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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Mother

  별은 맑고 파도는 만으로 밀려들었다. 에밀 레녹스 고다밍은 배의 갑판에 등을 대고 쓰러져 누워 메마른 감상을 떠올렸다. 선상 반란 이후 2년이다. 그런데도 좀처럼 몸에 밴 습관이 빠지질 않는다. 이질감이 가실 줄을 모르는 것이다. 이를테면, 별이 총총한 야심한 시각, 그가 갑판에서 밤하늘 따위를 쳐다볼 수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낯설었다. 재작년이었더라면 그는 오늘 밤도 나탈리 호의 창고 앞에서 불침번을 서야 했을 것이다. 소년 선원의 일상은 늘 그러했으니까. 친우가 눈을 붙이면, 한 사람은 눈을 벌겋게 뜨고 복도를 내다보아야만 한다. 샬레 선장을 위시한 폭력적인 어른 선원이 언제 불시에 잠든 어린아이의 머리채를 붙들고 끌고 갈지 알 수 없으므로. 특히나 그 우악스런 손길이 샬레 선장의 것이라면, 그날부로 살아 돌아올 수는 있을지 미지수였기에.

 

  그렇게 5년 넘도록 살았고, 거스를 수 없는 운명처럼 도래한 반란으로 샬레 선장을 끝장낸 이후로도 그는 불현듯 그렇게 살았다. 어느 날 전조도 없이, 누군가가 잠든 자신을 폭력적으로 끌고 갈 수도 있다는 강박 속에 잠 못 이루고 깨어나는 것이다. 예전 선장이 폭력으로 망가뜨렸던 오른쪽 눈은 분명히 아물었음에도 그럴 적이면 거짓말처럼 타오르듯이 아팠고, 까닭에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이 적대적인 타인의 시선처럼 느껴졌다. 아무도 없는 선실을 엉망으로 엎고 나면 꼭 그때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정리할 마음이, 혹은 기력이 도저히 솟아나지 않았다. 에밀 레녹스는 그럴 적이면 갑판까지 기어 나와 바다를, 저 너머 수평선을 내다보았다. 담배를 한참 태워내고, 그러다가 담뱃불마저 스러지면 지독하게도 검은 바다를 내려다보고, 무심한 눈길로 뱃전을 때려 하얗게 부서지는 물거품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럼, 도대체 어쩌다 그는 돌연 몸의 중심을 잃고 갑판에 쓰러져 누웠는가 하면, 우측 머리를 가득 태워 나가던 환상통이 끊이질 않아서는 아니었다. 바닷바람을 쐬면 달라진 환경이 와 닿아서인지 고통은 제법 말끔히 씻겨 내려갔는데, 이 검은 바다, 그들 모두를 뒤흔드는 불안에 시달리다 못해 불면하는 이가 에밀 레녹스만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해적선 위에서 살아 있는 것인지 죽어가고 있는지조차 분간이 안 가는 이 유령 같은 사내는 다름 아닌 에밀 레녹스가 선택해 앉혀놓은 선장이다. 그보다 세 살이 어리지만, 해적선에는 훨씬 오래전부터 있었던. 선장, 제임스 와이엇 윈프리드는 새벽 세 시가 넘어가는 시간에 갑판 위에서 마주해 좋을 게 하등 없는 인물이었는데, 에밀과 똑같은 불안과 광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는 빛 한 점 어리지 않는 갑판 위에서 마주한 에밀 레녹스를 대체로 알아보지 못했다. 밤눈이 제아무리 밝아도 그만한 장정을 불시에 해적선에서 마주하면, 윈프리드 선장은 도리 없이 적으로 인식하고 공격을 감행하는 거였다.

 

  에밀 레녹스는. 태평한 얼굴로 생각했다. 선장이 내 머리칼의 기장을 줄여놓은 게 오늘로 벌써 다섯 번째로군. 칼날은 피부를 스치지 않았으나 목덜미 가깝게 꽂혔고, 어깨까지 간신히 길러두었던 그의 새빨간 머리칼이 잘려 갑판 바닥에 널브러졌다. 선장이란 작자는 에밀 레녹스를 습격하고 나서야 그 얼굴을 알아본 것 같았다. 차게 얼어붙은 바닷바람 사이로 정적이 스민다. 선장의 녹색 눈동자는 한참 상황을 가늠하는 것처럼, 에밀을 집요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선장께서는 제가 머리칼을 도로 기르는 일에 불만이 있으십니까?” 에밀 레녹스는 도리어 선장이 가엾다는 눈을 했다.

 

  “학습이란 걸 좀 하는 건 어떤지 추천하고 싶다만.” 제임스 윈프리드가 시선을 거두었다. 에밀은 이럴 적마다 그의 얼굴에 아직 실수했다는 기색 정도는 남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느꼈다.

 

  “이미 한 번 머리채 잡혀서 선장한테 끌려가 본 적 있잖아. 2년쯤 전에.”

  “아, 눈 한 짝 망가진 정도로는 교훈이 부족하냐는 말씀인가요?” 에밀은 무심히 말했다. “그 옛날 선장은 당신께서 직접 도륙해주셨잖습니까. 그것도 2년 전이죠. 그리고, 머리칼 길이로는 선장께서 남들 잔소리하실 입장이 아니신 것 같습니다….”

 

  칼을 거두고 몸을 일으키면, 제임스의 머리 위에서 빛이 들었다. 해적선을 전반적으로 운용하는 저 실험실의 마법사가 갑판 위의 소란을 감지하고 깨어난 모양이었다. 어쩌면 빛이 든 곳이 여기뿐이 아닐지도 모른다. 마법사는 자신에게 할당된 공간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으려 드는 작자였으니까, 누군가의 선실을 불시에 밝혀 갑판을 살펴보도록 일을 꾸몄을지도. 영문도 모르고 빛이 들어 잠에서 깨어난 이가 기어 올라올 수도 있겠지. 어쩌면 이미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갑판을 따라 빛이 들면, 선장이 조금 멀찍이 물러나도 눈빛과 표정이 선명했다. 단순하게 하나로 묶은 검은 머리칼 하며 차림새가 간결하여 불면에 시달리다 불안에 겨워 밖으로 나왔다는 걸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보나 마나 제임스 윈프리드 또한, 에밀 레녹스의 꼴을 보고 알아차렸을 것이다. 자신과 소년 시절을 공유하는 이 가엾은 남자 또한 몇 번을 죽이고 또 죽여도 유령처럼 정신을 사로잡고 사지를 묶는 듯한 공포, 그래, 죽어버린 샬레 선장이라는 트라우마에 쫓겨 갑판까지 기어 나왔다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피차 엉망이네요.” 에밀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엉망으로 잘린 잔머리가 어깨 위로 한 번 더 흐트러져 떨어졌다. “무엇이?” 제임스 윈프리드는 에밀 레녹스가 머리칼이 묻어나는 어깨를 털어내는 모습을 멀거니 쳐다만 보았다. 거두어들인 칼자루는 여전히 굳게 움켜쥐고서.

 

  “얼굴이. 선장, 며칠 못 주무셨습니까?”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만. 넌 며칠 못 잤지?”

  “사흘?” 에밀은 숨죽여 웃었다. “선실도 엎어버렸지 뭡니까.”

  “잘하는 짓이다.” 제임스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말했다. “더 밤 깊기 전에 정리해. 네가 어질러놓고 잘 데 없다고 울어봐야 난 안 재워줄 테니까.”

  “그럴 때 우는 건 저보단 라파엘이었죠, 어려서부터.” 그리고 짧지 않은 침묵. 에밀은 갑판 바닥에 앉아 무릎에 팔을 대고 턱을 괴었다.

 

  “제임스.”

  “웬일로 이름을….”

  “그냥 가정입니다만,” 에밀은 고개를 들어 선장을 쳐다보았다.

 

  “우리가 선상 반란으로 나탈리 호를 탈취한 직후 육지로 돌아갔다면 뭐가 달라졌겠습니까? 이를테면, 둘 다 좀 덜 미쳤다거나.”

  “난 네놈을 육지에 내려다 주겠다고 약속한 일이 없다만. 무슨 꿈 같은 소릴.”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 정말 한 번도 없어요? 그립다거나….”

  “난 육지에 두고 온 게 없어. 그러니 그립거나 돌아가고 싶은 장소가 없지.” 그는 잘라 대답했다. “그리고 덜 미칠 방도가 있나? 우린 이미 나탈리 호에 탔을 때부터 미쳤는데. 애초에 안 미치고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부터가 아니었잖아….”

 

  에밀 레녹스는 육지에 두고 온 것이 있었다. 그가 나고 자란 어느 새하얀 항구 도시엔 가슴 아프도록 사랑하는 어머니가 계심을 모르는 선원이 없을 정도였다. 그야, 그는 해적선에 유괴된 이래 어머니에게 보내지도 못할 편지를 수백장, 수 천장 적어냈다. 15살 적부터, 어른 선원들의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마치 그럼에도 이상향은 있다고 믿어야만 미치지 않을 수가 있을 것 같다는 것처럼.

 

  한편 제임스 윈프리드는 가끔 자신보다 늘 머리 하나만큼은 컸던 세 살 연상의 에밀 레녹스가 창고 바닥에 엎드려 어차피 아무도 읽지 못할 편지를 적는 꼴이 기괴하다고까지 생각했다. 가끔은 그의 어머니라는 여자가 사실은 실존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까지 했다. 에밀 레녹스가 해적선이 유괴되고도 벌써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다른 해적선도 아니고 샬레 선장의 나탈리 호는 특히 아이들을 잡아먹기로 유명했으니, 그의 어머니가 실존한다면 아들을 포기했을 것이고 장례도 치렀을지 모를 일이다. 에밀이라고 그걸 모를까? 아들이 실종된 도시를 못 견뎌 떠났을지도 모르고, 운이 나쁘다면 아들을 뒤따라 죽었을 수도 있겠지.-물론, 제임스는 그러한 헌신적 어머니의 실존마저 의심한다.- 그가 어머니라는 존재에게 바치는 사랑은 가히 신앙에 가깝다. 그가 육지에서 경험했다는 부모에 관한 내리사랑을 듣고 있자면 배에 한가득 떠돌아다니는 미신을 목도한 기분이고, 그가 어머니가 계실 육지로 돌아가는 것이 옳았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꺼내면 결국 못 참고 그 말을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만 포기해라, 레녹스.” 칼을 쥔 채로.

 

  “나탈리 호에 탄 시점부터 너도 육지를 잃었어. 너의 사랑하는 어머니가 육지에 살아계신들, 널 기다리고 있을 리가 만무하잖아. 넌 이미 육지에서 죽은 사람이 되었을 거고, 무덤도 있을 거다.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 네 말마따나 그토록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시라는 분이 비록 생존을 위해서였다지만, 자식이 수많은 사람을 살해한 해적이 된 걸 어떻게 받아들이실지는 자명하지….”

 

  가끔 그에게는 그런 식으로, 사랑의 개념을 끝까지 부정하고 싶다는 까닭 모를 강박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나는 부디 네가 나탈리 호를 배신하는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제가 오즈로 돌아가면 해적단 동지들을 팔아치울 거라고 생각하시는군요.”

  “물론이지. 너만큼 위험 분자가 대체 어디에 있나? 있지도 않은 어머니라는 개념에 현혹되어서 여전히 뜻 모를 편지나 적어대는 사이비 미친놈인 것을.”

  “그래도 절 살해할 수 있으실 것 같진 않은데.” 에밀은 서운하지도 않다는 듯이, 담담한 투로 말했다.

 

  “그럼에도 이 지옥을 함께 견딘 당신의 형제입니다. 알고 계시잖아요?”

  “내가 널 죽이지 못할 것이다?” 제임스 윈프리드는 그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살해하지 못할 인간이 어디 있겠나?” 그가 항해하는 바다에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검은 물밑으로 도사리는 것은 오로지 쓰러트리고 물리쳐야만 하는 향유고래뿐으로,

 

  “자만은 하지 말지. 나는 네게 하다못해 쓸만한 작살은 되라고 말하고 있는 거니까. 그렇게만 하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너의 그 얄팍한 낙원에서 굶어 죽진 않게 될 테니까. 그래도 고르자면, 죽어버린 어머니보단 살아 있는 해적선이 낫다고 본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