 가득 반가운 기색을 하고선 날 더운데 어서 들어오라며 아들의 팔을 잡아당겼고, 대충 서른 조금 안 되어 보이는 니키라는 남자는 익숙하다는 듯이 현관을 넘어오면서 제임스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와이엇 형네 아이라고? 뭐야, 걘 이만한 꼬마였잖아. 분명 내가 학교에 다닐 땐 그랬는데.” 남자는 색안경을 벗어 내리며 제 허리춤보다 한참 낮은 허공을 짚었다. 그는 심지어, 제임스의 아버지 그리고 아주 어린 시절의 제임스를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얘는, 그게 언제적 얘기니? 너 학교 다닐 적이면 엄마도 까마득하다, 얘. 제이미는 벌써 학교엘 다녀.”
“초등학교? 그런 것치곤 애가 좀 큰데. 키는 이제 엄마보다 크네. 170cm 넘었나? 우리 엄마도 작은 키는 아닌데.”
제임스는 한참 입을 열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결국 퉁명스러운 투로 내뱉었다.
“상급 학교 다니는데.”
“오, 그래? 벌써 중학생이 다 됐구나. 내가 너한테 사탕 사줬는데 그건 기억하니?”
“…몰라. 기억 안 나. 내가 몇 살이었는데?”
“몇 살이었지? 3살?”
“그걸 어떻게 기억해? 바보야?”
“엄마, 얘 말버릇이 왜 이래? 저 건넛집 형은 되게 재밌고 살가운 형이었는데 애가 그 형 안 닮은 거 같아.”
“이 아저씨가 뭐라는 거야? 내 나이가 몇인데 3살 적을 기억하겠느냐고, 내 말은.”
“너 몇 살인데? 13살은 됐니?”
제임스는 현관의 문을 닫아 걸었다.
“올해 가을에 개학하면 4학년이야. 호그와트.”
발목까지 내려오는 새까만 로브를 벗어 걸어두던 니키 헤이스팅스는 커다랗게 변한 눈으로 그럼에도 분명히 날카롭게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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