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떠나고 교실에 한차례의 침묵이 밀려들었다. 누군가가 먼저 불만 어린 숨을 토하면 억눌렸던 불평이 해일처럼 교실을 휩쓸었다. 가히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다니시는군, 교수가 떠난 빈 칠판을 쳐다보며 라이언 가드너는 생각했다. 이럴 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그는 어른 마법사들이 숱하게 오가는 다이애건 앨리에서 매해 여름을 나고 있었다. 어른들끼리 나누는 대화를 귀동냥하기만 해도 마법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얼추 큰 그림 정돈 알 수 있었고, 그런 마법부가 선별한 교수라면 최소 상식적인 인사는 아닐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다만 이런 수준일 줄만 몰랐던 것이다. 그러잖아도 학생 사이에서 좋은 이미지라곤 없는 양반께서 불필요한 반발을 일으키면 어떡하나? 그만큼 돌아가는 머리가 없나? 저 선생이 몸담았던 기숙사가 슬리데린이라면, 가히 살라자르 슬리데린의 슬하에서 나고 자란 최고의 수치로구나.
라이언은 뒷자리에 앉아 느릿하게 깃펜, 양피지, 교과서 일체를 천천히 정리해 그러모았다. 그러는 도중 누군가는 학교를 관둘 방법을 찾겠다고 했다. 누군가는 수업을 빠지겠다고 했고, 또 어느 학우는 그 와중에도 수업에는 꼭 참석해야 한다며 주변의 이를 설득하고 있는 것 같이 들렸다. 크로스백에 물건을 담고, 어깨에 멨다. 소란을 틈타 자리에서 일어나면, 의자 끌리는 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라이언 가드너는 차별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리석은 것을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것만큼은 명확했다. 가장할 것도 없었다. 그는 무지를 신앙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묻는다면 기꺼이 그렇다는 사실을 밝히겠지만.
그는 무심한 얼굴로 학우들의 면면을 훑듯이 교실을 둘러보았고, 그저 태연하게 교실을 빠져나왔다. 그렇지, 여기서 라이언이 무엇을 알고 모르는가, 그런 게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저 이상한 교수로부터 직접적인 상처를 받은 이들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오늘의 무대는 저 멀리 뒤로 하고 복도를 따라 걸었다. 기숙사로 내려가는 복도는 어두워지고, 호수 밑 지하로 가까워질수록 빛은 흐려졌다. 불빛이 암전한다. 무대의 뒤로는 원래 조명이 닿지 않고, 그 무엇도 실존하지 않으나….
* * *
질문 하나. 피로써 우등과 열등을 가를 수 있느냐?
* * *
라이언 가드너는 동이 틀 무렵이면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났고, 학우들이 잠든 고요 속에서 휴게실을 오롯이 차지하고 앉아 있기를 좋아했다. 벽난로는 타오르고, 동이 트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속 깊이까지는 새벽노을이 깃든 시간이다. 그는 벽난로 앞 소파에 앉아 나른하게 눈을 깜박였고,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코끝까지 올려 호흡만을 따뜻하게 녹여두었다. 눈꺼풀이 감기면, 칠판에 적혀 있던 불호령 같은 질문이 고개를 들었다. 사실 라이언이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이었다. 지식적으로든, 혹은 출제자가 원하는 것이든.
어느 쪽이든 적어주는 게 무엇이 어렵겠는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 어렵고. 전부 표면이고, 라이언은 얼마든지 꾸며낼 수가 있었다. 이 끔찍한 질문 앞에서 라이언이 견지해야 하는 입장과 의견은 없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건, 무엇을 믿고 무엇을 원하고 갈망하건, 또 무엇을 사랑하고 증오하건 그것은 오롯이 라이언 개인의 문제로, 시대와 대중은 그에게 별반 관심이 없었다. 누가 그렇게 묻겠느냐는 말이다. 너 대체 누구 편이야? 아니, 그 전에 라이언 크레드네 가드너가 그 교실에 앉아 있었고, 그 또한 무슨 생각인가를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있기나 하겠나.
대체 뭐가 중요하겠나? 그가 뭘 알든 말든, 혹은 아는 것을 행하든 말든, 지구는 돈다.
소파에 파묻히듯이 앉아 있다가 조금 몸을 움직였다. 낮은 테이블 위에 널브러뜨린 빈 양피지를 제 앞으로 당겼고, 깃펜에 잉크를 묻혔다. 그러니 상대가 원하는 말을 적자. 당신이 믿는대로 지구는 돈다고 적자. 아니, 그 이상한 교수는 태양이 돈다고 적기를 원할까? 처세는 이다지도 쉽다. 깃펜을 움직여, 무심한 눈길로 검토조차 하지 않은 문장을 쓴다. 순수혈통이 우월하다고. 과학적 사실이 아닌 것. 마법사 사회가 떠받드는 종교의 교리일 뿐, 근거 하나 없는 헛소리와 헛소문. 라이언 가드너도 아는 사실.
그리고 누군가가 너는 혈통우월주의자가 아니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날에는 태양 아닌 지구가 돈다고 말해야지. 쉬워서 지루하고, 사실은 누가 이기든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진실로 무엇을 믿고 생각하든,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가 않은 까닭에.
'커뮤니티 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이언/4학년 STORY] 화마에 관하여 (0) | 2023.01.02 |
---|---|
[라이언/보가트] 그러나 여신은 그를 위해 노래하지 않는다. (0) | 2023.01.02 |
[누아다/리뉴얼] 달바흐 녹턴의 장례식 (0) | 2022.10.21 |
[제리] Heathcliff-기사도와 용기, 만용, 그리고 불굴에 관하여 (0) | 2022.10.21 |
[제리/리뉴얼]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0) | 2022.10.21 |