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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7학년] 피에타

1.

  여름에 찍은 사진을 책상 한가득 널브러뜨렸다. 움직이는 사진이 8할, 움직이지 않는 사진이 2할이다. 통금 직전, 밤 깊은 도서관의 불빛은 깊고 그윽하며 사서는 불빛을 말갛게 밝힌 지팡이를 들고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며 1시간만 지나면 통금이니 학생들에게 기숙사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루빈스타인, 너도 예외는 아니란다. 반장이라도 말이야.” 그녀는 제리의 뒤를 소리 없이 스쳐 지나가며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어요. 곧 돌아가겠습니다.” 대답은 쉽게 하고, 그 후 제리는 20분 가까이 자신이 찍은 여름의 기억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올가을 호그와트에 돌아와 사진을 모아 점검하고 나서야 고개를 든 의문이었다. 어쩐지 넬리 루빈스타인이 그런 말을 하더랬다. 올해는 우릴 좀 많이 찍는구나.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니?

 

  저질렀다. 제리의 의사가 반영된 행위가 아니었으므로,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러한 동사를 사용하여 정의 내릴 수밖에 없겠다고 느꼈다. 어쩌면 졸업이 코앞이라 고향과 이모 부부를 많이 찍고 싶다고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보통은 학교를 졸업하면 독립하지 않던가. 제리는 호그와트를 완전히 떠나도 요크셔로 돌아갈 테고, 어쩌면 평생토록 루빈스타인 부부의 극장에서 일손을 보태며 평화로운 전원생활을 할지도 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도 모르게 감상적으로 변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이제 넬리 이모도 안톤 이모부도 나이가 적지 않으시니까, 지금부터 부지런히 기록을 남겨두어야지. 그래, 자신에겐 피를 이은 형제나 혈육이 없지 않나? 지금은 어디서 사는지도 모를, 그저 제리에게 비주기적으로 하울러를 보내 신경을 거스르고 있을 뿐인 어느 마녀 하나를 빼자면….

 

  그러고 보면, 자신은 어째서 호그와트를 그토록 많이 찍었던가? 매년 부지런히, 같은 장소를 수없이 찍기도 했다. 이를테면 아침이면 햇살이 미끄러지는 탁한 호수와 숲이 가까운 오두막, 호박밭과 교정, 버드나무가 선 곳. 그리고 때로 벅차도록 반짝이는 학우들의 모습을, 어마어마한 양의 필름을 소모하면서.

 

  사진을 그러모았다. 하얗고 불투명한 봉투에 넣은 후 품에 넣으면, 사서는 제리에게 다가와 한 번 더 엄중한 목소리로 경고한다. “이제 정말 퇴실해야 한단다, 루빈스타인.” 제리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책상을 짚고 일어났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래, 졸업이 코앞일 뿐이다.

 

2.

  “뚱보 여인은 금방 돌아올 거란다.” 그림 속에서 나른한 얼굴을 한 수도사는 말했다. 그리핀도르 기숙사 입구는 커다란 초상화가 막고 있었는데, 그녀가 잠시 다른 그림 속으로 나들이를 갔다는 것이다. 통금이 코앞이었고,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에서 잠이 들었다고 그녀는 착각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인근에 걸려 있던 다른 그림 속 인물들이 제리의 사정을 봐주었다. 초상화 속 여인을 찾아다 줄 테니 제리에게 잠시 계단에 앉아 기다리라고 권유해준 것이다. 제리는 그리하여 기숙사 입구 근처의 계단에 앉았다. 나이 든 수도사는 늘 그 액자에 있던 인물은 아니었지만, 글쎄, 호그와트 복도엔 너무 많은 그림이 걸려 있어 그가 원래 그려졌던 액자가 어디인지 추리하기란 쉽지도 않을 터였다.

 

  “네가 그리핀도르의 루빈스타인이로구나.” 수도사는 말했다. 제리는 무릎을 끌어안고 앉은 채 턱을 괴었다. “선생께서는 오고 가는 모든 학생을 기억하시나요?” 수도사는 후드를 깊게 쓴 나머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전부 기억하진 않지.” 엄숙한 목소리는 정직하게 고해했다.

 

  “그저 초상화들 사이에 오고 가는 소문을 좀 기억할 뿐이란다. 너만 기억하는 것도 아니고. 우린 액자 속에서 할 일이 없거든. 그리핀도르엔 예술을 하겠단 사람들이 잘 입학하지 않았으니 어떤 그림들은 널 기억하기도 하는 거지….”

  “하긴, 보통은 래번클로죠. 예술을 지향하는 애들은요.”

  “영화를 한다고 했던가?”

  “많이 아시네요.”

  “머글 예술을 하겠다는 학생은 기숙사를 다 합해도 흔치 않으니까.” 수도사는 느릿느릿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만들지? 좀 궁금하구나. 폴란드의 루빈스타인 가문은 네가 영국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걸 용납하는지도 궁금하고. 내 기억이 맞다면, 바르샤바의 그 지독한 순수혈통 위선자들은 분명 예술보단 자선 사업 따윌 했던 것 같은데.”

 

  제리는 수도사가 그려진 액자를 고개 들어 올려다보았다. 높이 걸렸지만, 액자가 제법 커다랗다. 호그와트의 집요정들이 구석구석까지 깔끔하게 청소하는 까닭인지 액자 테두리 장식에 조금의 먼지도 묻어 있지 않았다. 제리는 그 수도사가 몇 세기의 인물인지 몰랐다. 얼굴과 차림새만으로는 그가 머글 태생인지, 혼혈인지, 순혈인지 알 도리가 없었고, 그건 수도사도 마찬가지일 터다. 제리 루빈스타인이 영화를 한다는 건 알아도, 그가 바르샤바의 루빈스타인 저택 따윈 가본 적 없는 방계 혼혈이라는 사실은 저 높은 곳에서 굽어보아도 알 수 없는 정보 값인 것이다.

 

  그래, 저 하늘 위에서 굽어보시기에 얼마나 우습겠더냐. 혈통이라는 뿌리 없는 유령이 마법사 사회를 배회하며 시민들의 눈을 흐리고 있도다.

 

  “<피에타>라는 제목을 써볼까 하는데요.”

 

  수도사의 고개가 기울어진다.

 

  “하필이면? 마법사들은 성경을 은유한 작품이라면 이단이라고 생각할 텐데도. 무슨 내용의 영화가 될는진 모르겠다만 제목만으로도 머글적이고 도발적이어서 관람할 가치도 없다는 비평이 잡지에 쏟아질 게 뻔해.”

  “그렇기 때문에요.”

  “…저런. 이 모든 갈등을 수습할 메시아라도 원하는 모양이구나.”

  “아뇨, 시대의 어둠을 종결하기 위해 필요한 빛은 사랑이라고 믿는 거예요. 그 십자가를 모두가 나누어서 지자는 말이고요.”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간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게 누가 될진 뻔하지.” 제리는 수도사가 돌아서는 모습을 말없이 쳐다만 보았다.

 

  “너도 오랜 못 살겠구나. 하여간, 그리핀도르에서 예술 하겠다는 놈들은 하나 같이 명이 짧아. 네놈들 눈에 불의가 보이면 사회와 타협할 줄을 모르거든. 자기가 만든 예술품으로 시대에 덤볐다가 휘말려 죽어버리는 놈들이 한둘이라야지. 그건 만용이지 용기가 아니건만, 불나방들도 아니고 왜 시대의 파도를 거스르며 정의니 사랑이니, 마법사들 귀에 경을 읽느냔 말이야…,”

 

  그리고, 귓가에 방향을 잃은 자조가 맴돌았다.

 

  “아, 그래서 네놈들 교복이 붉은색인가? 그래도 부디 십자가는 혼자 지려무나. 그런 거 만들다가 주변까지 휘말려 죽게 만들지는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