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갈하고 또박또박 적은 글씨. 양피지의 상단에 자리 잡은 도드라지게 큼직한 글씨.) 아일라 할머니께서 읽어주세요. 허버트 할아버지 말고요. 할아버지, 이미 편지 뜯으셨어요? 아이고. 어차피 글씨가 잘 안 보이시잖아요. 얼른 할머니께 가서 읽어달라고 그러세요. 이젠 건넛집에 내가 없으니까 편지 읽어줄 꼬마가 없어서 걱정입니다. 아무튼, 양피지를 아껴야 하니까 다음 줄부터는 글씨를 작게 쓸게요. 할머니한테 읽어달라고 하세요! (밑줄) 코 박고 편지 읽거나 그러시면서 무리하시진 마시고요! 아! 양피지에 놀라지 마세요. 이 기숙학교에선 아직 양피지를 쓴다고 그러네요. 무지 낡은 학교라 그렇다나 봐요. 전통이 어쩌고 그런 거예요. 아마도.
안녕하세요, 할머니, 할아버지. 제이미예요. 편지를 전하는 부엉이가 부디 대낮에 런던 시내를 활보하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이 학교는 엄청 산에 있어서 우체국이 없거든요. 아직도 부엉이 따위로 편지를 전한다지 뭐예요. 여기까지 적고 보니 제가 무슨 사이비 종교 집단이라도 들어간 것 같네, 젠장. 아무튼 걱정하지 마세요. 학교는 괜찮은 곳입니다. 밥도 잘 나오고 기숙사도 깔끔해요. 웃기는 애들도 많고요. 런던 학교보다는 다닐 만합니다.
저는 빨간색 기숙사에 배정받았어요. 그거 아셨어요? 사립 기숙학교는 기숙사가 네 개씩이나 된다는 거요. 다른 기숙사랑 점수를 가지고 대결도 하고 그런다는데 아직은 뭐가 뭔진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창이 나 있는 기숙사라 마음에 들었어요. 기숙사 중엔 곰팡이가 피는 지하에 있는 곳도 있다더라고요. 거기에 당첨되면 어떡하나 조마조마했다니까요. 빛이 안 들면 늦잠 잘 게 뻔하기도 하고, 뭐, 아무튼요.
아니, 왜 이렇게 사설이 길어졌담. 아무튼! 아무튼 말이에요, 드리려고 했던 말은 다른 게 아니라 크리스마스 말이에요. 아무래도 명절이니까 그 주간엔 학교를 쉰다는 것 같은데, 원한다면 학교에 남게 해주겠다더라고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만나고 싶지만 우린 만나도 나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저는 학교에 남기로 마음 먹었어요. 부디 얼마 안 되는 기초 연금으로는 두 분이서 맛있는 케이크를 사 드세요. 칠면조도 괜찮고요. 전 학교에서 잘 먹고 잘 지내다가 여름에 돌아갈게요.
그밖에는…엄마한테 제 안부를 전해드릴 필요는 없고요, 가끔 우리 집을 들여다봐 주세요. 엄마는 됐고요, 옷장을 좀 잘 살펴봐 주셨으면 해서요. 사실 거기에 저금통이랑 아빠 유품을 정리해서 숨겨 놨거든요. 척 보면 안 보이는데 옷장 밑판을 들면 있어요. (소년은 이 대목을 쓸 적에 빌린 깃펜을 양피지에 오래 대고 있었다. 잉크가 번진 점. 옷장 밑판을 뜯어서 만든 비밀 공간에는 푼돈을 모은 플라스틱 저금통. 그리고 연극배우였던 아버지가 남긴 희곡, 지나간 연극 티켓, 포스터, 사진 몇 장. 옷장 밑판 공간에 다 들어가지 않아 옷장 뒤에 숨겨 놓은 연극 소품으로 사용한 레이피어.) 요즘은 그놈의 투전판에 얼마나 나가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엄마는 판돈이 부족하면 뭐든 뜯어다 팔아버리니까 걱정이 되어서요. 뭐, 혹시 여력이 되시면 엄마가 밥 먹는지 정돈 봐주셔도 좋고요.
양피지가 다 끝나가네요. 아무튼, 가을이 다 지나가는데 감기 조심하시고요. 미리 성탄절 인사도 드릴게요. 메리 크리스마스. 편지는 또 할게요! 안녕!
제이미로부터.
그리하여 소년은 도박이라면 질색했다. 강박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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